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수호

이 땅에 존재하는 헌법(憲法)이라는 규범은 매우 불쌍한 존재다. "법 중의 법"이라는 그 위치, 즉 한 나라의 가치규범과 생활규범, 지배이데올로기와 가치관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면서 모든 법의 근본이 되는 그 위치는 불행하게도 남한사회에서만큼은 그다지 보장되지 않는다.

 

인간에게 마땅히 보장되어야 할 인권은 물론이려니와 그나마 헌법에 열거되어 있는 각종 기본권들은 시시때때로 휴지조각이 된다. 대법원장이 전국을 돌면서 영장남발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를 내리자 검찰이 반발하고 있다. 반발할 일이 아니다. 원칙대로 하면 된다. 검찰은 지들 편할라고 멋대로 영장청구하고 법원은 검찰 체면치레 해주느라고 대충 영장발부해주는 이런 관행 속에서 불구속수사원칙, 무죄추정의 원칙 같은 헌법상의 권리는 규범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법원이든 검찰이든, 이들은 헌정수호를 위한 첨병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이 앞장서서 헌법의 이념을 외면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거다. 헌법재판소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지난 시기 동안 한국의 헌법재판소가 철저하게 지키고자 했던 권리는 소유권이었다. 그 외 재산권과 사회권에 대해서 헌재는 상당히 소극적인 결정을 내리거나 아예 소설을 써왔다.

 

이러니 대통령이라고 해서 헌법 알기를 어렵게 알리가 없다. 신임 헌법재판소장 예정자를 둘러싼 이 혼란의 근본적 원인은 누가 뭐래도 노무현이다. 임기 이후에도 안정적으로 헌재를 장악하고자 했던 노무현의 꽁수는 결과적으로 헌법의 규정과 헌법재판소법이 정하는 절차를 위배했다. 법리적으로 따졌을 때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나 절차적으로는 분명히 하자 있는 인선이 되고 말았다. 결국 사과까지 해야 했으나 아직도 국회에서는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상황이 이런 판국에 수구 한나라당 세력이 헌법 알기를 개껌보다 못하게 여기는 현상도 별로 이상하질 않다. 걔들이야 애초부터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건설되었던 군사정권의 적자들이고, 헌법에는 사유재산 보장만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자본지상주의자들인데 뭘 더 바라냐?

 

깨는 건 이 역사적 헌정질서 파괴자들의 후예들이 국회의사당 안에서 헌정질서수호를 목놓아 외치고 있다는 거다.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예정자를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농성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한나라당의 이러한 행위를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또는 꼴통들의 발악이라고 몰아부칠 수가 없다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왜냐? 절차적으로 분명히 하자 있는 인선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절차라는 것은 헌법에 명확하게 나와 있다. 헌법의 규정과 헌법재판소법의 규정이 애초부터 문제가 있는 규정이라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노무현의 꽁수는 결코 현행 법질서를 제대로 지킨 것은 아니다. 한나라당이 그렇게 지들 뿌리를 잊고 생 쥐랄을 틀어도 걔들만 나쁜 넘들이라고 욕할 처지가 못되는 거다.

 

87년 4월이었던가? 체육관에 사람들 모아놓고 호헌선언을 하면서 헌정질서유지를 다짐했던 군사정권이 있었다. 요즘 뜨고 있는 개그프로그램 중에 '마빡이'라는 것이 있던데, 사실 지 벗겨진 마빡을 불똥떨어지게 주어 패야할 인간은 아직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연희동의 전씨다. 어쨌던 헌법질서를 송두리채 파괴했던 인간이 말로에 가서는 꼭 붙잡으려고 안달하는 것이 헌법이다. 이 아이러니는 시대가 변해도 다른 버전으로 되살아난다. 이번 한나라당의 모습이 그거다.

 

문제는 영악해진 이 수구집단은 전씨처럼 '호헌철폐, 독재타도' 외치면서 민중이 들고 일어설 빌미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 누가 보더라도 이번 건에서만큼은 한나라당의 헌정질서수호의 목소리가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다. 뭐, 이런게 인생이지 하면 그만이겠지만...

 

가장 깔끔한 것은 전효숙 예정자가 깨끗하게 관두고 나오는 거다. 사법부의 최고수장이어야할 헌법재판소 소장 예정자가 정부수장인 대통령의 언질을 따라 사표 제출하고 다시 헌재소장 예정자 신분을 획득하는 것은 3권분립의 정신으로 보더라도 별로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청와대 바로 아래 자리잡고 있는 헌재를 보고 있는 것도 탐탁치 않을진대, 대통령 말 따르는 헌재소장이라면 이거 좋지 않다.

 

노무현은 이 기회에 지 잔머리가 항상 어떤 결과로 끝났는지 잘 돌아보아야 한다. 노무현의 잔머리가 통한 건 딱 한 번, 탄핵을 통해 열우당을 압승으로 이끈 것 뿐이다. 그 때 올인 한 번 했으면 잘 한 거다. 결국 그 쬐는 맛을 잊지 못해 허구한 날 올인하다가 오늘날 요모양 요꼴이 되었다. 노무현, 당신은 타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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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0 14:55 2006/09/20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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