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보편성'이라는 허울이 깨져 나갈 때

법치주의를 지탱하는 원리 중 하나로 법의 보편성이 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법언이 여기서 출현한다. 법은 가장 강력한 국가권력의 강제수단이다. 윤리나 도덕처럼 일정한 행동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면서도 반드시 집행력이 뒤따른다는 점에서 양심에 맡겨지는 윤리나 도덕과는 전혀 다른 존재양식을 가진다.

외부적 통제가 가해지는 만큼, 법은 피하고 싶은 대상이 된다. 그럼에도 사회공동체의 유지와 안녕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구성원으로 하여금 법을 수긍하도록 해야한다. 이를 위한 조건으로 중요한 것이 법의 보편성이다. 힘을 가진 자나 힘이 없는 자나 같은 유형의 행위에 대해선 같은 규범이 적용된다는 것이 전제될 때 비로소 사람들은 법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여기까지는 매우 교과서적인 설명이다. 이상적으로 작동하는 법은 보편성을 유실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에서 작동하는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다. 법이 성립하는 순간부터 효력을 발휘할 때까지, 법은 그 성격상 보편적일 수가 없다. 법은 정치적 쟁투에서 승리한 자의 선언문이기 때문이다. 법의 보편성은 규범의 문구가 아니라 그 법을 작동시키는 힘에 따라 낯빛을 바꾼다.

법의 힘이 작동하는 배경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다. 법을 만든 자는 누구인가? 법을 집행하는 자는 누구인가? 법을 해석하는 자는 누구인가? 즉 입법, 행정, 사법의 주체가 누구인가, 그리고 그 주체 외의 주체들에게 어느 정도의 힘이 있는가가 법의 효력이 어떤 방향으로 작동할지를 결정한다. 법은 법의 형성과 작동, 재구성을 담당한 계급의 이익에 복무한다.

통상 입법, 행정, 사법의 주체는 하나의 패키지로 움직인다. 즉, 입법기구의 주체, 행정기구의 주체, 사법기구의 주체는 통상적으로 하나의 계급에 속하는 인자들로 구성된다. 주요 인자들이 각 기구에 편입되는 과정은 다양하지만, 그 과정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대부분의 인자들은 역시 같은 계급에 속해 있다. 이렇게 입법, 행정, 사법의 전 부문을 지배하는 계급을 지배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언급되는 사례조차 찾기 힘들게 되었지만,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은 법의 보편성을 설명하는 때에 상당한 편익이 있다. 지배계급의 이해가 관철된 체제를 피지배계급이 동의하도록 유인하는 방책으로서 법의 보편성이라는 개념이 매우 유용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법의 보편성이라는 대전제 아래, 피지배계급이 법체제를 수용함으로써 실정법 체계는 정당성을 확보한다.

지배계급의 힘이 강력할 때, 법의 보편성은 지배계급 내부의 구성원들에게만 의미를 가진다. 지배계급을 제어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지 못하는 한, 지배계급 외의 계급에게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구호는 그저 체제를 인정하도록 강제하는 압력을 유연하게 표현한 당의정일 뿐이다. 법의 보편성은 지배계급에 대댱하는 계급의 힘에 의해 보장될 뿐이다. 법은 그 적용의 대상이 힘이 있을 때는 하염없이 겸손하지만 그 대상이 힘이 없을 때는 악귀야차로 돌변한다.

내란정국에서 보수양당, 검찰, 공수처, 법원이 취하고 있는 행태는 법이 누구의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검찰개혁이니 공수처 설치니 하며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였던 외양과는 달리, 보수양당의 구성원들은 사실상 하나의 이해관계로 엉켜있는 인자들이라서 이들 사이에서 발생한 대립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에서 발생한 대립과는 전혀 양상이 다르다. 보수양당은 물론이고, 면죄부를 두고 다투면서 법을 이용하는 검찰, 공수처, 법원 모두가 마찬가지다.

검찰개혁이나 공수처 설치는 단지 보수양당 사이에서 법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면피의 방법을 찾는 과정에 불과했다. 집권자가 누구냐에 따라 정적을 제거하거나 아군을 면죄하는데 유용한 수단을 두고 서로 서로 대치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영원한 내로남불, 즉 내가 집권하면 이용하고 저쪽이 집권하면 탄핵하는 티키타카만이 지속된다. 여기에 피지배계급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결국 공수처법이나 검찰개혁은 지배계급 내부의 권력분배를 둘러싼 충돌이었다. 지배계급 내부에서조차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법을 장악하려 다툰다.

내란세력과 이들을 옹호하는 세력은 법을 무시하지만 법은 이들을 보위한다. '헌정질서'를 회복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헌정질서 파괴세력이 오히려 헌정질서의 이름으로 보호받는 것을 보며 혼란스러워진다. 법의 보편성이라는 환상은 여지없이 깨진다. 그리하여 다시금 물음은 본원적이어야 한다. 도대체 이 법은 누구의 법인가? 누가 만든 법인가?

법의 보편성을 내 삶의 효용으로 만끽하고 싶다면, 더 이상 저들에게 입법권과 행정권과 사법권을 맡겨둬서는 안 된다. 아니, 적어도 법이 그 보편성, 추상성의 가치를 저들에게만 보장해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라도 저들에게 심어주어야 한다. '체제전환'이라는 지향이 그저 대기 속으로 희석되어갈 구호로 끝나서는 안 된다. 아스팔트 위에서 피어난 전복의 열망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치적 실체로 형성될 때에야 비로소 법의 보편성이 저들만의 노획물로 남게 되지 않을 수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25/03/10 14:31 2025/03/10 1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