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잘 쓰고 싶다. 둥글둥글 보듬아 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신형철의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를 읽다가 문득 든 생각이다. 내가 어쩌다가 평론집 같은 이 책을 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다. 평소 읽고 싶은 책 목록을 모아 두었다가 한꺼번에 구입하기 때문에 가끔 구입의도가 기억나지 않는 책들이 생긴다. 그러면 마치 깜짝 선물인 것처럼 여기며 즐겁게 읽어 보려 하는데, 문제는 그 선물이 내 마음에 쏙 든 적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사실 <느낌의 공동체>도 처음에는 그랬다.
이 책은 여러 시인과 시집에 대한 짧은 평론이 주구장창 이어지는, 그래서 뚜렷한 서사도, 일관된 서정도 없는 어지러운 모자이크 같았다. 하지만 고요한 곳(해우소)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한 편씩 음미해보니 어느새 점차 따스한 조각 이불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오늘은 급기야 질투심? 경외심? 같은 감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내가 이제까지 쓴 글들은 거의 대부분 뾰족했다. 대학생 시절부터 난 송곳처럼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송곳처럼 정곡을 찌르는 검객이 되고 싶었다. 물론 평소에는 송곳의 나머지 부분처럼 둥글게 살고도 싶었다. 둥글지만 어둠이 가득할 때에는 번뜩이는 통찰력으로 빛을 발하는 허허실실의 대가! 그게 내가 꿈꾸던 나였다.
하지만 세월이 갈 수록 난 찌를 줄만 아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무딘 날로 말이다. 힘차게 찌르지만 고름을 터트리지는 못하는, 그래서 아픔만 배로 더해 버리는 어설픈 글만 쓸 줄 알게 되었다. 말이라도 둥글게 하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말도 글도 같은 길위에 나란히 걷게 되었다.
나는 상대를 지적할 줄만 알았지, 상대를 품어줄 줄을 모르고 살았다. 아니 살고 있다. 사회의 부조리에, 아이의거짓말에, 동료의 무관심에 목청을 돋울 뿐, 생일을 맞이한 친구의 미소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아이의 눈물에, 삶에 무게에 짓눌린 이웃의 한숨에 제대로 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하고 있는 말은 유아용 동화책의 어휘보다 못하다.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아이들에게 치유의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정작 나는 고통의 단어만 뱉으면서 말이다. 이제 나도 조금 더 둥글게 말하고 써야겠다. 정말 글을 '잘'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