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온전치 못하신 할머니를 모시게 된 이후론 있는듯 없는듯 방구들을 뒹굴거나 썰렁한 번화가를 헤매며 술집을 찾아다니던 명절 연휴는 사라지고, 설날 하루만이라도 생색을 내려는 일가친척들 수발로 대략 정신없는 명절을 보내게 된 우리집.
잠시나마 자리를 피해보고자 동생과 함께 찾은 설날 극장은 발디딜 틈조차 없고 영화는 모두 매진, 엄마에게 미안하기도 하여 집으로 되돌아오니 술에 만땅 취한 고모부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에 틀어박혀 게임과 만화에 몰두한 동생과 나를, 방문을 벌컥 열어젖혀 놀래키시더니 거실로 불러내 각종 훈계에 돌입하신다. 찔러절받기의 고수인 고모부,
"너희들은 도대체가 글러먹었어, 어른들이 오시면 바로 세배를 드려야..."
(즉각 상을 한쪽으로 치우고 세배를 드렸다)
"세뱃돈은요?"
"너희들 다 돈벌잖아! 돈버는 애들한텐 세뱃돈 안줘!"
"저 돈 못버는데요"
(보다못한 고모가 만원을 주신다)
"돈도 못벌면 결혼은 언제 어떻게 하려고..."
"(고종사촌)오빠는 언제 결혼해요?"
"어릴적엔 오빠랑 잘 놀더니 이것들이 컸다고 오빠도 본척만척하고..."
"제가 그랬나요? 기억이 안나는데"
치열한 접전끝에 이미 곤드레만드레 취한 고모부는 알아들을 수 없는 호통을 내내 치시다 오빠와 고모의 부축을 받고 퇴장.
엄청난 밥상과 술상을 겨우 치우자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등장. 다행히 할머니 얼굴만 쓱 보고 서둘러 나서신다. 사실 지난 추석때 엄마아버지가 교회가신다고 할머니를 잠깐 큰댁에 내려놓고 가셨는데 놀란 큰아버지에 의해 30분만에 다시 우리집으로 할머니가 호송(?)된 적이 있는지라 우리집에 오래 있기가 저어한 심정은 이해할 법
할머니의 기억이 돌아오는 경우는 랜덤이라 예측하기 쉽지 않은데, 자식들이 한데 모여있는 것을 보시면 기억이 돌아온다는 것은 몇차례 검증된 바 있다. "또 올께, 나 누구야?"라며 작별인사를 하는 작은고모를 향해 "너 명자"라고 말씀하시며 굽은 허리를 스르륵 꼿꼿이 편 할머니 모습이 동생이 선정한 이번 설연휴 명장면 1위.
쉬지도 못하고 바로 언니와 형부 맞이할 준비를 하는 엄마를 보며, 나머지 연휴 기간 동안은 '특정 인간만 괴롭게 만드는 설 연휴 차별 철폐'를 외치며 과식 투쟁을 전개했다. 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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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콜/ ... / 싣자. 현미에. /
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