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몇달 동안 많은 걸 먹어치우고 있다. 밥도 많이 먹고 책도 영화도 노래도. 요즘은 살기가 어려워 밥은 다시 줄였다. 끼마다 두그릇 이상 먹었는데 요며칠은 한그릇으로 충분하다.
언뜻 번뜻 떠오르고 스쳐가는 생각들, 뭐 사실 대단한게 아니지만 뭔가 생각을 더 뻗어나가보면 좋을 듯한 것들이 언제나 많았고 요즘도 몇가지 있는데
거 마치 주문에 걸린 테나처럼 그것이 말이 되어 나오지 않고, 나중에 떠올려지지 않고, 저 깊은 곳에 아스라히 있는 다른 기억과 씨앗들과 연결이 되어주질 않는다.
어제는 올해 첫 일정이랄까 그런게 있었는데
도무지 이런 상태에서 사람들 만나는게 꺼려졌다.
조용히 생각을 정리할 곳이 없을까. 집은 너무 익숙한데다 따뜻하고 먹을것도 바로 옆에 있고, 컴퓨터와 볼거리들이 날 땡기고 있으니 곤란하다.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면 요즘은 너무 추워 어디론가 들어가야 하는데, 익숙하지 않고 사람 냄새나는 곳은 별로 없다. 그래서 밤 9시에 집을 나와서 또 미문동에 갔다.
역시 바깥문이 잠겨 있지만 지난번 기타 갖다 놓을 때 발견한 구멍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해킹이다. -_-V
(어이 홍, 이거 보거던 열쇠 꼭 구해달라고)
들어가보니 사람들이 왔다간 흔적이 보인다.
개굴은 폰을 놓고 간 듯 하고 (바보 -_-)
차를 끓여 마신 듯한 흔적. (좋아)
양초 세개가 놓인 테이블. 쇼파엔 충사 1권.
오면서 추위에 떨은데다 저녁을 안 먹어 배가 고프다. 그 두 가지 기본적 욕구는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반쯤 잊게 만들기 충분했다. 오다가 사온 라면을 날로 씹어 먹으며 난로를 켜고 쇼파에 앉아 있자니 점점 아무 생각도 안난다. 옆에 있는 만화책을 집어들었다. 전에는 1권이 안보이길래 나중에 보려고 했는데 오늘은 2권이 없다. 조금 보다 보면 몸이 녹겠지 싶어 1권을 보기 시작했다. 음음 흥미롭군 꽤 괜찮은데. 그러나 1권을 다 봤지만 몸은 녹지 않았다. 난로가 부실하다. -_- 끊임없는 감각의 홍수는, TV와 컴퓨터, 책, 음악, 배고픔, 외로움, 추움, 길가의 간판, 지하철의 광고와 안내메시지, 가로등, 신발의 모래, 어는 손, 만성비염으로 반쯤 막힌 코... 잠깐보다 더 긴 시간동안 내 스스로와 차분히 대면하는 걸 방해한다. 그리고 그걸 필터링하는 능력은 떨어져 있다. 오히려 특정 감각은 전보다 더 지나치게 예민해져 있는 것 같다.
결국, 지금 상황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되는데로 지껄이기" 시작하는 것 뿐이다.
말하고, 쓰고 내뱉는 그 순간 어디선가 생각들이 떠오르고 이어진다. 언제나 그렇다. 난 입력-처리-출력의 과정을 밟는 순차적 프로세서가 아니라 출력과 처리가 동시에 이뤄지는 (입력과는 분명 떨어져 있지만) "사람"임에 틀림없다. 내 블로그에 내가 만들어온 컨셉, 이미지를(그런게 있다면) 유지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출력을 뒤로 미루는 한, 머리 속의 생각은 계속 뱅뱅 돌 수 밖에 없다. "조용히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게 아니라 만나는 사람마다 되는대로 이걸 화제로 삼아 보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최근에 보고 있는 책은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
전에 본 "에코 페미니즘"과 함께 과학-기술-논리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갈아엎어준다.
두 책 모두 현대 한국의 똑똑한 남자들이 꼭 한번 봐야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앞의 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책에 더 흥미를 느낄 거지만, 뒤의 책을 먼저 아니면 그거만이라도 봤으면 좋겠다. 특히 10장 "백인남성의 딜레마 : 자기가 파괴한 것에 대한 추구"가 확 다가왔는데, 이 책은 각 장과 장이 순차적으로 꼭 연결되는 건 아니므로 이 장부터(혹은 "만") 봐도 좋겠다. 백인남성만이 아닌 한국의 잘난 남성들도 한번쯤 보고 얘기해봤으면.
이런 책들, 영화, 만화 등을 보며 내 "머뭇거림"이 더해지는데, 내가 다루고 있는 분야가 -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사회운동 -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성과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걸 새삼 느끼기 때문이다. 남성적 논리 과학기술의 정점으로도 보이는 IT. 그 생산과정에 눈을 돌릴때 역시 이대로 둬선 안된다는 조바심이 막 생기면서도 지금까지 내가 해왔거나 말하려던 것을 다시금 뒤집어 생각해볼 필요성이 느껴지니까. 근데 여기서 갑자기 연의 줄을 놓쳐 버린 것처럼 그 "뒤집어 생각"을 실제로 진전시키진 못했다. 그렇게 몇달이 지났다.
생각을 잘 정리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다른 사람이 그 생각을 완성하고 빈 곳을 메꾸는데 참여할 수 있도록 적절히 내 던지는 것과, 타이밍을 잘 잡는 것이겠지. 어쨌든 나는 "관계속의 한 접점"으로 존재하는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