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虛空) 잡담
#1.
전철로만 1시간 가량을 달려야 하는 요즘 통학길(!)이다. 걸리는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전철 안에서는 온갖 군상들을 다 보게 되는데, 오늘의 에피소드는...
맞은편 노약자 석에서 뭔가 시끌거리는 소리가 난다. 80대라고 자신을 밝히는 중후한 차림의 할매 한 분과 역시 같은 나이대로 보이는 약간 꾀죄죄한 할배 간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말다툼의 원인은 종교.
정치이야기와 종교이야기는 함부로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나게 느끼게 되었는데, 두 분이 가지고 있는 성경에 대한 박식함...이라기보다는 암기력은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할 수준이었다. 이야기를 듣자하니 할매는 여호와증인 신도이고 할배는 예배당 다니는 모양이다. 서로 자기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그 근거는 똑같이 성경.
열 몇 정거장을 오면서 두 분이 성경에 대해 논하는데, 성경 무슨 편 몇장 몇절에 무슨 이야기가 나온다며 설전을 벌이는데, 막힘없이 쏟아져 나오는 암기실력에 후덜덜한 느낌을 받으면서, 내 손에 성경이 있었다면 당장 두 사람이 지적한 구절을 찾아 실제 그런 말들이 있는지 확인까지 하고싶어지는 지경이었다. 도대체 성경을 얼마나 읽으면 저정도 내공이 갖춰지는 걸까?
주역천독(周易千讀)이면 수상보행(水上步行)한다는데, 이 두 분 내공을 볼 때 성경을 만독쯤은 한 듯 싶고, 저 수준이면 수상보행이 아니라 허공답보(虛空踏步)정도는 해야하는 거 아닌지 모를 지경이었다.
절정고수의 내공싸움은 결국 한 호흡에서 승패가 갈리는 법. 다소간 말빨이 딸린다싶던 할배가 결국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할매에게 인신공격 시작. 성경공부하시고 천국왕림을 목전에 두신 분의 입이 거의 걸레물고 사는 양아치 수준으로 전락하는 순간 게임 오버. 물론 내공충천한 할매 역시 할배의 인신공격에 내상을 입으신 후 개인 비방에 가까운 설전을 전개. 할배가 먼저 하차하면서 게임은 종료되었으나, 내처 궁금한 것은 성경말씀을 그렇게 신주단지 모시듯 하면서 사시는 두 분이 어째 불구대천지 원수를 만난듯이 그렇게 상호 비방에 칼부림에 가까운 설전을 해야 했을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두 분이 하루 속히 그토록 그리워하던 신의 품에 안기시길 기원하는 바이다. 전철 안에서 씨잘떼기 없는 내공자랑 하면서 주변사람들 신경질나게 하시는 분들은 조속히 조물주께서 거둬가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2.
허공(虛空)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배경음악과 거의 100% 싱크로율을 자랑하는 김연아의 연기는 극강내공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허공답보(虛空踏步)의 경지를 보여줬다. 사람의 능력이 어디까지일까 몹시 궁금하다.
그나저나 저 나이에 저정도의 내공을 간직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고행의 길을 걸었을까? 한편 부럽기도 하거니와 다른 한편 몹시 부끄럽기도 하다. 좀 더 정진해야겠다.
#3.
그러다보니 또 허공(虛空)과 관련하여, 이너뉏 검색을 하다보니 개념을 허공방출(虛空放出)하신 분이 보인다. 제대로 개념줄 놓고 계신 분은 다름 아니라 국가인권대사씩이나 하고 있는 제성호 중앙대 교수.
지난 15일 열렸다는 '대북 인도적 지원,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토론회에서, 인권권위자로서 인권대사직까지 수행하고 있는 이분은, 북한의 "거지근성"을 비판하면서 받을 거 받으면서 지원을 하던지 말던지 하자는 장사꾼같은 발언을 하고 있다.
인권대사라는 사람이 '인도적'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함의는 제껴두고, '인도적 지원'을 거래의 한 형식으로 파악한다는 건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다. 저런 개념줄을 가지고 인권대사라는 자리를 꿰차고 있는 거 보면, 이분은 낯짝이 K1탱크 장갑두께쯤 되는 건지, 아니면 애초부터 그런 개념조차 없는 사람이었는지 분간이 잘 안간다.
#4.
아침엔 허공(虛空)에서 우박이 쏟아지더니 날씨가 꽤나 쾌청하다. 오전 오후 계속 비온다던 일기예보는 역시 구라였던가... 일기예보를 믿느니 차라리 내 허리 통증을 믿어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독자의 눈을 즐겁게 해 주신분과 대상님들에게 감좌~
뒷편이 궁금해 넘겨봅니다. ㅎㅎ~
ㅎㅎ
저분들 덕분에 근근히 불질로 연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