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나? 어쪄면 독백
나는 교양없는 글 하나를 썼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힘들어서 목 안까지 찰랑찰랑할 때 쓴 글이다.
나한테 시급하게 토로하고 싶었던 문제는
-왜 이렇게 우리 사무실은 결혼, 아이, 가족에 관대한가?
-그리고 왜 나한테 까지 자꾸 빨리 그런 사회적 역할(엄마, 부인, 며느리 등)을 수행할 것을 은근히 혹은 대놓고 종용하는가?
였다.
사무실에 다니기 시작한 지 6개월이고 6개월 내내 울컥했다가 무시했다가 동조했다가 등등을 반복했다. 사무실에서도 이따금 얘기를 하면 나는 또 '거칠고 어리고 공격적이고, 심지어 남자에 대한 거부감?이 너무 심하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가능성까지 닫지는 마세요.'라는 말을 듣는다. 더 무서운 건 나도 거칠거칠한 대화를 마무리하면서 저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해요 라는 식으로 발언한다.
: 사무실 얘기는 되도록 안하고 싶었는데 결국 또 한다. 이게 확실히 배경이니까 뺄 수가 없다.
나한테 당면한 문제는 블로그 논쟁이 아니기도 하다. 내가 근무하는 환경 속에서 지속적으로 야금야금 나를 좀 먹거나 세뇌시키거나, 아님 내가 스스로 물들이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다. 그래서 사무실 사람들과 어떻게 하면 이런 이야기를 할까 생각하지만 기회가 잘 없다. 그냥 그때 그 때 대화에서 치고나가는 수 밖에 없는데 내 말이 먹히려면 나도 좀 힘들고 어렵고 구속되고 저도 어쩔 수 없어요라는 분위기가 있어야 하는데 영 설득력있는 절박함이 묻어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사무실에 결혼한 사람반 비혼반이다. 이거 혼인유무로만 그룹을 묶는 건 말이 안되고 가지각색 다 틀려서 내가 상세히 설명하려면 개인적 캐릭터까지 다 나와야 하는데 골치아프다. 중요한 건 20대이면서 비혼이고 아이 싫어하고 어떤 경우 남자를 혐오하고 색안경끼고 있는 인간은 나밖에 없다.
(내가 아이 싫다고하면 사람들이 거의 너도 아이였다라고 하는데 내가 싫어한다고라고 말하는 건 부담스럽다는 뜻이다. 잠시 놀아주는 거야 가능하지만 얘가 하지 못하는 일을 내가 해줘야하고 이런 것도 그렇고 특히 나한테 아이가 있다고 생각하면 산을 짊어진 것같은 무거움이 있다. 내가 또 이런 말하면 낳으면 어떻게든 키운다로 대답이 돌아올 때도 있는데 내가 왜 히말라야를 올라가야하나. 뒷산도 충분히 행복한 것을.. 비유가 또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굳이 힘든 줄 알면서 찾아가지는 않겠다..는 뜻)
나는 사실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거부감이 없다. 선택의 순간이 오면 아이를 선택할 맘은 별로 없지만 또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서 내가 책임질 수도 있다고 본다. 한국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에 대한 전제조건이 있다는 것이 싫다. '결.혼' 아마 이거에서 더 스트에서 받는 사람은 결혼은 했는데 아이낳을 맘이 없는 사람 아닐까 싶다. 지금 나한테는 주로 결혼에 대해서 물어보지만 결혼하면 아이에게 할 거 아니냐. 심지어 우리 아빠가 사촌언니네 조카들을 너무 예뻐해서 나한테 빨리 너희 아빠 손주보게 결혼하고 애낳으라는 성미급한 사람도 있다. 이때는 진짜 초 토할 뻔 했고 아빠한테 지랄할까하다가 아빠가 애를 좋아하니 내 동생들이 빨리 애낳아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내 동생들은 결혼하고 애낳을 생각 열라있음)
여기서 내가 결혼이 너무 거북한 것은 나는 우리 가족으로 충분히 족하다. 충분히 책임감이 느껴진다. 근데 상대방의 가족까지 내 가족으로 받아들이는게 우리나라 가족 문화 아닌가? 싶다. 아 생각에는 이런 건 쓸데없는 오지랖 같다. 언제 이런 말 했다가 '상대방을 너무 사랑하면 다 극복된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리고 결혼하면 사실 혼자 우리집을 챙기듯이 둘이서 두 집을 챙기는 것이 되겠지? 생각하면서도 혼자서 내집도 못 챙기는데 왠 남의 집까지 챙기나?(여기서 어떻게 시댁이 남편이 남이냐라는 사람있을지도 저는 근데 그렇게 생각해요) 싶고 나는 노력은 해도 잘 안될 확률이 놓은데 굳이 욕먹을 짓을 자처해서 왜 해야하나 싶다.
엄마랑 이런 얘기를 막 했는데 엄마는 그런 생각은 맞는데 '니 애인이 니가 결혼 안한다고 해서 딴 사람한테 가면 어떻게 하나? 너무 사랑하는 사람을 결혼할지 말지 때문에 놓지면 너무 안타깝다'라고 했다. 나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애인이지 애인가족을 아니거든 이라고 했다. 엄마는 사실 귀찮다는 듯이 니좋을데로 해라라고 하면서 제발 혼자 빌빌대지 말고 잘 살라고 말했다. (빌빌대다는 경상도에서 특히 우리집에서 많이 쓰는 말인데 비하나 욕의 용도는 아닙니다.)
최근에 사무실에서 2명이 결혼을 했다. 결혼 준비가 본격화된 2개월 동안 언니들아 가지마~를 외치거나 결혼하려면 부페는 최고급으로 해라 같은 농담같은 말을 너무 많이 날려서 그런지 진진하게 얘기하지 못했다. 나는 그 때도 결혼에 대한 사회적 예찬은 이런 거구나. 결혼 그거 꼭 안해도 돼라고 말하지만 하니까 어른들(상사)이 이렇게 좋아하는 구나. 를 절실히 느꼈다. 우리는 규모가 작아서 쉽게 이런 일이 가능하기도 했지만 심지어 전체 직원교육일정도 연기됐다.(어떤 분 결혼식 날짜랑 겹쳐서)
나는 첫번째 글을 쓰고 올리고 나서 불안한 이유가 있었다면 사무실에서 진지하게 문제제기하지 않고 사석에서만 한 이야기를 진보넷을 통해서 사무실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쪄지 였다.(지금도 마찬가지..조마조마)
난 사실 비혼들한테도 가끔 화가 난다.(화까지는 아닐 수도 있지만 어휘력 부족해서) 이게 이 논쟁을 내가 비혼 vs 엄마로 묶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여러 비혼들도 내 글을 읽고 우리가 비혼이라는 이름아래에 있지만 여름이랑은 생각다르다라고 밝혔는데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나는 우리는 비혼이에요. 함께 도우면서 살아요. 하고 함께 가기에는 '언제 결혼해버릴지 언제 나를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다. 그래서 거리를 두게 된다. 상처받을 걸 알면서 자리를 다 맡겨서 뛰어드는 건 아무나 못하는 일잖아.
내 안에도 이런 기회주의적인 생각이 있다. 나도 어른들(50대 이후)에게 사랑받고 싶기도 하고 귀엽받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엄마아빠 소원성취 한 번 시켜줄까 하는 생각도 가끔 든다. 그리고 얘랑 결혼하면 이러 이런 점은 좋겠다라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족, 애인 등은 너무나 소중하지만 내가 성취하고 만족감을 느끼게 하는데는 얼마나 기여하고 있나?로 들어가면 글쎄다. 그렇다고 내가 에베레스트 점령이라도 하듯 뭔가를 향해 매진하고 돌진하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내 환경(상활)을 여기서 더 악화시키고 싶지는 않다. 나는 왜 결혼을 했을까? 결혼을 하면 더 나은가? 더 행복한가?에 대한 궁금증이 진짜 많고 많이 물어본다.
근데 아직까지의 결론은 '지금으로 족하다'라는 거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환경' '애 낳을 수 있는 환경' '애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한다라고 하지만 그냥 살고 싶은데로 살 수 있는 환경이 됐으면 좋겠다. 지금 사회는 누가 살기좋은 사회일까? 어떤 가치관을 선택하는 사람에게 좀 더 열려있는 것인가?라는 문제를 생각해보면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디까지 인정받고 사회에 편입할 가능성이 있는지 진단나오는 거 같다. 이건 자기의 위치에 대해서는 개개인이 생각해볼 문제인 거 같다.
글을 쓰면서 생각을 해보면 내가 이 논쟁에서 이렇게 막나갈 수 있고 거침없이 얘기할 수 있는 이유는 아쉬울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무실에서의 정규직, 비정규직 문제 얘기가 나오거나 대졸이나 고졸 문제가 나오거나 하면 나는 겸허히 수용하고 이해하고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그들의 애환에 대해서 존중하면서 나에게 무얼 바라는 지, 사무실에서는 어떤 행동 개인적으로는 어떤 행동을 바라는 지 물을 거 같다.
엄마가 소수자인가에 대해서 굳이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에 비해 여성은 소수자라고 생각한다. 그런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고위직?에 오를 수 있는 경우는 제도권 안에서는 왕의 부인, 왕자의 어머니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위치를 획득할 수 밖에 없는 여성들의 처지가 안습이고 억울하고 부당하다는 거지 엄마/어머니의 위치가 소수자라고는 할 수 없을 거 같다. 소수자가 아니다라는 말이 힘들지 않다라는 말과 같지는 않다. 힘들겠지만 힘들다고 해서 다 소수자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건 어쪄면 주류적인 입장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누구나 어떤 상황 어떤 위치에서 힘들고 외롭고 벗어나고 싶지만 또 그 위치에서 행복까지 동시에 느끼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지금 비혼이라서 열라 억울하고 때로 힘도 들지만 '힘들고 힘들다'라고 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또 비혼이라서 행복하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들도 비슷하리라고 생각한다.
이제 남은 과제는 어떻게 잘 어울려 살 것인가라는 건데, 이런 블로그 공론의 장에서는 결국 도출하지 못할 것 같다. 여기서 하나의 결론이 난다는 것, 현실에서도 어쨌든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지는 굉장한 무리가 있다. 결국 개인사로 돌아가서 그 사람들과 우리가 어떻게 절적히 배려하고 공감하고 이해하고 살 것인지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내 글을 읽고 진보넷에 있는 맘들께서 반응하셨을 때 처음에 의아했다. 내 글 밑에 누군가 바리의 글을 읽어보길 권하지 않았을 때 난 바리의 글을 읽었다. 내 글을 읽고 쓴 글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내가 덧글을 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나도 블로그를 통해 내 생각을 토로할 수 있는 것처럼 바리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많은 분들이 내 생각이라는 것이 엄마들의 애환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하고있다고 평가하셨지만..서도)
나는 진보넷에 있는 맘블로그를 자주 가보지는 않는다. 이따금씩 읽을 때에는 '음 그렇구나'한다. 이런 일도 있구나 이렇게도 사는 구나. 분명 내가 자랄 때의 육아방식과는 다르고 때로 아이들의 어떤 반응에 공감하기도 했었다. 그런 과정에 꼭 '엄마'라고 그 사람을 인식하지 않았고 엄마와 아이이야기라고 인식하지도 않았다.
나는 진보적인 운동권적인 386세대 부모 아래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어떻게 클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 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래서 내가 사무실에서 있었던 전화이야기를 올릴 때도 그냥 그랬다. (두번째 글에서 썼지만 전화하는 것 때문도 아니고 우리 사무실의 여러 엄마들이 다 그 엄마처럼 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엄마의 사례를 보여주기 보다는 아이를 너무 컨트롤하고 싶어하는 엄마의 사례가 되겠구나 생각했었다.)
하여튼 진보넷에서 하루와 바리의 이야기를 읽고 나는 엄마로서 바리와 하루를 이해하기 보다는 운동하면서 아이까지 키우기는 힘들다는 걸 생각했다. 아이를 키우기가 힘들다는 걸 몰랐다는 게 아니라 내가 생각하기에 좀 다른 카테고리에 있던 엄마들도 역시나 엄마의 역할에서는 그 수렁에서 헤어나올 수는 없는 것인가? 사실 이건 좌절이다. 그리고 나는 바리와 하루를 다른 엄마에 놓고 있었는데도 바리와 하루는 그냥 우리는 엄마다 라고 하는 것 같아 나는 또 좌절했다.
일단 여기까지.
'엄마'들이나 '아빠'들이나 '녀'들이나 '남'들이나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어떤 형태든지간에 '부부'/'파트너' 들이나 다들 고민이 있을 거고 다들 여러가지 생각들을 하고 있을 거에요... '그냥 살고싶은 대로 살 수 있는 환경'이 어떻게 가능할 지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걸 어디서건 그게 가상공간이건 비가상공간이건 털어놓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잘하시는 거에요... 모두들 그럴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싫으면 싫다고 표시내는 것도 중요합져. 여름이 엄마들의 분노/반대 표시를 받아들인 그점에 리우스는 동의/공감합니다. 그게 바로 '엄마들'이 여름 글 보고 분노하는 데에 동의한 이유이기도 해요.
힘내세요! 물론 '엄마들'도 힘내실 거에요...
그나저나 8월 첫째주 일요일에 쉬시나요?
그때 뭐 우면산이나 와우산이나 이런 쪼깬헌 산이라도 가실 수 있으면 몇분 쯤 더 모아가지고 리우스에게 연락하삼. 총 5~7명 이내로 하시면 좋겠어요. 그날 만일 오전에 산행(산책)이면 점심을, 오후 산행(산책)이면 저녁을 리우스가 맛있는 밥을 사겠심!
그래서 첫 글의 '거칠거칠함'에도 불구하고 난 좋았어. 첫 글이 '어떤 엄마'에 대한 글이 아니라 엄마들에 대한 글로 읽힌 연유는 글 자체와 글 밖의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생각이 들긴해.. 녀름 글도 그걸 고민하면서 쓴 것 같다.
여튼 이 글 읽으면서는 비혼주의자로서의 나의 존재나 언제나 배신을 때릴 수 있는 존재로서의 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군. 다만 나는 애인이 없기에ㅋ (그나마 다행?)
이 글 좋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그런 말을 차곡차곡 계속 듣다보니, 그게 또 위로와 자기긍정, 보람, 깨달음이 되기도 합니다. 그냥 이게 내 보람이고 새로이 인간되는 과정이구나.. 그런 거요. 그런 친구를 보면서 저 역시 전율하면서 감동하고, 아이에 대한 양가감정에 나도 빠져들고, 이래저래 부러워집니다. 성장의 완료지점, 목표지점에 대한 지지와 메세지가 세상에 또렷하게 마련되어 계신 어떤 정체성들(예컨대 고3이랄지 군인이랄지 모성이랄지)은 지지체계가 이런 식으로 많이 작동하니까 "정체성의 혼란"이 "성숙의 결실"이 되기 좋은 조건인가봐요. 근데 여튼 선택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걸, 굳이 그렇게 해야만 인간되는 거라고 정해놓고 지지와 격려를 해주니, 그게 또 생각해보면 속이 뒤집힐 때도 있습니다. 근데 또 이런 정체성들이 매우 힘든 노동을 전제합니다. 온갖 힘듦 노동들.. 이 역시 끝이 보이는 시간과 꿀맛같은 보상이 있어서, 해본 사람들끼리는 격려가 가능한 일이지만 - 여튼 이 노동은 무척 사람을 피로하게 하기 때문에 이것에서 파생되어 여러 일이 발생합니다.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 역시 그 일부입니다. "군대를 거부해? 감옥에서 편하게 썩으려는 놈" "대학 안가고 놀아? 넌 팔자 늘어졌다" 라고 그들을 힘든 노동을 하지 않고 날로 먹으려는 사람들로 보게 되거나, 적어도 "힘들지 않으려 선택했으니 그에 맞게 살면(불이익은 안됐지만 그걸 가지고 무슨 투쟁을 하는 건 오바;;) 되는 거다!" 라고 주위의 어르신들이 이야기꽃을 피우면 나서서 적어도 반론은 안하는 거죠. 더 나아가, 거부자들이 이들에게 우월감과 탄압, 비난을 행사한다는 일도 많습니다. 이성애자 친구에게 빈정이 상한다는 말을 했다가, 이성애자 억압시비에 휘말리는 일이 참 많은 것입니다. 억압한 게 아니라고 반론하거나 변명하는 것도 참 옳은 일이 아니므로- 조용히 착하게 살든지 그런 불만 따위는 자기들끼리나 있을 때 얘기해야 합니다. 블로그 홈 같은데는 나타나지 말고요.
근데 "정체성의 혼란"이 토론거리도 안되는 그런 존재들의 경우 흠. 뭐랄까 그걸 혼란이라고 본다면 말이죠- 혼란의 혼란을 거듭하게 됩니다. 왜냐면 답이 없기 때문이죠. 답이 없는 정체성의 혼란. 그렇다면 그 혼란을 무한반복하든지, 결국 그 정체성을 포기하고 그만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성적지향을 고민하는 이에게 그걸 성장통이라고 규정해버려 놓고 성장통은 어디어디 자리엔 안 어울린다고 말하시는 어르신들 때문에 참 세상 살기 힘들죠. 답이 없는 정체성? 저는 여튼 이 쪽이 토론거리에 한에서는 월등히 풍성하다고 봅니다. 성장통 쪽은 답과 보상이 있는 쪽이 좀 진행하고, 답이 없는 정체성 이야기들은 토론과 공동의 투쟁으로 좀 풀어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참- 선택지 없는 노동도 토론과 공동투쟁이 필요합니다. 공동투쟁은 거부자와 함께 해야겠죠. 안하면 처벌이 따르는 그런 노동이 클수록, 거부자들의 지위도 열악해지기 때문입니다. 보람과 보상체계 쪽이 더욱 마음에 든다면 그 노동을 독려하는 이들과 함께 해야 하고요. 보람과 보상체계의 분리선택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 또 새로운 제3의 정체성이 되도록 투쟁해야 할 겁니다.
제가 7월31일부터 8월2일 오전까지 지방출장이고 3일(일요일)이 할랑해서 제안드렸는데 답이 없으시넹...
그때가 거의 다 휴가에 들어가시는 시간들이라 좀 애매하긴 합니다...
그럼 안되시는 걸로 알고 그냥 잘 지내시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