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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좌파의 상상력


  신좌파의 상상력

'신좌파의 상상력'을 쓴 조지 카치아피카스  올해초에 나온 '신좌파의 상상력'이라는 책이 생각보다 꽤 많이 읽힌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책은 68년의 유럽과 70년의 미국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보통 68혁명으로 통틀어져서 불리는 반전, 흑인민권운동, 교육 운동, 반문화 운동 등의 일련의 운동들은 이전의 몇몇 중요한 혁명들과 어떤 면에서는 비슷하고 어떤 면에서는 다르다. 서구의 혁명들. 1793년 프랑스 혁명, 1848년 2월 혁명, 1871년 파리 코뮌, 1917년의 러시아 혁명 등등. 이 혁명들에는 모두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열정들이 담겨져 있었다. 자신들이 살고 있던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과 에너지들. 68혁명은 그런 점에서 기존의 혁명들과 닮아있다.

  하지만 68혁명이 기존의 혁명들과 차별점을 가지는 것은 바로 기존의 권력을 전복시키고 그 권력을 획득한다는 문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변혁에 대해서 열망했고 그것을 어떤 형태로건 나타내려 했다는 점이다. 물론 기존의 혁명들에서도 권력을 바꿈으로써 삶의 변화를 꿈꾸고 실천했다. 하지만 68혁명처럼 그 문제가 혁명의 핵심적인 문제로 떠오른 적은 없었다. 또 68혁명처럼 문화와 정치가 융합될 가능성을 표출했던 적은 없었다.

  이러한 68혁명은 기존의 몇몇 혁명처럼 정치권력을 바꾸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68혁명은 서구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는 계기가 되었고, 그 의문들에 대한 답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부분들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변화는 철학적 논의 및 유럽의 공산당과 맑스주의 내부에서도 존재했다. 선험적 진리를 구하려고 했던 근대 철학이라는 사실에서 한치도 자유롭지 못했던 당시의 유럽 맑스주의는 68혁명 속에서 공산당과 좌파 실천가들의 보수적 태도에 반성을 시작했고, 그 반성에서 비맑스주의적인 철학적 조류들과의 절합이 시도되었다. 특히 프로이트와 언어학의 유산을 이어받은 구조주의 이론들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탈구조주의.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그 진리를 추구하려는 힘을 찾아내려는 니체의 영향. 그리고 소련이라는 사회를 거쳐서 해석된 맑스가 아니라 처음의 맑스로 돌아가 다시 새롭게 해석되는 맑스. 크게 이러한 3가지 바탕 아래에서 맑스주의 및 사회 이론에 대한 재구성이 시도되기 시작했다. 그 중 현재 우리 사회에서 신좌파 이론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사상들은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가타리 등의 사상이다. 특히 문화과학이나 서울사회과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이들의 사상에 대해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필자의 능력과 지식 부족으로 그것들을 모두 소개할 수 없다. 또 그들의 주장이 모두 옳다고 말할 수도 없다. 계간지 '문화과학 18호'에서도 보듯 아직 이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논란들이 오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들의 입장이 옳고 그른지를 떠나서 아직 우리 나라 사회에서는 신좌파라는 개념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도 않고 그 개념들이 제대로 작동해본 적도 별로 없다. 신좌파들의 주장이 기존의 한국 진보 사상과 실천들에 유의미한 점들이 있을 듯한데 처음부터 오해되고 거부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 글에서는 필자의 무식함을 드러낼 각오를 하고 몇 가지 유의미한 논의들을 알튀세르와 들뢰즈/가타리의 이론을 바탕으로 풀어내보겠다.


  알튀세르의 이론

알튀세르  사회과학을 많이 공부한 것도 아니고 알튀세르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자세하게 말할 자신은 없다, 그냥 내가 생각하기에 알튀세르에게서 중요했던 이론에 대해서 설명해보겠다. 우선 알튀세르에게서 가장 중요했던 개념으로 '모순의 중층결정'이 있지 않을까 싶다. 꽤 오랫동안 그리고 현재도 상당히 맑스주의의 중심 도그마가 되었던 '토대구조(경제)에 상부구조(정치, 종교, 이데올로기 등)가 제약된다'는 이론에 대해서 알튀세르가 반기를 든 것이다. 그래서 지배 계급과 이에 대항하는 피지배 계급이라는 이항적 관계 속의 변증법을 통해서 세계가 진보한다는 생각에 수정을 가하기를 요구한 것이다. 이런 태도로 인해 상대적으로 경제 이외의 부분들이 부각되기 시작되었고 현재의 지배 체제에 대해서 다른 각도로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 중 특히 우리나라에서 알튀세르가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이론들이 문화라는 부분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틀거리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알튀세르에게서 중요한 개념은 바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이다. 맑스주의는 '지배계급의 사상이 그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서 알튀세르 이전에는 일부 예외(라이히 정도?)를 제외하고는 의식의 문제로 여겼다. 그래서 혁명을 사고할  때도 지배 계급의 허위적 의식의 폭로를 통한 기층 민중들의 사고의 변화를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알튀세르가 사고했던 부분은 바로 무의식의 차원이었다. 당시의 구조주의 이론들을 맑스주의에 도입하면서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배 체제에 순응하는 메커니즘을 규명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메커니즘에 중요한 장치로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얘기했다. 특히 알튀세르가 중요하게 분석했던 것은 가족제도와 교육제도였다.

  이런 알튀세르의 이론은 우리나라에서 80년대 말 이후로 급속하게 팽창하고 있는 대중문화라는 부분에 대해서 분석하고 개입해 들어가는 이론적 틀거리로서 작용하고 있다. 강내희 교수의 말을 빌면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대중문화의 영향력이 가족과 교육의 영향력을 압도하였고, 그 문화를 분석하는데도 알튀세르의 논의가 유용하다는 것이다. 이런 알튀세르의 논의를 통해서 결국 강조될 수 있는 부분은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재생산'의 문제, 이진경의 말을 빌자면 '생산양식'이 아니라 '주체생산양식'이다. 쉽게 말하자면 기존의 맑스주의가  생산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착취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사고하고 그것을 전복시킬 꿈을 꾸었다면, 알튀세르는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관계에 편입되어 들어가는지에 대한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그 메커니즘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실마리를 제시했던 것이다. 결국 혁명이나 사회변혁을 위해서는 의식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장치와 배치'에 주목을 해야하고, 그것은 기존의 자본주의 지배적인 집단들 뿐 아니라 맑스주의자들 내부에게도 적용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들뢰즈/가타리의 이론

들뢰즈  알튀세르의 이론들은 사회를 분석해내는데 유용한 해석틀을 제시해주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알튀세르의 이론들은 '그럼 누가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들뢰즈/가타리의 공동 연구가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지 않을까 싶다. 들뢰즈/가타리는 저항과 탈주의 문제를 사고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니체의 유산을 많이 물려받았다. 수많은 근대 철학자들이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진리의 문제를 추구하던 때에 니체가 한 일은 바로 '누가 왜 진리를 추구하려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니체는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그것을 진리로 만들어 통용시키려고 하는 권력의지와 그 권력의지에 의한 진리효과만이 존재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신(진리)은 죽었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허무주의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은 이 사상을 들뢰즈/가타리는 어떻게 자신들의 사고틀로 끌어들였을까? 들뢰즈/가타리가 강조하는 것은 진리효과를 생산하는 힘에서 끊임없이 탈주하는 '생산적인 욕망'이다. '유목민적 삶을 지향하는 욕망'은 그 삶들을 한 곳에 고착시키려는 '영토화'의 힘에 맞서서 '탈영토화'를 감행한다. 이런 벗어남에 대해서 다시 '재영토화'의 위협이 가해져 오지만 고착된 그 지점을 벗어나려는 욕망들은 결코 죽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들뢰즈/가타리가 꿈꾸는 삶이다. 이런 그들의 태도는 정치적으로 '몰적 경직성'을 반대하고 '분자적 미시정치'를 촉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욕망하는 기계들의 복수성은 단일한 목적하에 훈육하고 위계화할 수 있는 표준화되고 질서정연한 체계들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 상이한 지층들은 계급, 연령, 성별, 출생지, 직업 유형,  성적(性的) 성향 등으로 구획되는 서로 다른 사회집단들로 구성된다. 그것은 결코 한 덩어리의 바위 같은 통일성을 이루지 않는다. 대중들의 투쟁에 통일성을 기초짓는 것은 바로 그들의 욕망의 단성성(單聲性)이지, 그 욕망을 표준화된 목적들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통일성은 욕망의 복수성을 방해하지 않지만, 반대로 이 욕망들이 대표자로서 당이라는 전체주의, 총체화기계에 의해 '처리'되는 경우, 통일은 욕망의 복수성에 장애가 된다.(펠릭스 가타리, 파시즘의 미시정치 中)

  재영토화하는 힘에 대해서 끊임없이 탈주한다는 것은 우선적으로는 틀에 박힌 자본주의사회의 규율적 생활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이것은 기존의 운동 집단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어떤 메타 담론 아래에서 일사분란하게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선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바꾸어나가는 운동을 하는 것. 하지만 이러한 분자적 미시정치가 거시정치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리

학이나 화학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던 분자들이 어떤 계기에 의해서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여 에너지의 이동을 가져오듯이,  미시정치도 거시정치로 전화할 가능성들은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어떤 총체화하는 힘에 의해서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흐름 속에서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들의 언어를 빌자면 '수목적 활동성'이 아니라 '리좀적 활동성'을 지지하는 것이다.


  신좌파에게서 주목해야 할 점

  이러한 알튀세르와 들뢰즈/가타리의 이론을 배경으로 신좌파에게서 주목해야 될 점들을 내 나름대로 3가지로 정리해 보겠다.

  첫째로 미시정치와 거시정치의 절합 가능성이다. 구좌파들이 거시정치에 집중적으로 역량을 쏟아온 것이 사실이고, 지난 10년 동안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적 조류와 함께 개인을 중시하는 풍조가 생겨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은 메타 담론을 파괴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사회 성원들을 폐쇄적 나르시즘에 빠져서 소비자본주의라는 또다른 메타담론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신좌파의 탈근대적 기획은 주체들의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되 그것이 폐쇄적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매번 갈등과 쟁점 사이에서 새로운 연관을 맺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미시정치를 행하되 연대를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거시정치에 대한 가능성을 항상 활짝 열어놓는 것이다.

신좌파의 사고를 통해 이 10대들의 일탈을 제대로 이해하고 개입할 수 있을까?  둘째로 생산성 개념에 대한 다른 인식이다. 기존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생산된 잉여가치를 누가 가져갈 것인가를 가지고 계급 투쟁을 벌였다. 그러한 계급 투쟁은 화해할 수 없는 두 계급간에 끊임없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런 계급 투쟁 속에서 알게 모르게 기본 전제로 깔고 있었던 것은 '잉여가치의 무제한적 축적'이다.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의 경우에도 임투는 많이 이루어졌지만 이러한 기본전제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한 적이 별로 없다. 신좌파들은 이러한 잉여가치의 무제한적 축적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본, 자원, 필요노동시간의 사용을 줄일 것을 주장한다. 대신 그 남는 시간을 자기 이해와 자기 충족성을 증진시키는데 사용할 것을 주장한다. 최근에 얘기되고 있는 '문화사회 실현을 위한 노동시간 단축'의 주장은 바로 이런 배경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진보의 개념도 '분배적 평등'에서 '자율성과 욕망'이라는 개념으로 전환된다.

  셋째로 노동력 재생산에 대한 이해이다. 기존의 노동력 재생산에  대한 이해는 주로 의식적인 면에서만 강조되었다. 허위 의식을 통하여 성원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거나 묵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신좌파들은 '욕망/감성적신체/무의식'을 강조한다. 자본주의에  적응하고 그 체제의 충실한 수행원이 되는 과정에는 단순히 의식의 문제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장치들에 의해서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이루어지는 신체적 규율과 무의식의 형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대중문화에 대해서 분석할 때 의식의 문제만을 강조하게 된다면 대중 문화의 폐해에 대해서 비판은 열심히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별 뾰족한 개입을 해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러나 대중문화 속에 투영된 욕망들을 읽어나갈 태도를 가졌을 때 그 욕망들을 어떤 식으로든 분석할 수 있고, 그 욕망들을 자본주의의 질서에서 이탈하게 할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할 여지가 남겨진다.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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