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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 현대, 마르크스에게 다시 길을 묻다 | ||
맑스, 탈현대적 지평을 걷다 / 박영균·메이데이·1만8천원 | ||
화석화 교조주의 퇴장 뒤 고삐풀린 자본폐해 '기승' 대안은 관념 아닌 '실천' | ||
부산일보 2007/09/15일자 007면 서비스시간: 16:08:13 | ||
마르크스(맑스·사진)가 그립다, 라고 하면 돌팔매라도 맞을까? 시대에 뒤처진 지진아(遲進兒)라는 비아냥이 쏟아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마르크스는 그립다. 깡패를 동원해 사람을 두드려 패도 돈으로 처벌을 모면하는 게 원통해서 그렇고, 평생을 바친 종업원을 가차없이 잘라내도 오히려 효율성이라는 명분으로 묵인되는 현실이 미워서 그렇고, 최소한의 체면치레도 없이 상품을 강매하는 세계자본의 뻔뻔함을 제대로 꾸짖지 못하는 노동의 나약함이 스스로 못마땅해 또 그렇다.
마르크스주의자 박영균(진보평론 편집위원)은 '맑스, 탈현대적 지평을 걷다'를 통해 그렇게 되묻는 듯 하다. 문제는, '지금 이 시점에서 마르크스, 혹은 마르크스주의가 쓸모가 있는가'이다. 이미 유효기간이 지났거나, 아예 처음부터 아무런 약발이 없었던 마르크스가 아니냐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에서 스탈린까지 이어지는, 소위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오늘날 모순의 대안이 되지 못함은 이미 1980년대 소비에트체제의 붕괴로 입증됐다. 지은이도 통렬히 인정하는 바다.
그때 마르크스주의는 왜 실패했는가?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실천의 철학'에서 벗어나 교조주의로 전락해 버린 것이 원인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해방의 머리는 철학이요, 그 심장은 프롤레타리아트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양(止揚) 없이 철학은 자기를 실현할 수 없으며, 철학의 실현 없이 플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을 지양할 수 없다"며 당파적 실천을 강조하던 애초의 마르크스주의는 스탈린주의를 만나면서 '정통'의 외피를 두른 채 유물론적 형이상학에 머물러 활동성을 잃어버린 화석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며 나온 알뛰세르나 들뢰즈, 푸코 등의 탈현대적, 다시 말해 포스트(post) 마르크스주의는 어떤가. 지은이에 따르면 탈현대적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본질은 계급 모순과 적대적 투쟁인데, 탈현대적 마르크스주의는 그런 모순과 투쟁 대신 차이를 주장한다는 이유에서다.
"탈현대적 마르크스주의는 마키아벨리, 스피노자, 니체 등 마르크스 외부로부터의 수혈에 불과하기 때문에, 마르크스도 아니고 뭐도 아닌 정체불명의 잡탕이 되어버리거나 무늬만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불과하다." 과격해 보이지만 일견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도 아니고 탈현대적 마르크스주의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서 대안을 찾아야 할까? 지은이는 "이제까지 모든 철학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이제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라는 마르크스의 명제를 다시 강조하며, "사유나 관념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육체적 실천"을 강조하는데, 그 뜻하는 바가 다소 모호한 느낌이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지은이는 '마르크스 없이, 마르크스 앞에서' 마르크스주의를 고민할 것을 요구하는데, '정통'의 마르크스는 버려져야 하고 해체돼야 하지만, 그 해체 위에서 생성되는 것은 다시 마르크스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더 이상 정통 마르크스의 좌표가 없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지평 위에서 마르크스를 사유해야 한다. 이것은 마르크스를 버리자거나 마르크스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정신은 여전히 오늘날의 계급투쟁 속에 살아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마르크스 앞에서 현재의 지평을 사유한다." 임광명기자 kmyim@busanilbo.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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