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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용산 참사 타협 소식이 나오는 티비를 망연자실 바라보며 “아, 이렇게 끝나는 구나” 했다. 아니 몇몇이 기뻐했을 것이다. 정운찬 총리, 오세훈 시장, 이명박 대통령, 아마도 김석기 전 경찰청장. 그들은 용산 참사 ‘타협’을 ‘해결’이라고 했다. 많은 노력을 했으며, 서로가 공을 세웠노라고 추어주기 바빴다. 하긴 총리는 그러라고 기용했고, 시장은 대권을 잡고 싶은 것이며, 대통령은 삽질을 계속해야 하니까. 그러나 무엇이 해결되었는가? 보상을 해 줄 것이라고? 살인을 했는데? 유감이라고? 사람을 생짜로 태워 죽여 놓고? 이제 장례를 치러도 좋다고? 죽인 것도 모자라 그나마 산목숨을 드잡이하고, 겁박하고, 기어이 감옥엘 보내 놓고? 한 마디만 하자. 지랄이다. 아주 생지랄이다.
그러니 누구도 기뻐할 수 없는 것이다. 신부님이 유족들을 껴안고 그저 서러워 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자회견 내내 영정을 바라보고 끌어안고, 또 쓸어 보며, 이젠 말라 비틀어져 나올 것 같지 않던 눈물이 쏟아졌던 것이다.
그동안 남일당 건물은 해방구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또 나갔다. 이렇게 용산은 시퍼런 새벽, 한 국가의 수도 한 가운데에서 권력이 저지른 살인행각을 만천하에 증명하는 장소가 되어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이다. 빈소이면서 또 해방구라니. 동시에 이것이 현실이다. 여기 이 땅에서는 죽음으로써만 비로소 해방된다는 그 섬뜩한 현실 말이다. 또한 그것은 상처와 같았다. 자본이 생살을 뜯어 먹고 간 자리. 그리고 그 자리는 고스란히 그곳을 지나가는 시민들의 가슴에 새겨졌다. 외면하든 또는 슬퍼하든, 그 장소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것이다. 죽고 나서야 해방이 허용되는, 그래서 늘 슬픔 속에서 쓰린 가슴을 한 뭉치씩 부여안고서야 비로소 저들 권력의 부라퀴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시민들은 인정해야만 했다. 용산을 잊은 시민들은 그들처럼 자신들이 죽어갈 수 있다는 그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신부님들과 유족들 그리고 용산의 동지들은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용산은 고립되었고, 엄동설한이 온 것이다.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그 대부분의 책임은 방관자들에게 있다. 끝까지 그들과 함께 하지 못했던 우리들, 운동 주체들, 지식인들이 잘못한 것이다. 그러니 왜 그들이 울어야 하나? 우리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어야 하지 않나? 그들의 울음을 보면서 ‘그나마 이것이 절반의 승리다’라고 입바른 소리나 해야 하는가? 그래서? 수고했다고? 살인자들이 희희낙락하고 있는데? 장례라도 치룰 수 있어 잘 되었다고? 아들이 제 아비를 죽인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있는데? 웃기는 소리다. 지금 똑같이 지랄하잔 건가?
이제 남일당이 헐리고 그 선명하던 모순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질 것이다. 망각이 찾아올 것이고, 희번덕거리는 건물이 들어서고, 돈 없는 민중들은 쫓기듯이 도시 외곽으로 밀려날 것이다. 그리고 또 어딘가에서 철거가 시작되고, 거래를 하고, 사람이 죽을 것이다.
살인자들. 우리는 알고 있다. 용서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너희가 똑같이 죽을 때까지, 우리 자신도 남일당을 방치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 redbrigade
한 가지 신기한 것은 내게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개인이력이 타인들에게는 낯설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서양철학, 그 중에서도 프랑스 철학을 전공으로( 이 말은 아마 '벌어먹고'라는 말과 같을 것이다) 하고 있지만, 내 학부 전공은 불교학, 그 중에서도 원시불교 쪽이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사람들은 꽤나 신기하게 생각한다.
여기다가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조기졸업 했다는 사실까지 보태면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엄청 혼란스러워한다. 게다가 대학은 또 1년 늦게 간 거다. 하긴 이게 뭐 상식적으로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경로는 분명 아닐 것이다.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정리되는 내 이력은 그래서 대충, "검정고시->1년 잠적->대학입학(불교학)->대학원석박사(프랑스철학)", 이렇게 된다. 아 하나 더 빠졌다. 대학 10년 수학. 입학년도와 졸업년도를 계산해 보면 딱 10년동안 대학이라는 곳에 있었던 게 된다. 이런 제길!
요즘에는 나이도 들고 이런 걸 꼬치꼬치 캐 묻는 '면접관'을 만날 일도 없고 해서 괜찮지만, 예전에는 이런 이상이력의 구멍들을 설명하기 위해 꽤나 심난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이란 '상식'에 대한 무의식적인 종속심리가 있어서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죄다 '어둠의 세계'에 속한 것으로 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검정고시'로 조기졸업했다는 것까지는 그나마 괜찮지만, 대학 입학 전 1년을 뭐했는지(혹시 조폭의 세계? 혹은 어떤 종류의 음침한 오타쿠의 세계?), 또는 어째서 대학을 10년씩이나 다녔는지(학생운동 수배? 아니면 불우한 가정형편?)에 대해 설명하다 보면 갑자기 좌중이 숙연해지곤 했던 거다. 설명 안 하면 나란 물질이 온갖 의혹에 휩싸이게 되고, 설명하자니 도통 재미없고(왜냐면 사람들이 바라던 그런 '활극'은 없으니까) 그런 것이었다.
또 사실대로 설명을 해도 반신반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교보다 시립도서관 인문과학실과 문학자료실에서 살았다는 둥,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를 읽고서 고승은 아니라도, 땡중이라도 되려 했다는 둥 ... 이런 식으로 말하면, 사람들은 당췌 '감'이 안 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인생이 그들에게는 없었으니까.
결국에는 자기들 편한 대로 나를 야쿠자 세계에 접수시키거나(실제로 난 이런 분을 봤다. 그전에 실컷 위와 같은 설명을 해 드렸는데도 말이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공부하는 학자로 보거나(대체로 이렇게 본다. 하긴 집이 좀 가난하긴 했다. 서울 상경때 딱 5만원이 내 주머니에 있었으니까), 아니면 고맙게도 독학으로 상당한 경지에 이른 철학자로 보거나, 그래 주신다. 이 모든 소위 '파악'들이 공교롭게도 '내'가 아니다. 편하신대로들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나로서는 난감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나'를 설명해야될 상황이 되면 그냥 귀찮다. 그렇다고 맘대로들 상상하시게 놔두자니 짜증의 쓰나미가 몰려온다. 괜히 애먼 사람들한테 화도 내게 되고 말이다.
난 내 이런 상황이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국사회의 사회적 의식의 '보수성'을 가늠할 만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타자에 대한 시선이 관습화되어 있고, 일생의 타임라인이 대체로 유사하고 고만고만한 삶만이 인지되는 사회에 우린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메인스트림이라는 것이 너무나 확고해서 거기 속하지 못한 모든 것들이 주변화되거나 소수화되기 쉽다.
문제는 이런 주변화되거나 소수화되는 이력이나 삶이 매우 자주 사회적 폭력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들은 이미 사회적 '인정투쟁'의 장에서 애초부터 애매모호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메인스트림과 그에 가까운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거슬리는 이물감을 안겨다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서와 같이 이럴 경우 사람들은 스스로의 방어기제라는 것을 동원해서 이 이물감을 애써 없애 버리려고 하거나(기억의 왜곡), 제거하려고(차별화와 억압)한다. 왜냐하면 이것을 인정하기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훨씬 손쉽기 때문이다. 말보다 주먹이 더 가깝기도 하고 말이다.
어찌 보면 나란 물질이 어째서 평소에는 사람좋게 보이다가 문득문득 성격이 더러워지는지 그 원인을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여간 이 자본주의하고도 천박한 한국 사회에 살자니 편협한 시선들이 귀찮다 못해 멍청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 멍청한 시선으로 나를 훓어 보는 걸 견디지 못해서 쌍욕이 나오는 게다. 세상의 모든 마이너에게 느끼는 연민도 여기서 나오는 것일 게고 말이다.
하여간 메인스트림에서 비껴서 있는 마이너의 스탠스가 더 익숙해질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짜증이 밀려오지 않고도 슬슬 웃어가며 능구렁이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침묵, Epiphany의 함성
- 《위대한 침묵》, 필립 그로닝, 2009
오프닝은 눈보라와 불빛이다. 그리고 침묵이 이어진다. 외삽 되는 검은 화면에 말씀(logos)들이 새겨진다. “봄은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부터 온다.” 장면 전환. 카메라가 수도원 건물들을 잡아낸다. 견고한 저 건물들. 문득 화면이 블로우 업으로 돌아간다. 작게 울리다가 이내 높아지는 수도원의 종소리. 그리고 옷자락 스치는 소리, 수사들의 오래된 방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그리고 다시 침묵. 말씀들. “가진 것을 모두 버리지 않은 자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2시간 42분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 긴 러닝타임 동안, 눈이 먼 늙은 수사의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약 5분여의 대사와 산책과 눈썰매 타는 동안의 수사들의 몇 마디 말, 그리고 미사를 하는 동안의 기도 소리 외에 어떤 ‘인간의 소리’도 이 영화에는 없다. 잠깐 잠깐씩 화면을 블로우 업 시키는 것 외에 별다른 편집 기술도 동원되지 않는다. 대신 무엇이 있는가? 감독은 분명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들, 무슨 소리를 듣는가?’
인간의 목소리 대신 여기에는 무심한 수도원 건물들이 있고, 알프스 협곡을 통해 불어오는 세찬 눈보라가 있으며, 긴 주랑과 그곳을 들락거리는 짐승들이 있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카메라의 표면성이 잡아 내지 못하는 어떤 것, 이것(aliquid)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영화를 보는 내내 보고, 듣고,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름 붙이자마자 존재 저편으로 사라진다.
그 신성하고 언설 불가능한 것이 이 영화의 모든 부분, 심지어 가장 하찮아 보이는 오브제들 속에서 들끓고 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하면 곤란하다. 감독이 원하는 건 그런 것이니까. 이를테면 이 질릴 정도의 롱 테이크 속에서 삶에 속하지만 삶과는 다른 어떤 것, 인간의 신체를 하고 있지만 신의 말씀인 어떤 것이 편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들끓는 것을 보거나, 느끼기 위해서 모든 인간의 음성을 거두어야 한다. 그 음성이 사라진 자리에 관객에게 요구되는 것은 일상적인 지각체계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미세지각들이다.
저 멈춰진 화면 속의 건물들, 회백색의 계단들, 그리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수사들의 내부로부터 표면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흔들리는 원자들의 클리나멘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이 2시간 42분의 명상이 제대로 된 경지에 이를 것이다.
영화 후반부. “여기 내가 있다”라고 말씀은 전한다. 그리고 수사들의 모습들이 하나하나씩 비춰진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구체적으로 말을, 아니 더 선명해진 침묵을 건넨다. 말씀이 저들 수사들 하나하나 속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늙은 수사의 벗은 몸을 차분히 쓸어내리는 화면. 그러니까 ‘나’는 늙어 쪼그라든 신체 안에 있다는 것이다. 또 비춘다. 수도원의 오래된 노동자들. 또한 그들에게 말씀은 “내가 있다”고 한다. 침묵은 선명해진다. 점점 더 선명해져서, 빛이 되기도 하고, 쟁여진 장작들 사이 검은 틈으로 스며들기도 하며, 젊은 수사의 미소 안에 머물다 가기도 한다.
침묵이 선명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화가 필름의 표면 아래에 숨겨 왔던 어떤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는 뜻이다. 작가의 관점에서 그러한 폭발은 주로 수사들과 노동자들을 거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숨겨져 있던 그것을 수사들과 노동자들, 심지어 감독이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다. 숨겨진 그것이 이들을 매개로 스스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존재는 오직 생성하는 것이므로, 제 차례에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은 운 좋게도 발을 담근 자에게 그 차가운 느낌을 ‘단 한 번’ 전해줄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미사를 집전하고 성서 주해서를 낭독하는 거룩한 천상의 장면(초반부)에서부터 수사들의 면면과 노동자들의 투박한 모습이 미디엄 숏으로 흘러가는 지상의 장면(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에피파니를 따라 명상해 온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말씀이 ‘여기 있다’고 한 것은 분명 지상에 이르러서이지만 결국 그는 언제나 거기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이 그런 것처럼, 침묵의 강도 발을 담그든 말든 언제나 흐를 뿐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에피파니의 함성을 들을 수 있는 자는 운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린 양들은 운이 나쁜 나머지, 명상의 경지가 아니라 잠의 밑바닥에서 두 시간 동안 편히 쉴 수도 있을 터. - redbrigade
오랜만에 집에서 늦잠을 자고, 오랜만에 하루 종일 집에서 이것 저것 공상도 하고, 정말, 오랜만에 아무 걱정 없이 있을 것 같았다. 하긴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다. 한 가지 늘 따라다니는 그늘이 난 있으니 말이다. 아니 이제는 한 가지가 아닌 것 같다.
난 사람들이 "때로는 슬프고, 기쁘고 한 게 인생이다" 는 식으로 말하는 걸 들으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때로는'이라는 식으로 기쁘고 슬프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삶에서 언제나 슬프다. 그 슬픔을 벗어나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스피노자도 고귀한 삶이 힘들고 드물다고 했던 것이고 말이다.
삶은 늘 슬픔이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웃는 낯에 숨어 있기 때문에 슬프고, 하나의 기쁨이 잠시 머물고 있는 순간에도 그 기쁨이 물러났을 때의 지독한 낯설음 때문에 또 슬프고, 그 슬픔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슬프다.
이 슬픔을 끝장내기 위해서는 죽음을 선택하거나, 세상을 버리고, 절대적인 어떤 것에 의지하면서 수도원이나 산사로 가는 길 밖에 없다. 난 감히 이 꿈을 꾸지는 않는다. 그래서 자잘하게나마 살아 가려고 하는 것이고, 작은 성취나마 고마워하는 것이고, 단 한 뼘의 진보나마 들뜨는 것이다.
오늘 같은 날은 많이 슬프다. 좀 더 늘어지게 쉴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되어서 심통이 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언제나 '불안'을 짊어지고 사는 이 허튼 육체가 측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그녀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슬프고, 그것을 듣는 나도 슬프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해결하듯이 단칼에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나 스스로에게 살의 같은 것을 느낀다. 그 살의는 이상하게도 건조하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저 세상으로 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왜 이 나이쯤 스스로 죽어간 사람들이 유언장을 쓰지 않고도 족했는지 알 것 같다.
끝 그리고 Salsa!
어떻게 보면 환영할만한 시도라고 할 수도 있지만, 도대체 데리다의 언어가 맑스주의와는 전혀 상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당연할 듯 싶다. 마르크스가 '아'라고 하는 곳에서 데리다는 '어'라고 하고 있으니 두 진영 모두에서 답답할 노릇이다.
일단 데리다가 맑스 옆에 서자마자 참으로 왜소해지는 건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맑스와 대면하는 그 순간부터 그는 장인 앞에 선 도제처럼 횡설수설을 멈추지 않는다. 당황스러운 것이다.
어쩌면 '해체'는 '해석' 앞에서 저렇듯 영원히 초라할지도 모른다. 다만 해석으로부터 멀찌감치 있으면서 아카데미의 풍족한 만찬을 즐길 때만 의기양양할 것이다. 데리다는 말년의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이다. 그도 대가임에는 틀림없고 또 고독할 뿐이지만, 맑스는 이미 역사이며, 하나의 연대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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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이런 영화가...!!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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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상영 중인 것으로 압니다. 강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