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턴의 윤리적 실패
요즘 테리 이글턴의 책들이 잇따라 국내에 번역되고, 얼마전에는 그가 직접 와서 강연회도 열었다. 이 덕분에 이글턴에 대한 관심이 다시 한번 일었다. 이런 때에 마침 이글턴을 비판하는 글을 하나 봤다. 글쓴이는 롤런드 보어(Roland Boer)라고 이 블로그에 한번 등장한 적 있는 신학자다. (식민주의론에서 마르크스 내쫓기 참고.)
아래 번역문은 그가 아메리카의 정통 좌파 잡지 <먼슬리 리뷰>가 만드는 웹진 ‘엠알진’을 통해 발표한 이글턴 비판 글이다. 비록 정규 <먼슬리 리뷰>는 아니지만 이쪽 계열 사람들이 다른 이도 아닌 이글턴 비판 글을 실어줬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이를 계기로 보어에게 ‘신진 정통 좌파 학자’라는 딱지를 붙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보어의 비판이 적절하냐 여부를 떠나서, 최근 이글턴의 사상적 바탕을 간략하게 요약한 글이라는 측면에서 한번 읽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번 번역은 꽤나 오래 쉬었던 번역 작업 재개를 위한 ‘준비 운동’쯤의 의미가 있다.)
테리 이글턴의 윤리적 실패
롤런드 보어
테리 이글턴이 얼마전 한쪽으로 치우친 책 <낯선 이들과 섞여 겪는 곤란함>을(1) 내놓음으로써, 좌파들이 윤리에 대해 의견을 내는 급물살 같은 흐름에 합류했다. 그가 요즘 다시 가톨릭 좌파세력의 비상근 신학이론가 구실을 하고 있기에 기대하게 되는 것에 충분히 부합할 만큼 그의 주장은 직설적이다. 기독교 신학과 사회주의가 인간의 타락 그리고 지축을 흔드는 갱생에 대해 훨씬 더 심오한 감각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결국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의 요점 아닌가? 이 이야기는 전혀 사심없이 공감하고 연민을 느끼고 이해해야 하는 의무, 자신과 같은 처지의 남자와 여자들에 대한 의무가 무엇인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게 한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런 주장을 그한테서 기대하는가? 2000년 이후 내놓은 대부분의 책에서(2) 이글턴은 거의 변함없는 주장,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통적인 가톨릭 신학 형태를 변형해 제시했다. 그것은 ## 세상을 창조할 필요가 없음에도 사랑 때문에 창조한 (그래서 존재하기 위해 창조에 의존할 필요라곤 없는) 신의 고유한 본성, ## 본래부터 사악하며 겉보기엔 극복되지 않을 것 같은 힘들(자본주의, 이기심, 파괴, 유혈 참사, 잔인함 그리고 사람들이 지닌 것)에 대해 형이상학적으로 대처함에 있어서 나타나는 단순하고 본래적인 미덕의 힘, ## 이기심을 버리고 거저 주는 과정이란 성격을 띤 윤리와 사랑의 핵심적 구실, ## 용서, 특히 정치적 용서의 필요성 ## 진정한 희망, 특히 아나윔(가난하고 억압받으며 짓밟히는 이들)을 통해서 얻는 희망이자 그들을 위한 희망이 어떤 구실을 하는지 등 5가지다. 그런데 ‘아나윔’은 이글턴이 아는 유일한 히브리어 단어인 듯 하며, 그의 초창기 신학 저작에 묻어 뒀다가 다시 들고 나온 단어인데, 미리 예상할 수 있을 만큼 규칙적으로 최근 그의 저작 곳곳에 등장한다.(3) 이 모든 주제를 통틀어서, 윤리는 그의 신학의 핵심 특징으로 규칙적인 소리를 낸다. 그의 저작을 하나씩 차례로 넘길 때마다, 그가 이 간략한 신학을 마치 의식을 치르듯 거듭 변호하는 걸 보게 된다. 종종 토마스 아퀴나스와 이글턴의 정신적 지도자 허버트 매케이브를 거론하면서 말이다.(4)
말년의 이글턴은 다리 셋달린 발판에 정착했다. 마르크스주의, 라캉의 정신분석 그리고 신학이 각각 그에게 인간 타락의 깊이와 그 타락을 극복할 가능성에 대해 거의 똑같은 이야기를 제시해주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분석이 타락 상태를 훌륭하게 묘사하게 해준다면,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약간 숨이 찰 정도로 나란히 붙어다니면서) 사뭇 최선의 해법을 제시한다. 이런 삼각측량법은 <낯선 이들과 섞여 겪는 곤란함>에서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제계를 기준점으로 선택한 이유를 해명해준다. 처음엔 윤리에 관한 꽤나 통상적인 주장을 꾸미는 겉치레로 보였으나, 결국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이 드러났다는 이야기다. 이 책의 뒷부분에 이르면, 이 기준점은 확실히 매끈해 보이지 않는다. 이글턴이 이것을 구부리고 잡아늘리고 하면서 훨씬 더 윤리적인 주장에 끼워맞추려 애쓰는 데서 이 매끄럽지 못함이 드러난다. 셰익스피어를 상징계에 가져다 맞추고 키르케고르의 미학, 윤리, 종교를 각각 상상계, 상징계, 실제계에 꿰맞추고, 남는 것들은 마지막에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칸트까지 한꺼번에 뭉쳐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세가지 범주를 활용하는 데는 함정이 있다. 특히 이글턴처럼 활용하면 더 그렇다. 점진적 발전 형식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글턴은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제계를 변증법적으로 읽는다고 지적하긴 했지만, 여전히 각각을 아이 성장의 각 단계들로 본다. 부르주아 성쇠의 비뚤어진 역사적 서사인 것이다. 아니면 마지막엔 말할 것 없이 기독교가 비책으로 등장하는 진보적인 서사 구조로 여긴다고 할 수도 있다. 그 결과는 명백하다. 상상계는 거울상 단계에 매여있는 미성숙한 형태이고 이 범주에 해당하는 윤리는 자기 자아에 집중하는 것이다. 상징계는 자아와 타자의 협상을 통해 한발짝 나아간 단계이지만 이 또한 실제계의 끔찍한 장소에는 못미친다. 실제계는 우리를 계속 나아가게 하지만 언제라도 우리의 세계를 파괴할 위험이 있는, 정신적 외상을 초래할만큼 충격적이며 딱히 표현할 길이 없는 알맹이이다. 이 지점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기독교의 죄악론에 도달하는데, 이는 신학적 해결책의 발판이며 동시에 착취당하고 소외된 인간 상황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깊은 비관이 제 자리를 찾는 계기다. 이글턴의 표현대로 하자면 라캉의 실제계는 “원죄의 정신분석적 변형”(5)이다. 그렇게 정신분석은 우리를 타락하고 죄많은 우리의 상황으로 이끌어 가며, 거기서 우리에겐 신학과 마르크스주의가 필요하다. 이제 문제는 이글턴이 폭넓은 분석을 제시하지 않은 채 마르크스주의가 유대·기독교 사상이라는 우물에서 한껏 물을 마신다고 기정사실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윤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정신적 외상을 가져올만큼 충격적이고 끔찍한 실제계를 고려할 때 윤리의 어떤 돌파구, 깊고 철저한 변환이 있는가? 라캉의 구조를 취해야 한다면 끝까지 가도록 하자. 예수의 죽음이라는 수난 서사가 그 짐승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해주는가? 전환의 서사, 궁극적인 정신분석적 치료를 제공하는가? “주여, 주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버림받음에 절망하는 부르짖음 속에서, 이 서사가 우리를 실제계를 거쳐 지나가도록 이끄는가? 우리는 마침내 상상계에서 나타나는 자기 문제에 대한 시름을 털어내고, 상징계에서 나타나는 사람 사이의 집착 또한 넘어서서, 최우선적인 윤리 욕구가 우리로 하여금 같은 처지의 남자, 여자와 사이좋은 관계를 맺도록 돕는 그 순간에 도달하는가?
간단히 답하면 아니다. 이글턴은 답을 주지 않는다는 얘기다. 우리가 찾게 되는 건 고작 사심없는 선함과 미덕을 기분 좋게 보는 것뿐이다. 예수는 착해지고 그에 대한 어떤 대가도 기대하지 않음으로써 죽음과 절망을 극복한다. 삽을 이웃에게 빌려주고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식이다. 이글턴을 따르자면, 기독교 신학은 악의 깊이를 실제로 극복할 수 있는 단순하고 선입견 없는 미덕들 몇가지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글턴은 자신이 진정한 ‘형이상학’을 회복하려 한다는 걸 회피하지 않고 인정한다.) 친절함, 사랑, 정의, 겸손, 겸양, 온화함, 전망, 용기, 헌신, 사심없음, 인내심, 이 모두와 기타 등등이 아주 이원론적으로 나뉜 우주에서 악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거듭 거듭 불려나와 정렬한다. 그러나 역시 최고의 미덕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옷을 벗어 제치고 수도관을 연결해주려는 원기 왕성한 욕구가 아니라, 냉담하고 조건 없으며 비인격적인 데다가 특히 적과 낯선 사람에 대한 사랑 속에 제 기준점을 설정한 공적·정치적 사랑의 법칙으로 이글턴은 간주한다. 이글턴에게 이는 윤리학, 아무런 대가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낯선 사람들’을 돌보는 이기심없고 사심없는 의무감의 핵심을 이룬다. 우리도 이집트(애굽)에서 낯선 사람들(이방인)이었기에 우리 중에 있는 낯선 사람들한테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성경의 명령이 이글턴의 글에서 반향을 일으키며 이어지지만(7), 그가 가는 길은 영원한 전쟁 상태에 있는 사회에 뿌리를 박은, 레비나스의 피가 흐르는 육체와 분리된 윤리학과는 다르다. 결국 윤리학은 윤리적 행위로서 예수의 십자가에서 볼 수 있는, 기독교 가르침의 핵심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 윤리학이 결국 신경쓰는 것은 바로 그 타인이며, 그들은 우리가 사심없는 사랑, 악을 극복할 진부한 선함을 보여줘야 할 대상이다.
신경쇠약은 별개로 하고, 이글턴은 끝을 잘라낸 신학과 팔다리 자른 사회주의를 제시한다. 윤리학은 종교계 좌파, 더 정확히 말하자면 훨씬 더 영적인 좌파의 삶의 규칙에 지나지 않는 게 된다.(8) 결국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자는 규칙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공교롭게도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공통으로 제기하는 이런 지침을 따르면, 구원의 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글턴은 19세기에 흔히 공유하던 진부한, 아니 진정으로 열심히 몰두하던 주장에 빠지고 만다. 사회의 도덕 규칙은 오직 기독교 신학에 뿌리를 둘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성직자에 반대하는 항위 시위대와 세속적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사회 운동 무리가 점점 불어나는 걸 걱정스럽게 지켜보면서, 교회와 정치 지도자들은 기독교가 무너지면 사회 통합의 도덕도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의 사랑과 죽음과 부활에 바탕을 둔 좀더 급진적인 윤리학을 선포하는 한에서 이글턴은 이와 거의 똑같은 주장을 편다.(이는 우연의 일치겠지만 보수적인 무슬림들도 공유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공허한 소비주의가 영향력을 얻으면서 가치가 구석으로 밀려났다고 이글턴은 주장한다. 더는 강력한 형이상학적 틀이 존재하지 않고 윤리는 황야에서 떠도는, 목마르고 굶주리는 이들한테만 남는 문제가 됐다. 해법은 이제 기독교의 가르침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이글턴의 초기 가톨릭 좌파 시절을 전적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2000년 이후 이글턴의 글에서 노골적으로 나타난 신학적 어조는 점점 더 커졌으며, 그 결과 이제 이글턴은 예수의 육체적 부활(그렇지 않으면 메시지가 무의미해진다), 예수 부활의 힘과 신의 본성, 그리고 아주 최근까지 드러내지 않던 주제인, 희생 제물과 성체 성사의 사랑의 식사가 하나로 일치함을 공개적으로 거론한다. 이는, 타인을 위해 목숨을 내어줄 위대한 기회를 놓쳤을 때, 이 자기희생을 적절히 대체해주는 것이다. 게다가 이는 성체 성사의 가치를 논하곤 하던 옛날 이글턴이 토해내던 것이기도 하다. 빠진 게 있다면 딱 하나, 사제가 레닌식 전위가 될 수 있다는 낡은 주장뿐이다.(10) 캔터베리 대주교가 그의 글을 수긍하며 읽는 게 하나도 놀랍지 않다.
주석
(1) 테리 이글턴, Trouble with Strangers: A Study of Ethics (Oxford: Wiley-Blackwell, 2009). (아마도 자신이 때때로 글을 읽는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나온 걸로 짐작되는) 많은 인용과 해설로 가득한 이 책은 프랜시스 허치슨,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 애덤 스미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키르케고르의 작품을 포함한 묘한 책이다.
(2) 이글턴, The Gatekeeper: A Memoir (London: Penguin, 2001); 이글턴, Figures of Dissent: Critical Essays on Fish, Spivak, Zizek and Others (London: Verso, 2003); 이글턴, Sweet Violence: The Idea of the Tragic (Oxford: Blackwells, 2003); 이글턴, After Theory (New York: Basic Books, 2003); 이글턴, Holy Terror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이글턴, "Lunging, Flailing, Mispunching," London Review of Books (2006); 이글턴, Jesus Christ: The Gospels (Revolutions) (London: Verso, 2007); 이글턴, Reason, Faith, and Revolution: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9); 이글턴, Trouble with Strangers: A Study of Ethics; 이글턴과 내선 슈나이더(Nathan Schneider), "Religion for Radicals: An Interview with Terry Eagleton," MRZine 61, no. 4 (2009); 이글턴, On Evil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0). 위에 거론한 작품들에 다양한 형태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지만, 더는 주저하지 않고 이글턴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장 온전한 형태의 주장은, 이글턴, Reason, Faith, and Revolution: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 5-32쪽에 나온다. 여기서 그는 (해방신학과의) 연결고리를 확인하면서도 “해방 신학… 딱지를 붙이길 꺼려” 한다.(32쪽) 더 자세한 논의는 롤런드 보어, Criticism of Heaven: On Marxism and Theology, Historical Materialism Book Series (Leiden: E. J. Brill, 2007), 275-333쪽을 보라.
(3) 이글턴, "The Roots of the Christian Crisis," in "Slant Manifesto": Catholics and the Left, ed. Adrian Cunningham, Terry Eagleton, Brian Wicker, Martin Redfern and Lawrence Bright OP (London: Sheed & Ward, 1966); 이글턴, The New Left Church (London: Sheed and Ward, 1966); 이글턴, "The Slant Symposium," Slant 3, no. 5 (1967): 8-9; 이글턴, "Why We Are Still in the Church," Slant 3, no. 2 (1967): 25-8; 이글턴, "Language, Reality and the Eucharist (1)," Slant 4, no. 3 (1968): 18-23; 이글턴, "Politics and the Sacred," Slant 4, no. 2 (1968): 18-23; 이글턴, "Language, Reality and the Eucharist (2)," Slant 4, no. 4 (1968): 26-31; 이글턴, "Priesthood and Leninism," Slant 5, no. 4 (1969): 12-17; 이글턴, The Body as Language: Outline of a 'New Left' Theology (London: Sheed and Ward, 1970).
(4) 이글턴, Trouble with Strangers: A Study of Ethics, p. vi; 이글턴, Reason, Faith, and Revolution: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 pp. xi-xii; 이글턴, Holy Terror, p. vi.
(5) 이글턴, Figures of Dissent: Critical Essays on Fish, Spivak, Zizek and Others, p. 205.
(6) 같은 책, p. 120; 이글턴, Sweet Violence: The Idea of the Tragic, p. 74.
(7) 출애굽기 22장 21절, 23장 9절; 레위기 19장 34절; 신명기 10장 19절.
(8) 이글턴, Trouble with Strangers: A Study of Ethics, pp. 195-6, 272, 291-2, 323
(9) 이글턴, Trouble with Strangers, pp. 195-6, 272, 323. 이글턴, The New Left Church, pp. 69-84; 이글턴, The Body as Language: Outline of a 'New Left' Theology, pp. 39-40; 이글턴, "Language, Reality and the Eucharist (1)"; 이글턴, "Language, Reality and the Eucharist (2)."을 비교해보라.
(10) 이글턴, The Body as Language: Outline of a 'New Left' Theology, pp. 75-93.
롤런드 보어는 오스트레일리아 뉴캐슬대학 신학과 연구교수로 있다. 그의 블로그는 stalinsmoustache.wordpress.com이다. 롤런드 보어, "An intrinsic Eagleton" (Journal for Cultural and Religious Theory 9.2, Summer 2008)도 보라. (내려받기: www.jcrt.org/archives/09.2/boer.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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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일러두기) 그의 책 하나가 <성서와 대안좌파>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번역되어 나왔다. 이 책은 저자명을 ‘로랜드 보어’로 표기하는데, 나는 전에 ‘롤랜드 보어’로 표기한 적 있다. 하지만 ‘롤런드’가 원 발음에 가깝고 국립국어원의 외래어표기법에도 ‘롤런드’로 되어 있어 표기를 바꿨다.
원문: mrzine.monthlyreview.org/2010/boer220910.html
번역: 신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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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 끝난 중복 댓글 두개 삭제 완료. (보어의 블로그 댓글을 통해, 번역에 대해 본인의 사후 허락을 받다.)
이 번역에 대해 쓴 롤런드 보어의 블로그 포스트 -- 이렇게 원 저자와 연결되는 건 번역자로선 참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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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2 18:29
밑에서 본 세상, "이글턴의 윤리적 실패" http://is.gd/gcwju 트윗 떠나셔서 제일 아쉬웠던 분. (마리신 님, 돌아오셨으면.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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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6 17:52
<이글턴의 윤리적 실패> by 롤런드 보어 http://bit.ly/aWy8gA /via. 밑에서 본 세상 marishin님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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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댓글 보내온 곳 @Schattenstwt
2010/10/26 18:19
RT @pheeree: <이글턴의 윤리적 실패> by 롤런드 보어 http://bit.ly/aWy8gA /via. 밑에서 본 세상 marishin님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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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댓글 보내온 곳 @viamedia
2010/10/26 19:06
1. 이글턴은 원래 전통적 좌파의 윤리적 실패에서 시작하지 않나? 그 반성의 출발이 정당한 지를 살폈어야. RT @pheeree: <이글턴의 윤리적 실패> by 롤런드 보어 http://bit.ly/aWy8gA via 밑에서 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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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댓글 보내온 곳 @Schattenstwt
2010/10/26 19:07
RT @viamedia: 1. 이글턴은 원래 전통적 좌파의 윤리적 실패에서 시작하지 않나? 그 반성의 출발이 정당한 지를 살폈어야. RT @pheeree: <이글턴의 윤리적 실패> by 롤런드 보어 http://bit.ly/aWy8gA via 밑에서 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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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6 19:08
RT @viamedia: 1. 이글턴은 원래 전통적 좌파의 윤리적 실패에서 시작하지 않나? 그 반성의 출발이 정당한 지를 살폈어야. RT @pheeree: <이글턴의 윤리적 실패> by 롤런드 보어 http://bit.ly/aWy8gA via 밑에서 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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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댓글 보내온 곳 @pheeree
2010/10/27 01:40
RT @viamedia: 1. 이글턴은 원래 전통적 좌파의 윤리적 실패에서 시작하지 않나? 그 반성의 출발이 정당한 지를 살폈어야. RT @pheeree: <이글턴의 윤리적 실패> by 롤런드 보어 http://bit.ly/aWy8gA via 밑에서 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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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이글이글 이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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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8 22:09
marishin님의 [이글턴의 윤리적 실패] 에 관련된 글. 이글턴의 책을 흥미롭게 봤던 터인데 그에 반하는 글도 뭐 재밌다. 원래 직업이 까기(부정적 의미는 아님)인 사람들끼리의 논쟁이니 무엇이 맞냐 틀리냐 결론은 별로 관심없다. 이전의 생각이나 감각을 뒤흔들게 하는 이야기들이라면 난 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