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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달을 보지 않으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다?
-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의 원리 II
인간은 과학을 통해 무지에서 지식으로 진보시켰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사이의 혼돈은 끊임없이 진보를 방해해 왔다. ‘모른다‘와 ’알 수 없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역사적으로도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인간 인식에 한계를 두는 시도들이 있어왔다.
칸트는 물-그-자체(Things-in-Themselves)가 아닌 오직 현상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버클리(Berkeley)와 흄(Hume)과 같은 주관적 관념론자들은 인간의 의식을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다만 그것이 인간의 의식에 나타나는 한에서만 그 존재를 인정했다 하이젠베르크 역시 양자역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그의 전체적인 관점은 주관적 관념론을 반영하고 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의 원리
하이젠베르크에 따르면 측정할 수 있는(경험할 수 있는) 것만 의미가 있다. 이것을 '측정 = 의미 원칙 meaning principle'이라고 하는데, 이 원칙은 신(God)과 같이 측정되지 않은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하므로 종교적 미신을 물리치는데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의식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객관세계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새로운 미신을 만들었다.
하이젠베르크의 ‘측정 = 의미원칙‘에 따르면 '입자의 위치'는 적절한 실험 장치로 측정할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불확실성원리에 따르면 운동량(위치)의 불확실성은 입자의 '위치(운동량)'를 측정할 때 그 측정 장치가 ’운동량(위치)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발생한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각각은 최대한 정교하게 측정할 수 있지만 이 두 물리량(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교하게 측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입자가 정확한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같은 논리로 우리가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측정할 수 없다면 달이 존재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원자폭탄을 폭발시켜 그 효과를 측정할 수 없다면 그 효과를 말하는 것 또한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입자의 위치를 아주 정확하게 측정하면 운동량은 변하게 된다’는 말을 ‘측정 = 의미원칙‘에 따라 정확하게 분석해 보면 재미있는 결론에 도달한다. 위치는 정확하게 측정되기 때문에 의미가 있지만,’운동량이 변하게 된다‘는 말은 측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의미한 말이 된다.
하이젠베르크는 스스로 빠진 이 모순에 대해 해결을 시도한다. 입자의 초기 운동량(pi)을 아주 정교하게 측정하고, 바로 이어 입자의 위치(x)를 최대한 정확하게 측정한다. 또 바로 다음에 다시 운동량(pf)를 측정했다고 해 보자. 이 값들은 모두 각각 따로 측정했기 때문에 최대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초기 운동량(pi)을 측정한 후 바로 위치(x)를 측정했기 때문에, 초기 운동량(pi)는 위치 측정 직전에 입자가 갖고 있는 운동량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위치(x) 측정 후 운동량(pf)도 측정했으므로 변한 운동량 |pf-pi|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불확실성 원리를 어기지 않고 ‘변하는 운동량’을 측정할 수 있다. 여기까지 그의 설명은 완벽한 듯 보인다.
아무도 달을 보고 있지 않다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아직도 완벽하지 못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약간 다른 상황을 설정해 보자. 입자의 운동량(pi)을 측정하고 일정시간 후 그 입자의 위치(x)를 측정했다고 해보자. 이 경우 입자의 운동량을 측정한 직후부터 입자의 위치를 측정한 직전까지는 입자의 경로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 그러면 그 기간 동안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정확하게 알 수 있으므로 불확실성원리는 유효하지 않다. 이러한 결론은 하이젠베르크도 인정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하이젠베르크는 초기 운동량(pi)과 같이 과거에 측정된 값을 이후 측정된 위치(x)의 초기 값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다시 주장한다. 이들 두 시점 사이의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입자의 “‘경로‘는 입자를 관찰할 때만 나타난다(실재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것을 '측정 = 발생 원칙 creation principle’이라 부른다. 이 원칙에 따르면 밤하늘의 달을 아무도 측정하지 않는다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1950년대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양자역학의 주류 흐름에 반발해서 '누군가 달을 보고 있을때만 달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1981년 물리학자 데이비드 머민(David Mermin)은 "아무도 달을 보고 있지 않다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아무리 유명한 과학자의 결론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결론을 따를 이유는 없다. 하이젠베르크는 "다른 무엇보다 기저에 깔려 있는 철학적인 생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과 공간속에 객관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있다는 관념을 제거하기 위해"필요했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의 철학적 해석은 과학적 실험에 의한 객관적 결과가 아닌 그의 관념주의 철학의 결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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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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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글이 참 많군요. 이 글을 읽다가 아무래도 논쟁의 여지가 보여서 한번 적어봅니다.'정확하게 관측할 수 없음'과 '결코 관측될 수 없음'을 구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정확하게 관측할 수 없음'은.. '관측할 수는 있으나, 관측된 값은 오차를 가질 수 밖에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위치를 재는 실험을 했더니, 그 실험 방법이 운동량에 영향을 주어서, 이 실험에서 관측되는 운동량은 실제 그 전자가 가지고 있던 값을 반영하지 않음.. 정도의 느낌입니다...
윗글이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결코 관측될 수 없음'은 그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간접적으로라도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대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굳이 생각할 필요없음..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은데요.
양자역학에서 관측이란, 결국 물질간의 상호작용, 혹은 물질과 에너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우리가 세상에 대한 정보를 얻는 활동..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작은 에너지를 사용해서 그 계를 측정하더라도, 계 자체가 너무 작은 세계이면, 측정자체가 미친 영향이 중요하게 된다는 것이 불확정성의 원리가 내포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고요,
양자역학에서 '관측''이라는 것이 결국 물질의 상호작용을 의미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결코) 관측할 수없음'은 내가 접하는 물질들과 상호작용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서, '내가 속한 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밤하늘의 달을 아무도 측정하지 않는다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우리가 밤하늘의 달을 관측하기위해 무슨짓을 해도 전혀 관측할 수 없었다면, " '달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도 내가 속한 세계의 현상을 이해하는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죠... 즉, '아무도 달을 어떤 방법으로도 관측할 수 없다'는 '달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동등해집니다.
여기서 관측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단지 눈에 안보이는 것뿐이니라, 지구의 공전이나 자전궤도도 달의 존재를 보여주지 않고, 조수 간만의 차도 달의 존재와 상관없이 일어나고, 내가 속한 계의 어떤 물질도 달의 존재와는 무관하게 움직여서 어떤 간접적인 방법으로도 달의 존재를 알아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아인슈타인과 데이비드 머민의 문답은 글자그대로의 의미보다는 물리이론에 대한 함축적인 표현들이라 생각됩니다...만, 제가 물리 전공이 아니라서 더이상은 말하기가 어렵군요..
만약에 '측정 = 의미 원칙'이라는 것이, '누군가 달을 보려고 하면 달이 존재하게 되고, 누군가 달을 보려고 하지 않으면, (달의 존재를 아직 모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고 있지 않기때문에) 달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라면, 저는 개인적으로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굳이 동의를 해야한다면, 이 사람들은 뭔가 이론에 관한 이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보겠습니다만..
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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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정성의 원리에서 '정확하게 관측할 수 없음'은.. '관측할 수는 있으나, 관측된 값은 오차를 가질 수 밖에 없음'"으로 이해한다면, 저와 시각이 동일하다 생각됩니다.제 생각에 문제 점은 "관측될수 없음=존재하지 않음"으로 보는 시각이 주류라는 점입니다.
그 결론은 불확정성원리=>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만고 불변의 진리(선험적 진리)로 인식되게 합니다. 이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아무도 달을 어떤 방법으로도 관측할 수 없다'는 '달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동등하다면, 그것으로 인식이 완결되어 버립다. 즉, '현 수준에서 우리는 달을 관측할 수 없지만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시각과 '존재하지 않는다'는 시각은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시각을 잘못된 시각으로 확장시켜 봅시다. 누군가 달을 관찰했다고 합시다. 그때 부터 달은 존재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달이 무엇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하면서, 인간의 의식을 개입시킵니다. 즉 인간의 의식(감각, 관찰)이 달을 존재하게 한다는 식의 논리...
아울러, 관찰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시각은 논리실증주의 시각이며, 관찰(혹은 인간의 감각) 자체를 절대시 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