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기억하는 또 다른 방식
-임철우의 『백년여관』-
최근 일어난 여러 가지 국내,외 사건 중 전혀 다르면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국내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립 대전 현충원을 찾아 12.12 군사 쿠데타의 주역 중 하나인 유학성 씨의 묘소를 참배한 일과 국외로는 일본 경비정이 울산 간절곶 앞 바다에서 우리나라 해경과 대치한 사건이다. 이 두 가지 것이 비슷한 이유는 두 사건의 주인공이 모두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둘 다 과거에 한국국민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억은 잊은 채 현재의 얄팍한 법체계를 방패삼아 스스로를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는, 오히려 피해를 보고 있다는 식의 기억을 하고 있다. 하나는 수백 억의 추징금을 받고도 全재산이 29만 원 뿐이라면서 당당히 살고 있고, 하나는 제국주의적 침탈을 자행했으면서도 한국 어선에 의해 영역침범을 당했다며 강경대응하고 있다. 이렇게 이 둘은 가해자 기억을 망각한 채 피해자로 살고 있다.
반면 피해자인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나? 씁쓸하게도 시간이 갈수록 피해자로서의 인식을 잊으면서 살고 있다. 변변한 보상이나 사과도 하나 받지 않았으면서 너무나 쉽게 용서와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과거에 대한 기억을 지우라 종용하기까지 한다. 특히 과거를 글로 기록하는 문학의 경우 역사에 대한 기억과 재생의 역할을 더 이상 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역사는 뒤로한 채 개인의 존재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흐름은 우리 자신을 상처투성이로 남기게 되고 결국 자기 성장의 커다란 장애물로 작동하게 된다. 여기 이와 같은 거꾸로 된 흐름을 바로 잡으려는 시도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임철우의 『백년여관』은 일제시대부터 4.3제주항쟁, 한국전쟁, 80년 광주민주화운동까지 우리나라 1백년의 역사를 그림자섬 '영도(影島)'의 '백년여관'에 모인 등장인물들의 갖가지 사연을 통해 그려낸다. 그는 1981년 등단 이후 한국전쟁과 광주 5.18 민중항쟁과 같은 묵직한 소재를 즐겨 다뤄 왔다. 80년대적 무거움을 버리고 90년대적 경쾌함으로 다투어 달려가던 90년대에도 그의 취향은 달라지지 않아, 1998년 초에는 5월 광주의 열흘을 다큐멘터리처럼 재구성한 다섯 권 짜리 장편 <봄날>을 출간하였다. 이번 소설에서도 그는 4.3제주항쟁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과 함께 광주를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역사문제를 소설로 그려내는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 역시 이러한 것을 의식하여 소설 안에서 논쟁을 벌인다.
“역사나 정치의식 과잉이라는 것도 벌써 한참 지난 시절 얘기죠.”
“요즘 소설 안 쓰시나? 이형 소설, 본지가 한참 된 거 같은데. 이젠 제발 오월이니 육이로니 하는 거 좀 벗어나서. 멋진 거 하나 써보쇼. 예?”
이에 대해 그는 그러한 역사인식이 가진 얄팍함을 까발린다.
“...어쨌거나 너와 동시대인임에 분명한 그들의 삶, 아니 존재 자체를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 거겠지...그 고약한 인분 덩이를 눈앞에 빤히 놓아두고서야 아무 일도 없다는 양 훌쩍 뛰어넘어, 저 현란한 너희들의 미래 속으로 홀가분하게 내달려가기란 아무래도 거북스럽고 기분 찜찜할 테니까. 안 그래?”
그는 역사를 그저 흘러간 과거의 시간이 아닌 현재와 관계를 맺고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그다지 달가워 보이지가 않다. 때문에 그는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한다.
첫 번째는 소설 속의 주인공을 새롭게 그려내는 방식이다.
“<섬이 하나 있다. 그림자의 섬. 영도> 당신의 책상 앞 벽에 붙인 쪽지엔 그렇게 적혀 있다. 그건 당신이 구상 중인 소설 『섬』에 관한, 이를테면 창작메모인 셈이다.”
『백년여관』의 주인공은 소설을 쓰는 작가로 나오며 그 역시 ‘영도’라는 섬을 화두로 하여 글을 쓰는 중이다. 그리고 모든 사건이 끝나고 소설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주인공의 소설 역시 완성되는데 그 시작이 『백년여관』의 시작과 같다. 게다가 이것이 단순히 그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로 다가올 수 있도록 주인공을 지칭할 때 ‘나’라는 일인칭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당신’이라는 2인칭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주인공 설정과 호칭 선택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 밖에서 텍스트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안으로 들어와서 여러 역사적인 사건들을 만나게 한다. 즉 독자를 또 다른 주인공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마술적 리얼리즘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역사적인 상황과 절대로 있을 법하지 않은 일들을 꿰어 맞춘 듯한 서사 기법으로 콜롬비아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지은 『백년 동안의 고독』이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야기의 배경이나 주제는 역사적이며 사실적이지만 이야기 전개 방식이나 세부 사건은 판타지와 같은 방식으로 펼쳐진다.
“....모슬포에선 멸치잡이 그물에 고양이만한 크기의 쥐 떼가 잡히고, 서귀포 앞바다에선 느닷없이 어마어마한 멸치 떼가 작은 무인도 위로 한꺼번에 뛰어올라왔다. 또 난데없이 바다에서 회오리바람이 몰려와 수천 마리의 실뱀을 온 마을 지붕 위에 쏟아 붓기도 하고, 서귀포 밤섬에선 수십 마리의 돌고래가 일제히 암벽을 향해 돌진해 머리를 들이받고 죽어버렸다.”
이러한 기이한 형식의 묘사와 서사 방식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역사전개를 흥미로운 이야기로 바뀌어준다. 민담이나 전설과 같이 과장되어 있기에 재미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현실에 대한 인식을 흐트러트리지 않을 정도로만 사용되고 있어 흥미 위주의 판타지 문학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임철우는 여러 가지 이유로 역사를 기억하는 것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역사를 바라보는 또 다른 방식을 제시함으로써 현재와 미래에 대한 올바른 대응을 할 수 있는 인식체계 마련해 주고 있다. 우리 한국국민에게 있어 반드시 기억하고 재인식해야 할 굵직한 사건들을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 방식을 통해 소화하기 쉬운 텍스트로 요리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와 같은 시도를 지나쳐 버리기엔 너무나 아쉬우면서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만약 많은 이들의 외면으로 인해 이러한 시도마저 없어져 버린다면 처음 이야기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백년여관』의 작가 후기 중 한 부분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산 자의 시간과 죽은 자의 시간. 이 세계엔 그 두 개의 서로 다른 시간이 공존한다. ‘죽은 자의 시간’은 결코, 연대기의 숫자를 바꾸는 것만으로, 과거니 역사니 하는 따위 딱지를 붙여 간단히 폐기처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를 기억하는 자들의 삶을 통해, ‘산 자의 시간’과 더불어 존재하고 또 한참으로 더 지속해간다. 그러므로 그것을 기억하는 자들이 아직 우리와 더불어 살고 있는 한, ‘죽은 자의 시간’은 과거이면서 동시에 엄연한 현재형의 시간인 것이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한 인간 존재의 죽음은 육신의 호흡이 멎음으로써가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지상의 맨 마지막 인간이 사라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