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영리IT"로 시작하는 제목을 달고 있는 글을 이것까지 다섯개 연속으로 올리고 있는데, 분량 조절에 실패하지 않는한 앞으로 한동안은 내 신변 얘기로 좀 돌아가 보려 한다. 한국에서 비영리IT가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논의들이 있을텐데, 그것들이 충분히 얘기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IT인들이 말보다 "실제 행동 (혹은 코드)"를 중시하기 때문이라 해도, 생각이 뻗어나가는데 자극이 될 만한 화두를 누군가 계속 제기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1. 비영리단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앞으로 함께 협력할 여러 비영리IT 주체들과 네트워킹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면서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지난주(7월 12일)에 한 다리 건너 알고 있는 범위까지 비영리단체 혹은 사회적기업, 재단 활동가들을 초대해 비영리IT포럼 첫모임을 가졌다. 기대했던 대로 다양한 사람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활동 내용과 앞으로의 비전을 공유하는 만족스러운 행사가 되었다. 모두 열띄게 얘기하고 질문을 주고 받다보니 준비한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 지경.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비영리IT하는 여러 사람들과 만나게 될 것 같다. 평소에 만나기 어려웠던, 이질적인 사람을 만날 수록 네트워크는 넓어지고, 구성이 다채로워져서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낼 거라고 믿는다. 이런 모임들을 통해 앞으로도 계속 한국의 비영리IT가 풍성해지고, 저변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문제는 이렇게 모인 사람들끼리 어떻게 실질적으로 협력해서 사업을 진행해나갈 것인가 하는 것인데, 지금 하고 있는 구체적 사업들을 맞추어 보는 것과 함께, 좀 더 길게 내다보고 함께 구상을 할 방법은 무엇일까.
2. 네트워크를 만드는것 못지 않게 그 네트워크를 계속 활력 있게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것을 위해서 네트워크의 구성원들이 충분히 다양하게, 고르게 분포되는 것이 좋다고 본다. 비슷비슷한 사람들만 그저 많이 모여 있다거나, 특정한 지향성이 강한 세를 형성하게 되서 그것에 갇히게 된다면 네트워크가 갖고 있는 다양한 가능성들은 힘을 잃고 말 것이다.
아쉽게도 나는 한국의 비영리IT가 지금은 충분히 다양하지 않다고 본다. 많은 아이디어들이 기획되고 시도되는데, 그 자체로 좋고 어떤 것은 감탄할 만하지만, 대체로 그런 기획들을 접하고 나면 마음 한켠이 시원하지가 않다. 하나 하나 새롭고 다양한 것 같은데 계속 그렇게 접하다 보면 뭔가 쏠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어디서 오는 걸까.
가상의 분포도를 그려봤다. 이 부분만 봐서는 딱히 쏠리지도 않고 충분히 고르게,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것 같은데, 이걸 관점을 확대해서 아래 그림처럼 된다면 그때도 "고르고 다양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위 그림은 아래그림의 오른쪽 아래)
결국 어떤 것을 좌표축으로 삼나, 중심점은 어디에 두나, 몇 가지 차원에 대해 살펴보나에 따라서 다양성은 달리 평가할 수 있을텐데,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다양한 기준에 따르면 지금 기획되고 있는 많은 아이디어들이 특정한 방향에 쏠린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런 느낌을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받게 된다면, 저렇게 넓은 빈공간에서 "다양한" 것들을 해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시도조차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 느낌이 틀렸을 수도 있고, 쏠리는게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정말 쏠려 있는 건지 현상을 정확히 이해하고 싶은 것이고, 쏠렸다면 그렇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관심에서 벗어나 있지만 의미 있고 가능성이 있는 다른 영역들은 무엇이 있는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시도해볼 수 있을지 등에 대해, 다 열어놓고 생각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럼 내가 비영리IT와 관련해 생각하는 다양한 좌표축들은?
3. 비영리IT의 저변확대,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기 위해서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어떤 철학을 바탕으로 어떤 목적과 목표를 세우고, 어떤 방법들로 다가가는지에 대해 다양한 가능성들을 나열해보는 것이다. 각각의 측면에 대해 두가지 이상의 대립되는 것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비영리IT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데 주력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 있는 것들을 적용하는데 주력할 것인가, 혹은 시민운동(제3섹터)의 방식을 중심으로 할 것인가, 사회적기업(제4섹터)의 방식을 주로 할 것인가 등이다.
현실을 알면 알수록,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능력과 욕망을 알면 알수록 해야할 일, 하고싶은 일은 늘어난다.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기획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만으로도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할 지경이다. 그래도 한번 하고 말게 아니면, 계속적으로 어떤 질문들에 부딪히게 되고, 선택을 해야하는 갈림길에 직면한다. 함께 가던 사람들과 다른 의견을 갖게 되기도 한다. 나는 비영리IT에 관련해서도 이런 질문들, 선택 가능한 것들, 다른 의견들을 얘기하는 것이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비영리IT에 관한, 철학, 목적, 접근법, 목표/대상에 대해 대립되는 두개 혹은 그 이상의 가치들은 무엇이 있을까? 내가 생각해온 것만 나열해보는데 태클과 보충 기다립니다.
1) 어떤 철학이 비영리IT에 영향을 미칠까? : 철학 좌표
* 기술과 사회는 어떻게 연관되는가 : 기술결정론 VS 기술의사회적구성론
기술이 독자적인 논리로 발전하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가 아니면 기술은 그 시대의 사회적 환경, 인간들의 욕망에 맞게 만들어지는가. 스마트폰 광고를 보면, 창의적인 기술자가 세상을 바꾼다는 메시지가 자주 나온다. 확실히 새로운 기술 (상품 혹은 서비스) 들이 등장할때마다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 많이 바뀐다. 하지만 그런 기술은 어느날 갑자기, 특정한 배경 없이 사람들 앞에 등장하나? 아니면 그 사회의 권력 관계 속에서 특정한 방향에 따라 기술이 개발되는가. 기술결정론은 변화하는 사회현상들을 이해하는데는 많은 도움이 되지만, 그 내막에 대해서까지 설명해주진 못한다. 이것은 어느것이 극단적으로 옳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다만 지금 하는 비영리IT활동이 어느 이론에 좀 더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의식해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뒤에 나올 "접근법 좌표 : 제작 VS 적용"에 영향을 미친다.
* 인간을 정말 행복하게 하는 기술은 무엇인가 : 최소 기술 - 적정 기술 - 첨단/거대 기술
과학기술혁명 이후, 기술은 점차 거대해지고 첨단을 달려, 이제 작은 동네의 개인이 소박하게 뭔가 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어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렇게 거대해진 기술체계가 과연 인간을 정말 행복하게 하고 있는지. 부작용들에 대해 인간이 잘 통제하고 있는 건지. 지금보다 불편해보여도, 꼭 필요한 만큼의 기술을 소박하게 활용하는 것이 인간성을 더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한 고민.
최소 기술과 거대 기술의 중간에서, 현재 주목 받고 있는 것은 "적정 기술"이다. 양극단 사이에서 아직은 많은 것이 검토되고 채워져야 할 적정기술.
대체로, 기술결정론자일수록 첨단/거대기술에 심취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두개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결정론-공동체주의자가 적정기술의 개발 및 도입을 공동체 형성의 필수 조건으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이니.
2) 비영리IT를 왜 하려는가? : 목적 좌표
* 사회의 문제해결 VS 개인의 자아실현
현실이해를 바탕으로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행동에 옮기는 것을 스스로의 사명으로 삼는 경우가 있고,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쓰는데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하나가 더 우월하다거나 서로 꼭 배치되는 것은 아니고 둘 다 좋은 동기가 될 수 있다. 다만 오래 활동을 지속할 경우 두 가지 중 한 측면이 좀 더 강조되는 경향을 예상할 수 있다.
이 측면을 따져보는 이유는 뒤에 나오는 "접근법 좌표"와 "목표 좌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 보편적 인간 역량의 증대 VS 사람들의 약점과 결핍을 극복(가장 어려운 사람들에게 힘을)
지구상에 굶는 사람이 있을때 전지구적 식량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 다른 곳에 남는 것을 부족한 곳에 나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지향할 수도 있다. 인간의 보편적 소통 보조 기술을 개발하는 것도 의미 있고, 장애인의 접근성을 높이는 특화된 기술에 집중하는 것도 의미 있다. 이 두 가지 방향은 역시 좋고 나쁨의 문제라고 보긴 힘들다. 다만 두 가지를 함께 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3) 비영리IT를 어떻게 하려는가? : 방법 좌표
* 제작 (개발) VS 적용
지금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데 자신의 역량을 집중할 것인가 아니면 이미 있는 기술이 여러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해 적용되지 않아 생겨나는 정보격차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새롭고 진보된 기술을 개발하는 흐름도 필요하지만 사회적 불평등 구조를 그대로 두면 결국 기존의 기술을 잘 활용하는 사람이 새로운 기술도 잘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아 뜻하지 않게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기술을 적용하는데 초점을 맞춰 격차를 줄이는 것은 기술 민주화에 기여하는 바가 크지만, 사회적 불평등 양상을 단순하게 보고 일방적 복음 전파로 그치는 것은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 두가지도 모두 필요한 것이고 서로가 서로를 배우는 것이 좋다. 개발 위주의 사람이 실제로 적용을 하다 보면 좀 더 접근성이 높은 기술을 개발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고, 적용 위주의 사람은 경험을 바탕으로 더 편리한 기술을 만들려는 욕구를 갖게 된다. 다만 이것도 둘 다 동시에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 좌표가 개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제작자와 적용하는 사람이 균형을 이루고 서로 교류하며 역할바꾸기가 종종 일어나는 상태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본다. 기술결정론자일수록 제작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그 반대일수록 적용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 기술이 자연스럽게 공평하게 퍼져 나가는 것은 아니므로 나로선 극단적 기술결정론을 그 반대의 경우보다 좀 더 경계하는 편이다.
* 시민운동 방식(제3섹터 중시) VS 사회적 기업 방식(제 4섹터 고유 영역 주장)
시민운동 방식은 현실의 문제를 인식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상황을 개선해가는 과정에서 기술 활동을 도입하는 것이고, 사회적기업 방식은 새로운 기술이 기존의 것을 대체해서 문제의 양상을 전반적으로 바꾸는 것을 중시하는 것이다. 시민운동 방식의 경우 이해당사자와 일반 시민의 자발적이고 폭넓은 참여를 중시하고 속도를 중시하지 않는 반면, 사회적기업 방식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소수의 선도적인, 발빠른 행동을 중시한다.
많은 경우 제 4섹터의 활동은 기존 제1,2,3섹터가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고 고착 상태에 빠진 경우에 임팩트 있는 성과를 내며 대두되었다. 오랜 역사를 통해 얽히고 무거워진 다른 섹터들에 비해 좀 더 가볍고 과감하게 행동하면서 많은 기대를 주긴 하지만, 4섹터의 활동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생각은 위험하다. 대부분의 현실 자본주의에서 제3섹터보다는 제2섹터가 더 강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제4섹터가 점차 제2섹터(영리부문)에 치우칠 수 있는 문제, 그리고 의도치 않게 제3섹터(비영리/비정부 부문)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점, 그로 인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단기적/표면적 개선 효과만 가져올 수 있다고 본다.
제3섹터가 충분히 성숙한 환경 속에서 1~3부문간의 조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제4섹터가 새로운 접근법을 내놓는 상황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4)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려는가? : 목표 좌표
* 일반 공중을 이롭게 하는 방식 (간접적) VS 취약 계층에 특화된 활동 (직접적)
좋은 것을 만들어 누구나 쓸 수 있게 만드는 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만들때부터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맞춰서 내놓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방법 좌표축의 경우처럼 여기서도 현실적 불평등이 고려 대상이 된다. 좋은 기술, 비영리IT가 실제로 얼마나 잘 확산될 수 있는가를 고려해서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두가지도 서로 배치되는 것은 아니고 한가지를 먼저 한 다음 다른 한가지를 추가하는 식이 가능하다. 하지만 역시 먼저 하는 것에 좀 더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이후 유지보수와 업그레이드등의 문제가 있으므로 "나중에 하면 되지"라고 쉽게 생각할 부분은 아니다. 이 두가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것은 "실효성"의 판단이다.
또한 일반 공중을 이롭게 하는 방식은 그 기술과 행위가 거대하고 복잡해질 가능성이 있으며 취약계층에 특화된 활동은 좀더 작고 요긴한 무엇이 될 수 있지만 전혀 다른 부문으로 확산할때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 기술 활동 중심(기술적 대안 마련) VS 인간 행위-관계 중심(커뮤니티 , 단체, 제도)
기술을 좁게 해석할 것인가 넓게 해석할 것인가와 관련된다. 특정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으로 비영리IT활동의 범위를 정할 것인가 (최종 순간의) 인간의 행위까지 기술영역으로 포함시킬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 두가지는 배치되는 것이 아니고 함께 추진되는 것이 좋지만, 역시나 개별 주체의 한계가 있어서 역할 분담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상적인 상황은 한 가지 영역을 선택하되, 다른 영역에 대한 이해를 갖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기술결정론과 기술의사회적구성론등에 영향을 받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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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표축을 제시했으니 내 스스로 하는 활동만이라도 거기에 적용시켜 봐야겠지만, 아침이 벌써 밝아왔으니 다음으로 미룬다.
한국이 사회-문화적으로 충분히 유연하지 못하다 보니, 연관성 높은 것들끼리만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좌표들이 다양하게 조합된 활동보다는 크게 두가지의 흐름으로 분리되는 것 같다.
* 기술위주라인A : 기술결정론 - 첨단/거대기술 - 자아실현 - 역량증대 - 제작위주 - SE방식 - 일반공중 - 기술중심
* 행동위주라인B : 기술의사회적구성론 - 최소/적정기술 - 문제해결 - 약점극복 - 적용중심 - 시민운동방식 - 취약계층 - 인간행위중심
이 두 라인이 유일한 것도 아니고, 둘 중 하나가 옳은 것도 아니다. 위에서 기술결정론-공동체주의자의 예를 든 것처럼 기술결정론에서 출발하되 적정기술을 중시하고 취약계층(혹은 특정계층)을 대상으로한 비영리IT활동을 할 수도 있다. 이런 기준들을 다양하게 섞어서 기존에 하지 않던 새로운 분야/방식의 활동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이미 비영리IT를 하고 있는 주체들이 평소에 이런 얘기들을 나눔으로써, 서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쿨~하게 이해하고 가능한 협력 방안을 마련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비영리IT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문화로 정착해서 다양한 주체들이 고르게 분포하고 시너지 효과를 내기를, 그래서 비영리IT의 흐름이 증폭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