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9'에 해당되는 글 13건
- 호남차별에서 이주노동자 차별로 2007/09/13
- 사기결혼의 가해자와 피해자 2007/09/11
- 화성보호소 방문조사 2007/09/08
| 호남 차별에서 이주노동자 차별로 | ||||||||||||||||||||||||||||||||||||
| [칼럼] 외국인 100만 시대, 지역주의 그리고 07년 대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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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들은 어디서나 3D 업종 등 가장 낮은 사회계층에 편입되고, 그에 따라 국내 노동자들은 계층상승의 덕을 보게 되지만, 극우파의 선동에 가장 쉽게 넘어가는 계층이 바로 그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본 보수화의 계기, 재일 한국인 일본의 산업화 시기인 1910년 이후에는 이주 조선인들이 주로 이주노동자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략 1960년~1990년 사이 압축적으로 성장한 한국과는 달리 1890년경부터 꾸준하고 완만한 성장을 경험한 일본의 경우 공업 도시들은 기존의 인구 밀집지역을 바탕으로 나타났고 한국에서와 같은 대규모, 원거리 이농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서울, 경기, 인천의 인구가 50년 사이에 20% 미만에서 50% 선으로 증가한 한국과 대조된다. 그런 가운데 대도시에서 노동조건이 열악한 직종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조선인, 중국인 그리고 일본 본토인 혼슈 섬 이외 지역에 사는 소수민족 출신들이었던 것 같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때에는 사회적 불만을 소수자에 대한 학살의 형태로 표시하였다(수천 명의 조선인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현재 일본에 존재하는 재일교포들은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반영하는 한편 단일민족의 신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소수민족의 포용이 쉽지 않은 문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현재 일본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보수성은 사회적 이동이 크지 않았던 산업화의 역사와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차별로 확인되는 ‘일본인 이데올로기’가 1950년 한국전쟁 특수를 기반으로 한 전후 재건의 과정에서 그다지 도전받지 않은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근대화, 산업화는 박정희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일본 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가 근대 일본의 발전 노선에 매료되었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듯하다. 군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고 63년 대선에서 영호남의 농민층의 지지에 힘입어 승리한 그는 65년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이루고 월남 참전을 결정하는 한편 수출지향적 공업화를 추진해 나간다. 박정희, 화교 차별에서 호남 차별로 박정희가 강력한 민족주의를 추구하고 화교를 억압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 결과 상당수의 화교는 한국을 떠나가고 한국에는 의미 있는 규모의 소수민족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호남을 포위하는 형태’의 지역주의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승만과 조봉암이 대결한 56년 대선과 박정희와 윤보선이 대결한 63년 대선에서 영/호남 구도는 전혀 찾을 수 없다. 56년 선거에서 이승만의 득표율은 지역적 특성을 찾을 수 없다. 박정희가 윤보선을 15만 6천 표 차(42.6% 대 41.2%)라는 박빙의 승부 끝에 꺾은 63년 선거에서 박정희는 영호남 농민의 지지를 받아 윤보선을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67년 선거에서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윤보선의 득표율이 38.9%로 하락한 반면 박정희의 득표율은 48.8%로 크게 상승했다. 박정희의 득표율 상승이 두드러진 지역은 서울(28.6% → 43.7%) 부산(45.6% → 61.9%), 경북(43.1% → 60.7%), 경남(56.9% → 65.6%)으로 당시 경제개발의 혜택을 보고 있던 서울과 영남지역이었다. 경기지역도 29.9%에서 38.8%로 지지율이 올라갔는데 대체로 지지율이 올라간 지역은 공장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반면 전남, 전북에선 득표수는 제자리, 득표율은 감소한다.
그런데 왜 전남과 전북에서 투표성향의 변화가 다른 지역과 다르게 나타났을까? 나는 경제적 원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 경제는 경제계획에서 가격결정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국가가 주도하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공업화 정책과 저곡가 정책은 호남 경제를 악화시켰고 서울, 영남 등 공업지대가 있는 지역으로 대규모 이농을 가져왔다.
이주노동자, 이민자, 인종적 소수자의 문제는 이제 새롭게 한국 사회의 부담으로 등장하고 있다. 농림어업 종사 남성 혼인의 40% 이상이 외국인을 배우자로 하는 것이었다는 통계는 농림어업 계층의 2세들의 40%는 모국어가 한국어가 아니라는 것을 예고한다. 이러한 집단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 그들은 공무원이 되거나 결혼을 하거나 정치인이 되는 데 문제가 없을까? 과거 백인계, 흑인계 한국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차가운 대응은 ‘그런 문제 없을거야’라는 낙관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 호남차별이 발생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특히 영남에 대한 ‘상대적 소수’였다는 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호남 자체의 단결은 차별의 극복을 위해 충분하지 않았다. 변화는 선거에서의 연대이든, 지식인의 개입이든, 제도적 보완이든 비호남인의 행동이 있을 때에만 이루어졌다. 97년, 2002년 대선은 그 변화가 극적으로 표현된 계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소수자의 문제가 선거를 통해 해결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호남차별 문제와는 달리 이주노동자, 이민자, 인종적 소수계 한국인에 대한 인종차별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아마 없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한국의 유권자 중 그 비율이 20% 이상이 된다면 비슷하게 해결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날은 너무 멀다. 프랑스에서 헝가리 이민자의 후손인 사르코지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이민을 받은 지 200년이 지나서였고, 미국에서 흑인 오바마가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까지는 노예 해방 이후에도 100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인종적 소수자의 문제는 결국 인권의 개념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남들이 인종차별이라고 지적하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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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노동부에 출석해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얼마전 비자문제로 상담했던 파키스탄에서 온 아딥(가명)씨였는데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더니 한국사람을 바꿨다. 그런데 아딥씨가 수화기를 바꿔 준 사람은 경찰이었다. 그는 아딥씨가 사기결혼 혐의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고 했다. 이미 한국인 여성과 브로커는 범행을 자백했다고도 덧붙였다. 그런데 아딥씨만이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딥씨를 만나본 것은 상담을 위해 한 두 번정도 였으므로 그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났을때 받았던 느낌은 뭐랄까 그냥 평범하고 착실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인상이 판단의 전부는 될 수 없으므로 나는 일단 경찰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미리 잡혀있던 약속때문에 바로 아딥씨에게 가 보지는 못했고, 저녁 늦게가 되어서야 니아즈씨와 함께 갈 수 있었다. 니아즈씨 역시 아딥씨를 잘 알지는 못했으나 주말마다 금촌에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만나 안면이 있었고 아친을 아딥씨에게 소개해 준 인연도 있다. 그래서인지 내가 같이 가자고 부탁하자 고맙게도 선뜻 나서주었다.
밤9시까지 면회시간이 마감이라기에 외곽순환도로를 눈썹 휘날리게 달려갔지만 워낙 늦게 출발한 까닭에 도착하니 8시45분이었다. 가까스로 면회신청에 성공한 후 조금 기다리자 아딥씨가 나왔다. 아딥씨는 두려움과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면회실로 들어왔다. 니아즈씨가 먼저 파키스탄말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금 있다가 아딥씨가 핸드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달라고 하더니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면회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하는 대화라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아딥씨의 말을 저쪽에서도 알아듣기 힘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받아서 통화를 해보니 상대방은 아딥씨가 예전에 일했던 공장의 '사모님'(사업주 부인)이었다.
'사모님'은 경계가 느껴지는 말투로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는데 내가 이주인권단체에서 왔다는 것을 밝히자 조금은 안심하는 듯 했다. 그리고 아딥씨가 죄를 지을 사람이 아니라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사모님'으로부터 들은 말에 따라 지금의 상황을 종합하면 대충 이렇다. 오랫동안 '사모님'의 공장에서 일해 온 아딥씨는 너무나 착실하고 일을 잘 해서 공장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공장도 잘 되고 아딥씨도 잘 살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많았고, 여기저기 알아본 결과 한 결혼정보업체를 알게 되었다. 그곳을 통해 한국여성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그 전까지 '불법체류'한 것에 대해 벌금을 내야했다. 벌금이 무려 700만원이나 나왔는데 회사와 친구들로부터 빌려서 겨우 낼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아딥씨는 결혼한 여성이 원하는 경제적 지원을 제대로 해 줄 수가 없었다. 결혼한 여성은 결혼정보업체에 강하게 항의를 했고, 결혼정보업체 역시 아딥씨를 안좋게 보게되었다. 그런 와중에 비자심사를 하던 출입국관리소에서 위장결혼이 의심된다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였고, 경찰서로 끌려온 여성과 결혼정보업체사장은 위장결혼이 맞다고 바로 자백을 한 것이다.
그래서 '사모님'은 경제적으로 도움을 많이 주지 못한 자기 탓이 크다며 나에게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겠냐고 계속 물었다. 하지만 정황을 듣고보니 위장결혼으로 판단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나 역시도 별다른 뾰족한 방법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딥씨가 처음엔 비자취득을 목적으로 했었어도 이왕 결혼신고까지 한 이상 실제로 잘 살아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모님'에 따르면 결혼생활이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없었던 것은 아딥씨가 경제적으로 어려워 아르바이트라도 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옮겨다녀야 했기 때문이었다.
면회를 마치고 담당 외사계 형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딥씨에게 적용되는 법은 '공증증서원본등부실기재죄'라고 하고,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고 한다. 아딥씨의 경우 배우자와의 나이차가 10년 이상이고 동거 등 실제결혼관계가 거의 유지되지 않았고, 배우자와 결혼중계업자가 이미 자백한 상태이기 때문에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한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구치소에서 한 달 정도 있으면서 재판을 받고 1심 판결이 나오면 바로 외국인보호소로 보내져 강제출국된다고 한다.
나는 이번에 이런 일을 처음 겪어보지만 실제 이런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대부분 중국인들이 많은데 파키스탄 사람을 맡은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런데 한참을 이야기하던 담당형사조차도 "위장결혼한 건 잘못이지만 우리사회에 필요한 이런 사람들이 합법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이 있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요즘 들어 TV등 언론에서 위장결혼 또는 사기 결혼한 외국인들이 적발되었다는 뉴스를 심심찮게 보도하곤 한다. 그런 뉴스를 접하게 되면 그냥 '국제결혼이 문제가 많구나'하고 지나쳐버리기 쉽상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왜 발생하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프로그램은 거의 없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결혼할 의사도 없으면서 거짓으로 결혼하는 것일까? 물론 정답은 체류자격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한국에는 외국인들이 합법적으로 체류자격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일까? 물론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은 전문적인 능력이 있거나 한국에 많은 돈을 투자한 사람들로 제한되어 있다. 출입국법상 단순 기능 인력이라고 불리우는 일반 노동자들은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체류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위장결혼이라는 유혹에 쉽게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한국남성과 결혼해서 오는 외국여성 중에 발생하는 위장결혼 역시 경우는 다르지만 원인은 높은 이주규제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글을 읽는 독자들께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돈 없고 별다른 전문기술도 없는 사람들은 우리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들인가? 이런 법을 만드는 사람들은 혹시 한국인 중에도 돈 없고 전문기술도 없는 사람들은 다 내보내길 원하는 게 아닐까? 돈 없고 능력 없는 사람들을 국가가 보호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회적 연대는 대한민국의 국경을 넘을 수 없는 것인가?
여수외국인보호소화재참사 이후 국가인권위는 이주관련단체들과 함께 외국인보호소 방문조사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 조사는 지난 6월에 이어 두 번째로 하는 것이다. 지난 6월 방문조사때는 보호외국인이 거의 없어 조사의 실효성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부의 합동단속이 시작되고 있어 그때보다 훨씬 많은 보호외국인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오늘 있었던 화성외국인보호소 조사작업에 참여하였다. 화성보호소에는 현재 320여명의 외국인이 수용되어 있다. 두 번째 방문하는 것인지라 첫 방문 때와 같은 긴장감은 훨씬 덜했다. 하지만 첫 방문 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조사해야하는 까닭에 육체적인 피로는 훨씬 높았다.
내가 만난 사람 중에는 얼마전 서울 성수동에서 단속된 이주노조 조합원도 있었다. 철창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자 한 번에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이주집회 등에 열심히 참여한 열성 조합원이었다. 그는 이주노조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이곳에서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멸시를 받고 있다고 했다.
만19세의 우즈베키스탄 청년은 손가락을 다치는 산재를 입었으나 제대로 치료가 종료되지 않은채 단속되어 들어와있었다. 15살때 한국에 들어와 20살도 안된 나이에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굽히지 못하는 장애를 얻었다.
이 우즈베키스탄 청년을 비롯해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단속되어 들어온 사람들이 이번 조사에서는 많이 발견되었다. 합동단속이라는 이름하에 출입국직원 뿐 아니라 일반경찰들도 외모나 피부색이 달라보이면 무조건 검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사를 다 마치고 자리를 정리하려는 나를 붙잡고 이야기한 베트남 노동자는 임신 중이던 부인이 통증을 호소하였음에도 2시간 가까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계속 단속을 진행했음을 이야기하며 다시 분노하였다. 그리고 자신도 뺨을 몇 차례 맞았다고 했다. 단지 수갑찬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려했다는 이유로.
지난 2003년 명동성당 농성에도 참여했던 한 네팔노동자의 사연은 더욱 기구했다. 공장동료가 길을 가다 단속이 되었고 그는 일하는 공장으로 앞장서라는 협박과 구타에 못이겨 그가 일하던 공장으로 출입국직원을 데리고 왔다. 그는 용케 옥상으로 도망쳤으나 출입국직원들이 사장을 협박하여 사장이 직접 그를 잡아서 출입국직원에게 인계하였다. 아마도 도망간 사람을 넘기지 않으면 벌금을 높게 부과하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손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필사적으로 도망가려 했으나 사업주는 '미안하다'며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다음날 면회를 와서도 사업주는 '미안하다'는 말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무엇보다 마음이 안좋았던 것은 얼마전 나와 함께 노동부에 출석했던 라하만씨 부부를 만난 것이다. 라하만씨 부인은 한국에 온 지 몇 달 되지도 않았지만 남편과 함께 단속이 되어 곧 강제추방될 것이다. 라하만씨는 나의 손을 잡으며 '미안하다'고 했다. 왜 그가 나에게 미안해야 하는거지? 나는 할말이 별로 없어서 그저 잘가라는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돌아섰다.
오전9시반부터 시작한 오늘 방문조사는 저녁6시반이 넘어서야 끝날 수 있었다.
화성이라는 이름과 어울리게 화성보호소 주변은 황량한 개활지 뿐이다. 황량한 분위기에 날씨까지 구름이 잔뜩끼어 마음이 더욱 우울해졌다.



redian@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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