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의 ‘바꿔! 지방자치’ 기획, 그런데 어떻게?
아마 새해가 되면 경향이나 한겨레에서 지방선거와 관련하여 기획기사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한겨레가 주간지를 통해 한국의 ‘풀뿌리 정치’가 어떻게 흘러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 지에 대해 고찰하는 연속기획기사를 내기로 했단다. 연속 기획 ‘바꿔! 지방자치’를 통해 격주로 10차례 관련기사를 낸다는 것인데, 첫번째 기사를 보더라도 대충할 것은 아닌 듯 싶다.
그런데 전반적인 흐름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약간 다르다. 앞으로는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첫 기사를 가지고 몇 가지만 얘기해본다.
우선 여기서는 지바지방의 예를 들어 일본의 지방자치, 시민참여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물론 지난 지방선거를 계기로 엄청난 변화가 있었기에 이를 사례로 든 것일 터이다. 하지만 불과 2-3년 전의 상황을 감안하면 취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을지... 아마 시장에 최연소 무소속 후보가 당선된 것이 계기일 터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공중파 방송에서도 다룬 바 있다. 그리고 신임시장이 된 구마가이가 혁신이라고 내세운 것은 분명 의미가 있는 것이기는 하나, 기존 정치권에서도 개인의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결코 풀뿌리 정치를 강화한다거나 진보적인 성격을 가졌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지바시의회에서는 시민네트워크가 활발하게 가동된 결과 비공개로 진행되던 시의회 상임위 회의가 공개되고 시민들이 의정에 일상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것이 과연 남미나 유럽에서 확산되고 있는 참여예산제보다 더 적극적이고 활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기사에서는 과천시의회의 서형원 의원이 진행하는 '주민과 함께하는 예산심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12월 2일 열린 2010년도 예산안을 검토하는 워크숍에 50여 명이 참여하여 과천시의회에 35억원 예산삭감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러한 시도들이 지바시나 과천시에서나 예산을 헛되이 쓰는 것을 감시하는 것에는 효과가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이상은 넘어서지 못한다. 일단 경직성 경비를 제외하면 지방정부의 예산 자체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단체장에게 압력을 가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고...
분명히 일당 지배하의 지방의회, 단체장과 지방의회가 서로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담합하는 구조에서는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당정치, 책임정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는 것은 문제라고 본다. 기사에서는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았지만, 아마 다음 기사에서는 분명히 기초의원 정당공천제의 문제점에 대해 다룰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신기하게도 조중동과 한겨레 등이 똑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정당공천제는 정략적 발상이라고 매도한다. 과연 그러할까. 이에 대해서도 좀더 검토와 논쟁이 필요하다. 지방선거에서 시민단체들이 내세운 후보들과 진보정당의 후보를 비슷한 입장이라고 치부하면서 후보단일화 등을 모색하자고 하는데, 나는 정당공천제나 선거구제와 관련된 문제가 단지 기술적인 사항만은 아니라고 본다. 이는 지방정치를 보는 근본적인 시각의 차이를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하승창 님은 주민들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주자고 한다. 글쎄다. 소위 시민네트워크의 후보라는 이들이 새로운 선택지인지에 대해서도 동의하기 어렵지만, 설사 이를 인정한다고 하고 주민들에게 선택하도록 한다고 해도 과연 주민들이 선택할까도 의문스럽다. 지금의 주민들은 지방선거를 독자적인 정치공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전체 정치 일정 속에서 파악하고 있고, 이러한 사고는 자연스럽다. 일본에서도, 그리고 유럽에서도 지방선거는 현 집권세력에 대한 유력한 중간평가 통로였다. 풀뿌리정치를 강조하면서, 이런 기능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한겨레기사에서 언급된 시민운동세력들은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지방자치에서 정치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야기한다.
지역정당의 문제의식은 좀더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아마 한국에서 지역정당이 발전할 수 있다면 지방자치가 한 단계 발전할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풀뿌리 좋은정치 네트워크’에서 지역정당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이와 함께 진보정당의 경우에도 지적할 부분이 있는데, 은연 중에 지방정치를 중앙정치의 하위에 놓는 행태가 그것이다. 이는 공직에 출마하는 이들이 기초의원-광역의원-단체장-국회의원 후보의 단계를 거치면서 급이 올라가는 반면, 그 반대로 내려가는 경우는 별로 없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지금까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서 공직에 출마했던 이들을 살펴보면 실증적으로 드러나는 사항이다. 또한 진보신당의 경우 조승수 의원이 생기기 전까지는 의석이 한석도 없어서 정당으로서 제대로 활동하기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해왔다. 다시 말하면 10여명에 달하는 지방의원들이 활동하는 지방정치는 부차적인 것으로 봐왔다는 것이다. 정당이란 책임정치를 담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인데, 물론 책임을 질 기회가 그리 많지 않기도 했지만, 책임정치의 측면에서 풀뿌리정치를 착근시키는데 진보정당들이 얼마나 기여했는지에 대해 좀더 성찰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올해는 연초에 노동법 개정이 이뤄지면서 노동관련 사안이 매우 중요한 한해가 될 것 같다. 과거 같으면 지방선거가 이를 위한 유력한 선전선동의 공간으로서 자리매김했겠지만, 올해 진보정당들이 그러한 공간을 허용할지, ‘풀뿌리 좋은정치 네트워크’가 여기에 신경을 쓸지 의문이다. 지방선거에서 이를 언급하는 것이 오히려 표를 깎아먹을 수 있기 때문에 - 왜냐하면 노동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높기 때문에 - 선거 출마자들은 이에 대한 언급을 자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방정치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그래서 올해 민주노총이 어떠한 행보를 보일지, 투쟁을 어떻게 얼마나 조직할지가 중요하다. 잘되면 최소한 진보정당의 간판을 내건 당들은 여기에 영합하겠지. 그렇지 않으면 외면할 것이고...
역시 횡설수설... 뭐, 블로그는 이런 공간이다.
생활인이 정치인 (한겨레21 2010.01.01 제792호, 지바(일본)=조혜정 기자)
‘바꿔! 지방자치’ 기획 첫 회…
평범한 주부의 눈으로 시정을 바로잡는 일본 지바시, ‘시민 추천’ 지방선거 당선자가 거의 없는 한국
“모노레일 와카바역에 엘리베이터가 없어 불편했는데, 주민들이 서명운동을 벌이고 시의원에게 계속 요구도 했어요. 결국 엘리베이터가 생겼죠. 이렇게 지방자치는 자기 생활에 밀접한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참여하지 않으면 안 돼요.” 이들의 말처럼 지바시는 주민의 참여로 최근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 2009년 6월 치러진 지바시장 보궐선거에서 정치 경력이라곤 시의원 2년이 고작인 31살의 구마가이 도시히토를 선택한 것이다. 47개 광역단체와 1771개 기초단체로 이뤄진 일본에서 단체장은 대부분 무소속이되 특정 정당 1~3곳의 지지를 받는 이들이다. 지바시는 그중에서도 보수 정당의 지지를 등에 업은 단체장이 ‘장기 집권’을 해온 대표적인 도시다. 이런 상황에서 야당인 민주당·사민당의 공동 지지를 받은 구마가이 시장이 53%에 이르는 득표율을 기록해 하야시 고지로 전 부시장(득표율 36%)을 가볍게 누르고 ‘일본 최연소 시장’이자 ‘지바시 최초의 민간 출신 시장’이 된 것이다.
그의 당선에는 풀뿌리 현안에 대한 집요한 천착과 광범위한 시민 참여가 결정적 구실을 했다. 특히 구마가이 시장은 처음으로 지바시 부채 규모를 시민에게 공개해 전임 시장과 자민당의 실정을 폭로했다. 경쟁자인 하야시 전 부시장은 63살에 어마어마한 시 부채를 방치한 책임에서 자유롭기 어려웠다. 또 구마가이는 불요불급한 대형 개발사업비 200억엔 삭감 등 재정 건전화를 가장 중요한 공약으로 내세웠다. 구마가이 시장에겐 100명이 넘는 선거 자원봉사자가 몰려들었고, 이들은 점심값 한 푼도 받지 않고 모금운동으로 선거를 치렀다. 그는 “‘정치 프로’에게 시를 맡긴 결과가 최악의 재정 상태라는 걸 시민이 알게 됐습니다. 제가 최고여서가 아니라 시민이 자신과 같은 경험, 같은 감성을 지닌 사람이 시장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선된 겁니다”라고 말했다.
시의원 때 느꼈던 문제의식을 거울 삼아 구마가이 시장은 시정 질문에 직접 답변한다. 매달 한두 차례씩 구별·연령별·주제별 주민간담회를 열어 시민이 꿈꾸는 지바시의 미래를 듣고, 자신의 계획을 설명한다. 틈이 나면 개인 블로그에 직접 글을 올려 시정과 관련한 소식이나 자신의 생각을 알리기도 한다. 정보 공유와 시민 참여가 지방자치의 핵심이라는 게 그의 소신이다. “시정 정보를 제대로 알려야 시민이 정책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고, 선거 때 올바른 정치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고도성장을 하던 때와는 다른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해요. 시민의 참여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바시의회엔 1991년부터 ‘시민 네트워크 지바’(이하 시민네트워크) 소속의 주부 출신 시의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1970년대 주부들을 중심으로 안전한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생협 운동이 그 뿌리다. 생협이 1980년대 말을 지나면서 각 지역의 환경·교육·복지 등 생활 전반의 문제로까지 영역을 확장하게 되면서 태동한 ‘지역 정당’이 바로 시민네트워크다. ‘자치하는 시민이 생활과 정치를 바꾼다’는 문제의식이 평범한 주부를 지방자치의 공간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현재 지바시의회 54석 가운데 시민네트워크 소속 의원은 모두 6명이다. 전체 정당 분포는 △자민당 21석 △민주당 9석 △공명당 8석 △공산당 6석 △새정치 지바(지역 정당) 3명 △무소속 2명으로, 의석수로는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꾸준히 의회에 진출해 거둔 성과는 적지 않다.
이들은 부적절한 의회 관행에도 제동을 걸었다. 비공개로 진행되던 시의회 상임위 회의를 공개로 바꿨다. 쌈짓돈이나 마찬가지였던 정무조사비(월급 77만엔과는 별도로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돈) 월 30만엔을 어디에 썼는지 모두 영수증을 제출하도록 했다. 의회가 열리는 날마다 지급하던 교통비 8천엔은 아예 없애버렸다. 모두 ‘시민의 눈’으로 접근했기에 고칠 수 있던 관행이었다. 시민네트워크의 하세가와 히로미 의원은 “소수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고 단체장 견제는 잘 되지도 않지만, 이런 활동이 쌓이다 보니 시민에게 인정도 받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경기 과천시의원 7명 가운데 5명은 한나라당이고 1명은 진보신당, 그리고 1명은 무소속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무소속 서형원 의원은 적지 않은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활동은 주민과 함께하는 예산심의다. 서 의원과 황순식 진보신당 의원은 당선되던 2006년 말부터 시청이 넘긴 예산안을 ‘주민참여 예산 워크숍’에서 공개하고, 이 가운데 삭감하거나 증액할 항목을 주민과 함께 논의하고 있다. 2010년도 예산안을 검토하는 워크숍은 2009년 12월2일 저녁 8시 과천 시민회관에서 열렸다. 50여 명이 모였다. 시청이 수십만원짜리 상품을 내걸고 주민을 동원하는 행사에도 100명이 채 모이지 않는 현실을 감안하면 적은 수가 아니다. 주민들은 △경주마 구입·관리 예산 3억6천만원 △‘한국방송 일본’과 ‘아리랑TV’에 내보낼 과천시 광고비 1억원 △시정자문 원고료 5천만원 등 시민 복지 향상과 무관한 예산 항목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전액 삭감’을 요구했다. 이렇게 주민 의견을 모아 삭감한 예산은 무려 35억원. 과천시의 2010년 예산 2077억원에 비하면 2%가 채 안 되는 액수지만, 과천시 전체 초등학교에 유기농 쌀을 6년 동안 공급할 수 있는 돈이다. 과천시는 서 의원의 요구에 따라 최종 결정된 예산서는 물론, 2009년부턴 심의 전 예산안까지 시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다.
지난 2008년엔 ‘친환경 상품 구매 촉진 조례’를 만들어 시청이나 공기업이 물품을 사들일 때 친환경 상품을 우선 구매하도록 했다. 과천시 내 초등학교는 모두 시 예산을 받아 무상 급식을 해왔는데, 서 의원은 식자재 중 친환경 농산물 구입 비율, 위생상태 등을 학교가 시에 보고하도록 했다. 같은 예산을 받고도 학교마다 급식의 질이 다르다는 사실을 학부모들이 확인하게 되자, ‘나쁜 급식’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이런 힘 역시 시민한테서 나온다. 서 의원은 정확히는 무소속이 아니라 ‘시민 후보’였다.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 의원이 활동하던 ‘과천 지방자치개혁연대’ 회원 400여 명은 “함께 살아온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을 후보로 내자”고 뜻을 모았고 서 의원이 ‘당첨’됐다. 과천 지방자치개혁연대는 학교 운영위원회, 생협, 공부방, 주민신문 등 지역 활동을 통해 말 그대로 ‘풀뿌리 자치’를 실천하던 주민들의 자발적인 모임이다. 시민단체라면 으레 떠올리는 ‘상근 활동가’도 없다. 과천엔 이런 풀뿌리 네트워크가 발달해 있다. 지난해 촛불 정국 최고의 ‘히트 상품’인 ‘우리 집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합니다’ 펼침막도 과천 주민들이 운영하는 공부방 ‘맑은네 방과후 학교’ 운영위원 6명이 맥주를 한잔씩 하며 “매일 광화문에 나갈 수도 없고, 뭐 방법 없을까?”를 고민하다 나온 아이디어다.
서 의원은 “지방의원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우리는 권한이 없다’는 건데, 권한이 없는 이유는 주민을 참여시키지 않아서다. 시정 질문을 하더라도 무조건 주장만 할 게 아니라 주민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 결과를 들이대거나 주민 모임에서 수렴된 요구를 내놓으면 다수당도, 지방정부도 무조건 거부하지는 못한다”며 “지방의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자치에 주민 참여를 이끌어내 자치 역량을 함께 길러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과천시는 보기 드문 ‘모범 사례’다. 전국을 다 뒤져도 서 의원처럼 ‘시민 추천’을 받아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까지 된 이는 찾기 어렵다. 광역자치단체 16곳, 기초자치단체 230곳의 단체장 가운데 ‘시민 추천’은커녕 진보정당 소속조차 단 한 명도 없다. 2006년 지방선거일을 기준으로, 광역의원 733명 가운데 진보정당 소속은 15명, 기초의원 2888명 가운데 진보정당 소속은 66명이다.
직업이나 출신 성분을 살펴보면, 지방정부와 지방의회는 ‘주민’이 아닌 ‘토호’나 ‘특정 정당과 관련성이 깊은 인사’들이 장악하는 현상이 뚜렷하다. 거대 정당이 지방정치까지 독식함으로써 주민의 요구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특히 정치인·공무원 출신이 광역단체장의 75%, 기초단체장의 73.5%에 이른다. 거대 정당이 자기 당 소속 정치인이나 당과 가까운 관료 등에게 단체장 자리를 나눠줬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의회를 살펴봐도 정치인·공무원은 광역의원의 28.2%, 기초의원의 14.4%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그 다음으로 많은 직업이 농·축산업(광역 6.4%, 기초 10.5%)과 상업(광역 6.1%, 기초 10.5%), 건설업(광역 3.7%, 기초 5.2%) 종사자다. 흔히 ‘토호’나 ‘지역 유지’로 불리는 이들이다. 반면 회사원 출신은 광역의원 2.7%, 기초의원 3.6%에 그쳤다.
서울 관악구의회는 구의원 22명 가운데 한나라당이 13명, 민주당이 8명, 민주노동당이 1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 지역은 1991년 김혜경 진보신당 고문을 구의원으로 당선시킨 이후 계속해서 지역운동가 출신의 구의원을 배출했다. 관악주민연대를 비롯한 풀뿌리 지역운동의 역사도 깊다. 하지만 시의회에서 이동영 민주노동당 의원은 22분의 1만큼도 영향력을 발휘하기가 어렵다. 구청이 일괄 구독해 동·통·반장에게 돌리는 일간지를 뜻하는 ‘계도지’ 예산도 매년 5~6억원씩 편성되지만 한푼도 깎지 못했다. 계도지로 들어오는 신문은 가끔씩 구청장·구의원의 ‘홍보성 기사’를 실어주기 때문에, 다른 구의원들이 예산 유지를 강력히 원했던 탓이다. 이 의원은 “다른 당 의원들은 나를 으레 ‘반대하는 사람’으로만 여긴다. 의회 내 다수의 힘을 누를 만한 주민의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탓”이라고 했다.
하승수 변호사는 “1991년 부활한 지방자치제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중앙의 지역주의 정당과 지역의 기득권·토호 세력이 공천과 표를 주고받으며 공생 관계를 형성하면서 주민이 지역 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하자는 애초 취지가 훼손됐다”며 “현재의 지방자치 현실은 낙제점”이라고 지적했다. 하 변호사는 또 “2010년 지방선거에선 영호남에서 한나라당·민주당 1당 지배 체제가 깨지고, 수도권도 중앙정치의 논리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려면 생활 정치를 강조하고 주민 참여를 활성화할 세력이 누구인지 (유권자들이) 잘 판단해야 한다”며 “그래야 지역정치가 발전하고 주민 생활도 나아질 뿐만 아니라 중앙정치도 개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그동안 서울 관악·마포·도봉·노원, 경기 군포, 강원 속초, 제주 등 전국에서 주민운동을 펼쳐온 이들은 2010년 지방선거에 직접 출마할 계획을 세웠다. 주민을 ‘지방정치의 주인’ 자리로 되돌려놓고, 지방자치에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할 길을 모색하겠다는 것이다. 기초의원 선거를 중심으로 후보 100여 명을 내겠다는 게 일차적인 목표다. 이들은 싱크탱크 역할을 할 ‘풀뿌리 좋은정치 네트워크’를 2010년 1월 출범시켜 환경·복지·재개발 등 생활정치 의제로 공통 공약을 만들고, 주민 자치 역량을 강화할 방안을 수립할 예정이다. ‘풀뿌리 좋은정치 네트워크’를 기획한 하승창 시민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유권자들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줘야 한다”며 “지역에서 주민운동을 했거나 지역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던 사람들이 지방의회에 진출해 토호와 정당이 왜곡한 지역정치를 진짜 풀뿌리 자치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지방정치의 주체가 변하지 않으면, 지방정치의 내용도 변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일본 지방자치총합연구소 스가와라 연구원
“지방자치가 정권 교체 이뤘다”
스가와라 도시오 연구원은 “혁신 자치체들은 자민당이 주도하는 중앙정부를 지방정부가 포위하는 구상을 했다”며 “이를 ‘인민전쟁’이라고 부른다”고 소개했다. 스가와라 연구원은 “그렇게 광범위한 지지를 얻은 배경은 생활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정치의 희망을 찾고 싶었던 주민의 마음을 잘 읽었기 때문”이라며 “이 과정에서 공산·사회당과 함께 자치노조가 중심이 돼 적극적으로 주민의 요구를 수용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혁신 자치체들은 1970년대 중반 갑작스레 몰락한다. 예기치 못한 석유 위기로 세입이 크게 줄어, 복지·환경 분야에서 늘어난 지출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조도 후원금을 모아 주거나, 조합원에게 전화를 걸어 특정 후보 지지를 호소하는 것 말고는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하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생활 의제’와 ‘주민 참여’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지 않았다. 생활협동조합 활동을 통해 환경·복지 분야에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 주부들이 ‘도쿄 생활자 네트워크’ ‘가나가와 네트워크’ 등 ‘지역 정당’을 만들거나 무소속으로 선거에 출마해 지방의회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1999년엔 도쿄도 구니다치시에서 도쿄도 최초의 여성시장이 탄생하기도 했다. 스가와라 연구원은 “민주당이 반세기 만에 중앙에서 정권 교체를 이룰 수 있었던 건 지역정당을 거울 삼아 그동안 지방에서 환경·복지·교육 등 생활 의제를 꾸준히 고민해 주민들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라며 “주민 생활과 가장 밀접한 지방자치는 중앙 권력의 변화를 이끌어낼 동력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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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의 힘! (한겨레21 2010.01.01 제792호, 도쿄·지바·요코하마(일본)=조혜정 기자)
생협운동에 뿌리를 둔 일본 지역정당들…
생활 속 문제를 정치적·정책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공감 속에 급성장
지역정당이란 우리나라처럼 ‘지역주의’에 편승한 정당이란 뜻이 아니다. 광역자치단체나 기초자치단체 단위의 지역에서만 활동하는 정당을 일컫는다. 지역정당은 말 그대로 지역 현안에 집중해 주민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가장 큰 관심을 둔다. 일본 중앙정치가 전후 반세기 넘도록 자민당·공명당의 보수연합에 지배당한 반면, 지방정치에선 비교적 다양한 세력이 활약할 수 있었던 배경엔 이런 지역정당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눈길을 사로잡는 건 ‘가나가와 네트워크’ ‘시민 네트워크 지바’ ‘요코하마 네트워크’ ‘도쿄 생활자 클럽’처럼 생협 운동에 뿌리를 둔 지역정당이다. 지역정당 가운데 가장 활동력이 왕성할 뿐만 아니라 여성, 특히 주부가 지방자치의 주인공으로 나서 ‘생활 정치’를 전파했기 때문이다.
생활클럽 생협은 세 집 이상이 공동구매를 하면 배송비를 받지 않았고, 동네마다 회원들을 모아 환경 교육도 해줬다. 자연스레 주부들이 ‘조직화’됐다. 생협 회원들의 자발적인 공부 모임도 생겨났다. 복지·교육·공동체·정치 등으로 관심 분야는 나날이 확대됐다. 1978년 마침내 “생활방식을 변화시키자”는 슬로건을 내세운 지역정당 ‘도쿄 생활자 네트워크’가 탄생했다. 이듬해 도쿄도 네리마 구의회 선거에선 지방의원도 배출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창당’과 ‘당선’이 잇따랐다.
네트워크가 지방자치 속으로 급속도로 파고들 수 있었던 건 누구나 느끼는 생활 속 문제를 정치적·정책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집에서 아이들에게 아무리 식품첨가물이 들어간 음식을 먹이지 않더라도 학교 급식이 달라지지 않으면 소용없고, 폐식용유 비누를 나 혼자 쓴다고 해서 수질오염을 막을 수 없다. 이런 문제를 가장 잘 아는 주부가 직접 정치와 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기존 정치인들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네트워크가 ‘여성의 정치조직’이라는 것도 장점이었다. 남성 중심의 부패한 정치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은 “최소한 여성들은 나쁜 짓을 안 한다”며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대감을 표시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거나 같이 장을 보면서 형성된 주부들만의 관계망이 당선에 일차적 힘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엔 다른 정당에서도 여성 후보가 종종 등장한다. 지역사회에서 전업주부는 점점 줄고 있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건 정년퇴직한 고령의 남성들이다. 네트워크로서도 새로운 지지층 확대 전략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시민 네트워크 지바’의 미와코 유아사 의원은 “위기감을 느낀다. 예전엔 생활을 이해하는 여성이 지방자치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신선하게 여겨졌지만, 지금은 (남성 후보를 내세운) 민주당도 우리처럼 ‘생활정치’를 얘기한다. 전문성을 확보하고, 역량 있는 후보를 발굴하는 게 과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네트워크가 지방의원 후보를 내보내는 구조 자체가 전문성을 강화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비판도 나온다. 네트워크는 기본적으로 의원을 주민의 ‘대표자’가 아니라 ‘대리인’으로 인식한다. 이 때문에 네트워크의 모든 회원은 선거에 출마할 수 있고, 한 사람당 당선 횟수는 2~3회로 제한하고 있다. 전문적인 역량이 쌓이더라도, 이를 발휘할 시간이 부족하단 얘기다.
또 의원들은 의회에서 논의되는 모든 사안에 대해 의견을 낼 때 네트워크 사무국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 물론 네트워크 사무국에서 의원과 회원들의 의견이 민주적으로 수렴되지만, 어느 것 하나 의원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구조는 다른 정당 의원이나 단체장에게 ‘교섭권이 없다’는 인식을 심어줬고, 가끔은 정치적으로 무시당하는 일도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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