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연스러운 경제질서>는 입말로 번역했다. 내용만 보면 훌륭한 책도 딱딱한 번역체로 옮겨져서 대중들한테 외면받고 묻혀버리는 일이 많을 것이다. 어떤 글을 읽을 때 여러 번 생각해야 이해된다면 그 글은 죽은 글이다. 글은 말처럼 직관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때 글이 보여줄 수 있는 위력이 극대화된다. 입말로 번역했을 때 그 글이 별 게 없어보인다면 그 때는 그 글이 문제인 것이다. 별 게 없는 걸 포장하려고 딱딱한 번역체를 고집하는 것은 아닌지 번역자들은 자문해봐야 한다. 입말번역은 더 많은 독자를 <자연스러운 경제질서>의 담론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자연스러운 경제질서>가 전파되는 속도를 더욱 높여줄 것이다. <자연스러운 경제질서>는 인위적으로 가공된 권위가 아니라 진실 그 자체가 가지는 권위로 정면승부하게 될 것이다.
일본판 번역자가 Free-Land와 Free-Money를 자유토지와 자유화폐로 잘못 옮긴 이유는 게젤이 <자연스러운 경제질서>파트Ⅳ. 공짜돈, 돈은 어떠해야 하는가 5. 공짜돈은 어떻게 판단될까 K.실업보험사무소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공짜돈은 폭발적인 힘으로 모든 돈의 저장고를 열어젖혀. 거대은행 지하실부터 마굿간지기의 조그만 저금통까지 돈 자체를 해방시키고 그것이 시장으로 쏟아져나오게 해. 그래서 그 이름이 "공짜돈(Free-Money)”이야."
하지만 이것을 생각해보자. 영어 free나 독일어 frei는 ‘공짜’라는 뜻과 ‘자유로운’이라는 뜻이 함께 있다. 한국어는 두 가지 뜻을 함께 가진 말이 없다. ‘자유로운’으로 옮기면 '공짜'라는 뜻을 포기해야 한다. 이 책의 전체 맥락으로 볼 때 땅을 쓸 때 '임대료'라는 요금을 내지 않는 것과 돈을 쓸 때 '이자'라는 요금을 내지 않는 것, 즉 땅과 돈을 공짜로 사용하는 것이 실비오 게젤이 의도한 것이다. 게젤은 <자연스러운 경제질서>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지대는 토머스켐피스의 종소리, 케벨라 유물, 괴테와 실러, 공무원의 청렴함, 더 행복한 미래를 위한 꿈, 한마디로 모든 것에 요금을 매겨.”
“이자는, 재화제조자들이 교환수단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돈소유자들한테 지불해야 하는 요금이야.”
“돈이 자본이 되려면 오직 상품에 비용을 물려야 해. 돈이 자본의 형태라는 것을 드러내는 요금은 상품에 대해서 부과하는 것이니까.”
"시장이 상품교환을 위한 도로라면 돈은 그 도로를 가로지르는 톨게이트이고 요금을 받을 때만 열려. 통행료·이윤·조공·이자 뭐라고 부르든지 그게 상품이 교환되는 조건이야."
“돈은 자기를 쓸 때마다 이자를 요구해. 택시가 요금을 받는 것처럼 말이야.”
따라서 위의 문장은 영어 free가 두 가지 뜻을 함께 가진 덕분에 더할 수 있는 강조의 문장 정도라고 봐야 하며 이 문장 하나 때문에 '자유화폐'로 번역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실비오 게젤을 다룬 한국어 기사 가운데 일부는 Free-Money를 '자유화폐'로 옮기는데 이것은 일본의 번역 自由貨幣를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일본의 번역 自由貨幣 자체가 아무 생각 없이 번역한 것이다. 일본에서 실비오 게젤 경제이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가? 아니면 게젤의 개혁이 진행되고 있는가? 전혀. 엉터리 번역이 그런 일본의 현재 상황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 번역은 대중과 소통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구글이미지에서 Free Land와 Free Money를 검색해보면 그 말을 영어권에서 일반적으로 어떤 뉘앙스로 쓰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우리말로 옮기면 공짜땅과 공짜돈이 된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경제질서> 2부 공짜땅에서는 Free land of the first class, Free land of the second class, Free land of the third class 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 문맥상 각각 첫 번째·두 번째·세 번째 부류의 공짜땅 정도로 번역된다. 그리고 Free-Land reform의 개념은 바로 여기서 유래하므로 그것 역시 '공짜땅 개혁'으로 번역해야만 전자와 후자의 개념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성을 뚜렷하게 드러낼 수 있다. 그리고 Free-Land reform을 '공짜땅 개혁'으로 옮긴다면 그것과 함께 양축을 이루는 개념인 Free-Money reform도 '공짜돈 개혁'으로 옮기는 것이 자연스럽다.
뿐만 아니라 '자유토지'나 '자유화폐'는 경제학의 문외한에게 어렵게 들리고 바로 와닿지 않는다. 그렇게 옮기면 지식인들끼리만 이야기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키게 된다. 그건 게젤의 경제이론을 대중적인 사회운동으로 만들어가는 작업을 어렵게 만든다. 말과 글은 소통을 위한 것이다. 사회 전체에 엄청난 이익을 줄 수 있는 경제이론을 번역할 때는 이런 점을 더욱 고려해야 한다. 한 번 어떤 개념이 우리말로 옮겨지고 담론에 불이 붙으면 그 때는 다시 고치기 어렵다. 처음부터 제대로 길을 터야 한다.
어떤 사람은, 실비오 게젤의 Free-Land와 Free-Money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공짜땅과 공짜돈의 뜻을 담는 게 아니라 돈과 땅을 개혁하는 특별한 방법을 뜻하므로 좀 더 딱딱하고 무거운 표현인 '자유토지'와 '자유화폐'가 낫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비오 게젤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 개혁에 보통사람들이 '공짜땅'과 '공짜돈'의 뜻을 담으려고 흔히 쓰는 쉬운 표현인 Freiland(Free land)와 Freigeld(Free money)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려운 라틴어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비교적 쉬운 영어단어인 Free-Land와 Free-Money가 실비오 게젤의 개혁을 가리키는 이름이 될 수 있다면 공짜땅과 공짜돈은 왜 그 이름이 될 수 없겠는가? 그럴 수 없다고 주장하거나 그것보다 자유토지나 자유화폐가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외국어 사대주의에 빠져있는지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번역을 할 때 모든 언어는 대등한 관점에서 다루어야 하고, 그 말의 쉽고 어려운 정도도 함께 번역되어야 한다. 이 때 그 말의 쉽고 어려움은 그 나라 사람이 느끼는 정도에 달려 있는 것이지 외국인이 그 말에 대해 느끼는 정도에 달려 있지 않다. 쉬운 단어는 쉬운 단어로 옮겨야 한다는 얘기다.
실비오 게젤은 비즈니스를 하던 사람이다.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은 실용적이다. 쓸데없이 어렵고 복잡한 개념을 만들지 않는다. 실제로 실비오 게젤의 <The Natural Economic Order>는 문장이 간결하고 뚜렷하다. 경제를 잘 모르는 독자도 이해할 수 있게 쉽게 풀어놓았다. 따라서 실비오 게젤이 살아있고 한국말을 할 줄 안다면 분명히 Free-Land와 Free-Money를 공짜땅·공짜돈으로 옮겼을 것이다.
또, 독자들에게 좀 더 강렬한 인상을 주려면 '공짜돈'으로 번역하는 게 유리하다. 생각해보자. 공짜돈과 자유화폐 가운데 어느 단어가 더 많은 사람을 모을까? 드물게 "공짜돈이 세상에 어디 있어?"하며 돌아서는 냉소적인 사람이 있다고 치자. 하지만 그 수는 "자유화폐"라는 딱딱한 표현 때문에 이 경제이론에서 멀어질 수 있는 독자의 수보다는 적을 것 같다.
2. 나는 ‘자유화폐’나 ‘자유토지’ 따위의 이름으로는 실비오 게젤이 제안한 개혁이 조금도 나아갈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여러분이 뭔가 이루고 싶으면 보통사람의 말을 써야 한다. ‘공짜’는 천박해보이고 ‘자유’는 고상해보이나? 그래서 ‘공짜돈’이 아니라 ‘자유화폐’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진정한 사회개혁의 목표에서 한참 멀었다는 것이다. ‘자유화폐’라고 부를 때 그 단어 ‘자유’가 주는 모호함이 여러분을 목표로부터 멀리, 아주 멀리 떨어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는 신자유주의자들도 주장한다. 기존 자본주의에서도 스스로 ‘자유’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자유’는 너무 여러 가지로 해석되는 모호한 단어다. 그러나 ‘공짜돈’은 명확하다. 이자라는 요금을 내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는 돈. 이것이 공짜돈이다. 임대료라는 요금을 내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는 땅. 이것이 공짜땅이다. 경제는 분업이고, 분업은 그것을 매개할 교환매개물 그리고 그것이 펼쳐질 땅이 필요하다. 그 두 가지를 반드시 공짜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게젤의 지론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분업은 주기적으로 멈출 것이고, 불공정한 분배로 사회갈등은 심해질 수 밖에 없다.
‘자유화폐’라는 표현을 쓰는 사회운동은 “지금도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무릎 꿇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도 '공짜땅과 공짜돈'을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여러분 앞에 공짜땅과 공짜돈이 있다면 못 본 체 지나칠 수 있나? 이것이 ‘공짜땅 공짜돈’이라는 단어의 힘이다. 모호한 단어로 여러분의 목표를 가리지 말라.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공짜땅 공짜돈이다. ‘공짜’는 매우 구체적으로 한정된 개념이다. 반면에 ‘자유’는 매우 추상적이며 두루뭉실한 개념이다. 사회적인 목표를 겨냥하는 번역은 마땅히 전자를 따라야 한다. 모든 담론의 기초는 단어 그 자체다. 어떤 단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운동이 어디까지 나아갈지 이미 그 한계가 결정된다. 생각 없이 일본의 잘못된 번역인 自由貨幣를 본따 자유화폐라고 옮겨쓰고 있을 때, 여러분은 이미 늪 속으로 발을 내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