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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3.8세계여성의 날 101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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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대회에 가고 싶었으나, 걍 참았다. 아무래도 어머니가 함께 계시면 외출이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거, 또는 아주 중요한 집회가 아니면 나가기가 거시기하기 때문이다.
작년 100주년 때에도 가지 못했는데...
아래 글은 네이버 블로그에 작년에 올렸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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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세계 여성의 날 100주년을 맞아 2008/03/04 06:42
 
올해가 여성의 날 100주년이다. 하지만 여성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기념만을 할 수는 없을 듯하다. 게다가 여성가족부는 여성부로 축소되면서 성인지 정책을 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에 투쟁기획단이 결성되어 '투쟁하는 여성의 날'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3월 8일이 여성의 날이라는 것과 그 기원이 무엇인지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런데 요새 와서는 민중운동 또한 과거 학생운동과 같이 날짜에 따라 진행되는 관성적인 투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거의 매달 있는 몇 개의 기념일에 맞춰 사업이 진행되는 것이다. 올해 여성의 날은 100주년인 만큼 조금 특별하지만, 이러한 기념일이라도 있어야 나름대로 조직의 동력을 가동할 수 있는 민중운동의 현실이 조금은 안타깝다. 물론 이런 기념일도 생까기 일쑤인 곳도 많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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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날 100주년, “기념이 아니라 투쟁으로” (참세상, 이꽃맘 기자, 2008년03월03일 17시19분)
[38 100주년] 투쟁기획단, 비정규 악법 폐기 등 요구 
 
1908년, 그리고 2008년 똑같은 요구들

1908년 전 3월 8일, 미국의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1만 5천 명의 여성노동자들이 “임금을 인상하라”, “10시간만 일하자”,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보장하라”,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달라”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100년 후 또 다시 3월 8일이 왔다. 
 
3월 8일, 여성의 날 100주년을 맞아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보장하라”, “여성들의 고용안정을 보장하라” 를 외치며 또 다시 여성들이 한 판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  '38 세계 여성의 날 100주년 투쟁기획단'은 오늘(3일) 오전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뉴코아-이랜드일반노조, 기륭전자분회, 공공노조 간병인분회 등 비정규직 노동자의 70%를 차지한다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로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여성들과 공공노조 서울본부, 민주노총 서울본부, 노동자의 힘, 노동자의 힘 여성활동가 모임, 다함께, 사회진보연대, 빈곤사회연대,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인권운동사랑방, 전국빈민연합, 전국학생행진, 사회서비스시장화저지를위한 공동대책위원회 등이 모여 ‘3·8 세계 여성의 날 100주년 투쟁기획단을 구성하고 “투쟁하는 여성의 날”을 만든다.
 
“여성에게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기 위해 노동할 권리를”

이들은 오늘(3일)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100년이니 만큼 우리 여성노동자들도 함께 축제를 말하고 즐거이 세계여성의 날을 맞이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어둡다”라고 밝혔다. 
 
정지영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장은 “100년 전 미국 방직공작 여성노동자들의 요구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외쳐지고 있다”라며 “100년이 지나도 변한 것 하나 없는 현실에서 여성의 날을 축제로, 기념하는 날로만 남겨둘 수 없다”라며 말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여성의 사회적 참여를 확대하고 여성일자리를 확충하겠다고 하지만 이는 여성을 저임금의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락시키기겠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라며 “여성의 권리는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기 위해 노동할 권리, 인간답게 살 권리, 빈곤하지 않게 살 권리이다”라고 목소리 높였다. 
  
해를 넘겨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뉴코아-이랜드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기자회견에 함께 했다. 윤송단 이랜드일반노조 여성국장은 “80만 원 받으며 일하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모는 것이 선진국으로 가는 길인가”라며 “여성들이 절규하고 싸워야 하는 사회는 절대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여성이 노동을 하며 희망을 갖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함께 싸우자”라고 말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3·8 여성의 날 100주년을 맞이해 우리는 기념에 그치는 100주년이 아니라, 이 땅의 여성 노동자들 모두가 웃는 100주년을 맞이하기 위해 투쟁할 것”이라고 선포하고 △비정규 악법 폐기 △돌봄 노동의 사회적 책임 강화, 사회서비스 노동자 노동권 보장 △최저임금 현실화, 생활임금 보장 등을 이명박 정부에게 요구했다. 
 
이들은 오늘부터 여성의 날인 오는 3월 8일까지 집중 투쟁기간으로 선정하고,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오는 5일, 6시 병원노동자 희망터에서 ‘비정규 여성노동자 이야기 마당’을 열고, 8일 오전 11시에는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서울지역 여성노동자 한마당’을 개최한다. 
 
한편, ‘민중언론 참세상’은 3·8 세계 여성의 날을 ‘집중이슈’로 선정하고 ‘3·8 세계 여성의 날 100주년 투쟁기획단’과 함께 현장 취재와 다양한 기고를 통해 집중 보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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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날을 '기념'할 수 없는 이유 (참세상, 정지영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장, 2008년03월03일 18시39분)
[38 100주년] 100년이 지나도 똑같은 여성의 삶
 
“임금을 인상하라!”, “10시간만 일하자!”,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보장하라!”
3·8 세계 여성의 날의 유래가 된 미국의 방직공장 여성노동자들의 봉기에서 나온 요구다. 그 후로 100년이 지났지만, 여성의 삶은 여전히 빈곤, 저임금, 비정규직이라는 말을 빼놓고 설명 할 수 없다.
 
지난 해 3월 8일, 바로 여성의 날에 그저 계속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면서 시청을 점거하다 무참히 강제 해산된 광주시청 청소용역 노동자은 1년이 지난 지금도 일터로 돌아가지 못한 채 투쟁을 지속하고 있다. 최저임금을 간신히 넘기는 저임금과 수시로 자행되는 해고에 맞서 2005년 8월 파업을 시작했던 기륭전자 노동자는 지금도 공장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비정규법안 시행령을 앞두고 회사의 외주 용역화 시도에 맞서 파업을 시작한 이랜드, 뉴코아 노동자도 200일이 넘게 투쟁을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몇몇 사업장만의 상황은 아니다. “최저임금 현실화하라! 생활임금 쟁취하자!”, “외주용역화 저지하고 정규직화 쟁취하자!”, “노동자성 인정하고 노조결성 보장하라!”, “빈곤과 불안정노동 양산하는 비정규악법 철회하라!” 오늘날 대다수 여성노동자들이 외치는 이 요구와 구호들은 여성노동자 전반의 현실을 분명히 말해준다. 비정규직에 맞서 싸우는 여성노동자들, 청소, 간병, 보육 등 사회를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노동을 하지만 여성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할 수 있는 손쉬운 일이라는 부당한 저평가 속에서 저임금과 해고의 위협에 시달리는 여성노동자들, 노동자로서의 권리조차 박탈당한 채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저임금, 장시간, 불안정한 노동으로 착취당하는 여성노동자들이 바로 오늘날 여성의 자화상이다.
 
'3·8 세계 여성의 날 100주년 투쟁기획단'(투쟁기획단)은 대다수 여성들이 처한 빈곤, 저임금, 비정규직이라는 현실을 제기하고자 한다.
 
여성들의 사회 참여 기회를 확대하고 일자지를 확충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이 지속되고 있지만, 이랜드-뉴코아, 기륭전자의 여성노동자들은 자신의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점점 더 많은 여성노동자들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거나 직무급제와 분리직군제 등의 ‘영원한 비정규직’이 주된 일자리 형태가 될 것이다.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정책이 지속되고 있지만, 많은 여성노동자들은 출산의 의무와 노동자로서의 착취를 모두 감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거나 가사 도우미, 간병, 노인 돌봄, 보육 등 기존에 가족에서 자신들이 하던 일을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직장에서 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결국 정부가 말하는 여성 일자리 확충이나 일-가정 양립은 자본의 이윤을 위해 여성의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이를 지탱할 수 있도록 여성이 자신의 재생산 노동의 부담을 다른 여성노동자들의 저임금 노동을 통해 줄이라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3·8 여성의 날 100주년은 축하하거나 기념해야 하는 날일 수 없다. 정부와 자본의 요구가 여성정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일과 가정 모두에서 여성노동자들의 부담과 착취를 심화시키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여성정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 또 전체는 아니더라도 일부 여성에 대해서는 확실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과연 축하할 일인가.
 
결국 여성정책의 성과라는 것은 알파걸, 골드미스, 증가하는 여성 전문직, 고위직과 같이 성공한 여성의 신화가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현실과 최저 임금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면서 다른 집의 돌봄 노동을 떠맡아야만 하는 빈곤 여성의 상황을 압도하고 은폐하는 것, 즉 자본과 지배세력의 성과다. 여성들이 이런 성과를 추켜세우는 들러리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저임금, 불안정한 노동으로 활용당하고 재생산 노동의 부담을 짊어질 선택지가 여성의 일할 권리로 둔갑하는 현실을 폭로하고 비판해야 한다.
 
따라서 오늘 3·8 여성의 날은 여성들의 투쟁의 날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권리와 현실의 요구마저 자본과 지배세력의 필요에 의해 활용당하며 빼앗겨 버린 여성들이, 다시 자신의 요구와 권리를 말하고 쟁취하는 투쟁의 날 말이다. 광주시청, 이랜드-뉴코아, 기륭전자, 간병, 보육, 청소용역, 학교비정규직, 노점상, 각자의 구체적인 상황과 요구는 다를 지라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노동자라는 이유로 억압당하고 차별받는 공통의 현실에 맞선 투쟁을 진행하려고 한다. 여성노동자들 스스로가 투쟁의 주체로 일어서고 서로 연대하면서 자신들의 부당한 현실에 맞서 싸우는 것이야 말로 여성해방을 위해 싸워 온 3·8 여성의 날의 의미와 정신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다.
 
'투쟁기획단'은 “여성 저임금, 비정규 노동 철폐! 여성노동권 쟁취! 재생산 노동의 사회적 책임 강화!”라는 요구를 중심으로 지금 이 순간 투쟁하며 노동하는 여성노동자들의 권리 쟁취 투쟁을 전 사회적으로 확대해 나갈 것이다. 3·8 여성의 날을 여성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전체 노동자 민중의 인간다운 권리를 실현하는 사회를 위한 투쟁의 날로 만드는 것, 여성/남성, 비정규직/정규직 노동자들이 여성노동자들의 요구와 목소리를 매개로 연대하는 날로 만드는 것은 '투쟁기획단'을 포함한 전체 운동의 과제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여성 저임금, 비정규 노동 철폐! 여성노동권 쟁취! 재생산 노동의 사회적 책임 강화! 
'3·8 세계 여성의 날 100주년 투쟁기획단'
 
투쟁기조
- 여성의 저임금 불안정 노동과 빈곤의 현실을 폭로하고 그에 맞선 투쟁을 조직한다.
- 여성노동자들 사이의 연대, 여성/남성,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를 형성한다.
 
주요 요구
- 여성 비정규직 심화하는 비정규 악법 폐기!
- 외주용역화 저지, 정규직화 쟁취!
- 여성 비정규 노동 고착화시키는 무기계약제, 분리직군제 반대!
- 사회서비스 노동자의 노동권 확보! 사회서비스 공공성 쟁취!
- 최저임금 현실화, 생활임금 쟁취!
- 이주여성의 노동권, 시민권 보장!
- 여성의 빈곤, 불안정 노동을 확대하는 FTA 반대!
- 여성의 삶 악화시키는 미국의 대테러 전쟁 반대, 한국군 파병 반대!
 
참가 단위
공공노조 서울본부, 금속노조 서울지부 남부지역지회 기륭전자분회, 노동자의 힘, 노동자의 힘 여성 활동가 모임, 뉴코아 노동조합, 다함께, 민주노총 서울본부, 빈곤사회연대, 사회서비스 시장화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사회진보연대,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이랜드 일반노동조합, 인권운동사랑방, 전국공공서비스노조 의료연대 서울지역지부 간병인분회,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전국빈민연합, 전국학생행진, 학생행동연대, 100주년 3·8 여성의 날 학생기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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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자의 힘을 확인하는, '세계 여성의 날' (콜론타이(러시아 혁명가) 번역: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2003.4) / 2008년03월04일 15시39분)
[3·8 100주년] 1920년 러시아, 여성의 날과 여성노동자의 날
 
이 글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저작선집(알릭스 홀트 역, Highland Park: Sun Press, 1975. 원판은 1920년 출간) 중, pp. 1-8에 수록되어 있는 글이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1920년 러시아의 1917 볼셰비키 혁명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콜론타이는 러시아의 노동자계급 여성들을 위해 다음의 팜플렛을 작성했다. 콜론타이는 여성의 날의 역사를 간략하게 묘사하고, 이 날이 여성 평등에 있어서 가지는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여성의 날 100주년을 맞아 이 글을 소개한다.
 
전투적인 기념일

여성의 날 혹은 여성노동자의 날은 국제적인 연대의 날이며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힘과 조직을 확인하는 날이다. 그러나 이 날은 여성에게만 특별한 날은 아니다. 3월 8일은 노동자와 농민, 모든 러시아의 노동자들과 전 세계의 노동자들에게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기념일이다. 1917년 이 날 2월 대혁명이 일어났다.(1) 이 혁명의 포문을 연 것은 뻬쩨르부르그의 여성노동자들이었다. 짜르와 그의 협력자들에 대해 반대의 깃발을 들 것을 처음으로 결심한 이들이 바로 이 여성노동자들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여성의 날을 이중적인 의미에서 축하해야 한다.
 
그런데, 모든 프롤레타리아의 축제일이라면, 우리는 왜 이 날을 “여성의 날”이라고 부르는가? 왜 우리는 여성노동자와 여성 농민들을 위한 기념행사와 회의를 개최하는 것인가? 이것이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연대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여성의 날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목표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어떻게, 그리고 왜 여성의 날이 조직되었는가?

불과 10년 전만 해도 여성 평등이라는 문제, 그리고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정부에 참여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는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모든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계급은 여성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다. 부르주아들은 이러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의회 내에서 노동자 계급의 표가 늘어나는 것은 부르주아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나라에서 그들은 여성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을 방해했다.
 
미국의 사회주의자들은 투표권을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1909년 2월 28일, 미국의 한 여성사회주의자가 여성노동자의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미국 전역에 걸친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다. 이것이 첫 “여성의 날”(.(2)인 셈이다. 그러므로, 여성의 날을 조직하는 일은 미국의 여성노동자들이 주도한 것이다.
 
1910년, 2차 국제 여성노동자 회의에서 클라라 제트킨(3)은 세계 여성노동자의 날을 조직하자는 의견을 제출했다. 이 회의를 통해 매년 모든 나라에서 한 날 “여성을 위한 투표는 사회주의를 향한 우리의 투쟁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도록 해 준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여성의 날”을 기념할 것을 결의했다.
 
이 시기 동안, 의회를 더욱 민주적으로 만드는 것, 참정권을 확대하고 여성의 표를 확장하는 것은 사활적인 이슈였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노동자들은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부르주아 국가에서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다.(4) 오직 여성들만 비정상적으로 투표권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은 여성들에게 국가 경제에 기여할 것을 요구하였다. 매년 직장에서 혹은 하녀나 파출부로 일하는 여성들의 수는 증가했다. 여성들은 남성과 함께 일했고, 국가의 부는 여성노동자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투표권이 없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물가가 오르자, 가장 평온했던 주부들이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갖고 부르주아들의 약탈 경제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주부들의 봉기”는 점점 빈번해졌고, 오스트리아, 영국, 프랑스, 독일로 퍼졌다. 여성노동자들은 시장의 상품 진열대를 부수거나 사악한 상인들을 위협하는 것만으로는 생계 비용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정부의 정책을 변화시켜야 하고,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참정권을 확대해야 한다. 각 국에서 여성의 날을 조직하는 것은 여성노동자들의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한 형태로 받아들여졌다. 이 날은 공동의 목표를 향한 투쟁에서의 국제적인 연대의 날, 사회주의 깃발 아래 조직된 여성노동자들의 힘을 확인하는 날이다.
 
첫 번째 세계 여성의 날

2차 국제 여성 사회주의자 대회의 결정 사항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첫 번째 세계 여성의 날은 1911년 3월 19일로 결정되었다. 이 날짜는 임의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1848년 혁명 당시, 프러시아 황제가 무장한 인민들의 힘을 인식하고 프롤레타리아 봉기의 위협 앞에서 도망친 것이 3월 19일이다. 그가 약속한 많은 것들 중 지키지 못한 것이 바로 여성들을 위한 투표를 도입하는 것이다.
 
1월 11일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여성의 날이 준비되었다. 그들은 이 날의 계획을 입에서 입으로 전했고, 언론을 통해 알려내기도 했다. 여성의 날이 열리기로 한 날에 한 주 앞서, 독일의 여성 투표권과 오스트리아에서의 여성의 날에 관한 두 개의 기사가 작성되었다. 여성의 날에 관한 다양한 기사 - “여성과 의회”, “여성노동자와 지방자자치단체의 업무”, “주부와 정치의 관계” 등 -가 정부와 사회에서의 여성의 평등에 관한 문제들을 분석했다. 모든 기사들은 여성 참정권을 확대하여 의회를 민주적으로 만드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첫 번째 세계 여성의 날 행사는 1911년에 열렸다.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여성의 날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수많은 여성들이 쏟아져 나와 바다를 이루었다. 작은 도시 곳곳에서 회의가 열렸고, 마을의 강당을 가득 채운 여성들은 노동자들에게 자리를 내어줄 것을 요구했다.
 
이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력을 확인시켜 준 첫 계기가 되었다. 남성들은 변화를 위해 아이들과 함께 집에 머물렀고, 그들의 아내들, 포로였던 주부들은 회의에 참석했다. 30,000명이 참석한 대규모 거리 시위가 열리는 동안 경찰들은 시위대의 깃발을 빼앗으려 했고, 여성노동자들은 계속해서 버텼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의회 내에 있는 사회주의자 의원들이 유혈사태를 가까스로 막았다.
 
1913년, 세계 여성의 날은 3월 8일로 옮겨졌다. 이후 이 날이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의 날이 되었다.
 
여성의 날은 필수적인가?

미국과 유럽에서 여성의 날은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어떤 부르주아 의회도 노동자들에게 양보하거나 여성들의 요구에 응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 당시 부르주아들에게 사회주의 혁명이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성의 날은 무엇인가를 달성했다. 이 날은 정치적 기회를 별로 갖지 못한 우리 프롤레타리아 자매들에게 선동의 훌륭한 수단이 되었다. 그녀들은 여성의 날을 위한 회의와 시위, 포스터와 팜플렛 신문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정치적으로 뒤쳐진 여성들도 스스로 “이 날은 우리의 날이다. 여성노동자들의 축제일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둘러 회의와 시위가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각 여성의 날 행사가 끝나고, 더 많은 여성들이 사회주의 당과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조직들은 발전했고 정치적 합의는 진척되었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날은 노동자들의 국제연대를 강화하는데 기여했다. 독일의 동지들이 영국으로 가고, 영국의 동지들은 네덜란드로 가는 등 각 국에 있는 당들은 연사들을 교환했다. 노동자 계급의 국제적인 단결은 더욱 견고해졌고, 이는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투쟁력이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성노동자 투쟁의 날의 결과이다. 이 날은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합의와 조직력이 확대되도록 했다. 그리고, 이것은 노동자 계급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싸움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이 여성의 날이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러시아에서의 여성노동자의 날

러시아 여성노동자들은 1913년에 처음으로 “여성노동자의 날”에 동참했다. 이 시기는 짜리즘이 노동자와 농민들을 옭죄고 있던 시기라서, 공개적인 시위로 “여성노동자의 날”을 기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조직된 여성노동자들은 세계적인 여성의 날임을 천명할 수 있었다. 노동자계급의 합법적인 신문들-볼셰비키의 프라우다, 멘셰비키의 Looch-은 세계 여성의 날(5)에 관한 기사를 보도했다. 이 신문들은 특별 기사, 여성노동자 운동에 참가하는 이들의 초상화, 베벨이나 체트킨(6)과 같은 동지들의 인사에 지면을 할애했다.
 
이 냉혹한 시기에 회합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 칼라샤일코프스키에서는 볼셰비키에 속해있던 여성노동자들은 “여성 문제”에 관한 공개포럼을 조직했다. 입장료는 5 코펙이었다. 이는 불법적인 회합이었지만 회의장은 가득 찼다. 당원들이 연설을 했다. 그러나 이 열띤 회의가 끝나자마자 경찰들은 경고와 함께 회의를 침탈하고 많은 연사들을 체포해 갔다.
 
짜르의 억압 하에서 살고 있었던 러시아의 여성들이 국제 여성의 날 투쟁에 어렵사리 함께 했던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러시아가 깨어나고 있으며, 짜르의 감옥과 단두대가 노동자들의 투쟁 정신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환영할 만한 신호다.
 
러시아에서 1914년 “여성노동자의 날”은 훨씬 잘 조직되었다. 두 개의 노동자 신문 모두 이 행사에 집중했다. 우리의 동지들은 “여성노동자의 날”을 준비하는 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경찰의 방해로 인하여 시위를 조직하지는 못했다. “여성노동자의 날”을 계획하는 데 가담했던 이들은 짜르의 감옥으로 넘겨졌고, 이후 많은 사람들이 차가운 북쪽 지역으로 보내졌다. “여성노동자들의 투표권을 쟁취하자”는 자연스럽게 러시아에서는 짜르의 독재권력을 몰아내자는 공개적인 요구가 되었다.
 
제국주의 전쟁 시기의 여성노동자의 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모든 나라의 노동자 계급은 전쟁의 피로 뒤덮였다.(7) 1915년과 1916년에는 해외에서 열리는 “여성노동자의 날”이 설득력이 없는 일이었다. 러시아 볼셰비키 당과 관점을 공유한 여성 사회주의자들은 3월 8일을 여성노동자들의 전쟁 반대 투쟁의 날로 바꾸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독일과 다른 나라에서 사회주의자 당의 반역자들은 여성 사회주의자들이 회합을 조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여성 사회주의자들은 국제회의 개최장소인 중립국으로 가는 여권 발급을 거부당했다. 그곳에서 여성노동자들은 국제 연대의 정신이 부르주아들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1915년에는 오직 노르웨이에서만 가까스로 국제 여성의 날 시위를 조직할 수 있었고, 러시아와 중립국의 대표자들이 참석했다. 러시아에서 여성의 날을 조직하는 것은 난폭한 짜리즘 권력과 군대 기구 때문에 생각조차 하기 힘들었다.
 
위대한 1917년이 왔다. 기아와 추위 그리고 전쟁 시도는 러시아의 여성노동자와 여성 농민의 인내심을 파괴했다. 1917년 3월 8일(구력으로 2월 23일) 여성노동자의 날, 이들은 페트로그라드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일부는 노동자, 일부는 군인의 아내였던 여성들은 “우리의 아이들에게 빵을 달라”, “우리의 남편을 전장에서 돌려보내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 중대한 시기에 조직된 여성노동자들의 시위는 짜르의 비밀 군대도 감히 평소와 같이 진압하지 못할 만큼 위협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민중들의 분노로 폭풍치는 바다를 혼란에 싸여 바라보기만 했다.
 
1917년의 여성노동자의 날은 역사적인 기념일이 되었다. 이날 러시아의 여성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횃불을 치켜들었고 세계를 격분시켰다. 2월 혁명은 이 날로 시작되었다.
 
우리의 투쟁 호소

“여성노동자의 날”은 여성의 정치적 평등을 요구하는 투쟁과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 속에서 10년 전 처음으로 조직되었다. 이러한 임무는 러시아의 노동자 계급 여성들에 의해 달성되었다.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여성노동자와 여성 농민은 투표권과 시민권을 쟁취하기 위해 싸울 필요가 없다. 그들은 이미 이러한 권리를 쟁취했다. 러시아의 여성노동자와 농민은 평등한 시민이다. 더 나은 삶을 좀더 쉽게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무기-투표권, 소비에트와 그 밖의 조직에 참가할 권리-가 그들의 손에 있다.(8)
 
그러나 권리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우리는 이러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투표권은 우리 스스로의 이익을, 그리고 노동자 공화국의 이익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하는 무기이다. 소비에트 권력 2년 동안, 삶 자체는 완전히 변화되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공산주의를 향한 투쟁을 진척시켰을 뿐이며, 여전히 어둡고 억압적인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세계에 둘러싸여 있다. 가족, 가사노동, 성매매라는 족쇄는 여전히 여성노동자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여성노동자와 여성농민은 러시아를 진정한 공산주의 사회로 만드는 데에 온 힘을 기울여야만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삶에서의 평등을 쟁취할 수 있다.
 
이를 앞당기기 위해, 우리는 우선적으로 러시아의 망가진 경제를 회복시켜야 한다. 우리는 ‘훌륭하게 조직된 노동자 군대 창설’과 ‘교통의 재건’이라는 가장 긴요한 우리의 임무를 해결하는데 신경을 써야 한다. 만약 우리의 노동자가 제대로 움직인다면 우리는 조만간 다시 한번 엔진을 돌릴 수 있고 철도는 다시 작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은 남성·여성노동자들이 죽도록 원했던 식량과 연료를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통이 복원되면 공산주의의 승리에 속도가 붙을 것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승리는 완전하고도 근본적인 여성의 평등을 가져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올해의 “여성노동자의 날”의 메시지가 “여성노동자, 여성 농민, 어머니, 그리고 자매들이여, 철도의 혼돈을 극복하고 교통을 재건하는 데 모든 노력을 다해 우리의 동지들에게 도움을 주자! 식량과 연료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모두가 함께 하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지난해 여성노동자의 날의 슬로건은 “모두가 붉은 전선의 승리를 향해!”(9)였다. 이제 우리는 여성노동자들이 새로운 무혈 전선-노동자 전선으로 결집할 것을 요청한다. 적군은 조직되고, 훈련되고,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외부의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조직화, 자기-훈련, 자기 희생과 노력을 통해서만 내부의 적- 교통과 경제의 혼란, 기아, 추위, 질병-을 물리칠 수 있다. “모두가 무혈의 노동전선의 승리를 향해!”
 
여성노동자의 날이 가지는 새로운 임무

10월 혁명은 시민권에 관한 한 여성들에게 남성과의 평등을 부여했다. 불과 얼마 전에도 가장 불행하고 억압받았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이제 소비에트 공화국에서는 타국의 동지들에게 자랑스럽게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소비에트 권력을 통해 정치적 평등으로 향하는 길을 보여줄 수 있었다.
 
여성들이 아직도 초과노동을 하던 자본주의 국가들과는 상황이 매우 달랐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여성노동자의 목소리가 매우 약했다. 노르웨이, 오스트레일리아, 핀란드, 그리고 북미의 몇 주에서 여성들은 심지어 전쟁 전에 시민권을 획득했었다.(10)
 
독일에서, 카이저가 몰락하고 “타협자”(11)들이 부르주아 공화국을 세운 이후, 36명의 여성들이 의회에 입성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는 한 명도 없었다!
 
1919년, 영국에서 한 여성이 선거를 통해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였을까? “레이디”였다. 바로 지주, 귀족이었던 것이다.(12)
 
프랑스에서도, 여성의 투표권 확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의회라는 틀 속에서 여성노동자들에게 이런 권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권력이 자본가와 유산자들의 손에 있는 동안, 어떠한 정치적 권리도 집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전통적인 노예의 위치에 있는 여성노동자들을 구출해주지 않는다. 프랑스 부르주아들은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볼셰비키 이념이 확산되자 노동자계급에게 또 하나의 빵조각을 던져주고자 했다. 그들은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줄 준비를 했다.(13)
 
부르주아 신사 양반, 너무 늦었소!

10월 혁명의 경험 이후, 프랑스와 영국 등지의 모든 여성노동자들은 오직 노동자 계급의 독재, 소비에트의 권력만이 완전하고 절대적인 평등을 가져다 줄 수 있고, 궁극적인 공산주의의 승리만이 권리의 박탈과 억압의 낡은 사슬을 끊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인식하게 되었다. 이전에 세계 여성의 날의 임무였던 여성의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을 부르주아 의회가 대신하고 있으니, 여성노동자들은 이제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는다. 제3 인터내셔널의 슬로건을 내건 싸움으로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한다. 부르주아 의회의 활동에 참여하기보다는, 러시아로부터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만국의 여성노동자여! 전 세계를 약탈하려는 자들에 맞선 투쟁에서 단결된 프롤레타리아 전선을 조직하자! 부르주아들의 의회주의를 무력화시키자! 우리는 소비에트 권력을 환영한다! 남성·여성노동자들에 대한 불평등을 타파하자! 우리는 세계 공산주의의 승리를 향해 노동자들과 함께 싸울 것이다!”
 
이 호소는 새로운 질서를 향한 시도가 한창일 때 처음으로 울려 퍼졌고, 내전의 전장에서도 들릴 것이며 다른 나라의 여성노동자들의 심금을 울릴 것이다. 여성노동자들은 이 호소에 귀기울일 것이며 올바르다고 믿을 것이다. 최근까지 그들은 만약 겨우 몇 명의 대표를 의회에 보낼 수 있다면 그들의 삶이 좀더 편해질 것이고 자본주의의 억압이 견딜만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다르게 생각한다.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소비에트 권력을 세우는 것만이 여성노동자들을 자본주의 하에서 그들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굴욕과 불평등, 고통의 세계에서 구할 수 있다. “여성노동자의 날”은 투표권 쟁취를 위한 투쟁의 날에서 여성의 완전한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즉 소비에트의 승리와 공산주의를 향한 국제적인 투쟁의 날로 바뀌어야 한다.
 
자본의 권력을 타도하자!
부르주아 세계의 유산인 여성의 불평등, 무권리, 억압을 타파하자!
양 성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투쟁에서 여성·남성 노동자의 국제적 단결을 향하여!
 
미주-----------------
1. 짜르 시대의 러시아는 여전히 중세시대의 “줄리안”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달력은 대부분의 나라들이 사용하고 있던 “그레고리”력 보다 13일이 뒤쳐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3월 8일은 구력(舊曆)으로는 2월 23일이다. 이 때문에 1917년 3월에 발생한 혁명이 “2월 혁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2. 없음
3. 클라라 체트킨은 독일의 사회주의 운동 지도자였고, 세계 여성노동자 운동의 주요한 지도자였다. 콜론타이는 성 페체르부르크의 방직 노동자를 대표하여 국제 회의에 참석하였다.
4. 이것은 정확하지 않다. 영국, 프랑스, 독일의 대다수 미숙련 노동자들은 투표권이 없었다. 미국에서도 소수의 노동자 계급 남성- 특히 이주자-만이 투표를 할 수 있었다. 미국의 남부에서는 흑인 남성은 종종 투표할 기회를 차단 당했다. 모든 유럽지역에서 일어난 중간 계급의 참정권 운동이 노동자계급의 남성 혹은 여성의 투표권을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5.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은 1903년 대회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분열되었다. 1903년에서 1912년 사이 양 파는 서로 협력했고, 잠시 동안 단결했으나 다시 분열했다. 모든 사회주의자들은 이 논쟁에서 양쪽 모두에 속하거나 중립을 지켰다. 활동적인 사회주의자이자 여성권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에 나섰던 콜론타이는 처음에는 분파에 속하지 않았으나, 몇 년 후 멘셰비키가 되었다. 그녀는 1915년에 볼셰비키가 되었고, 중앙 위원회에서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소비에트 공화국의 복지 인민위원이었고 볼셰비키 당 여성국장을 역임했다.
6. 아우구스트 베벨(1840-1913)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였다. 그는 여성운동 지지자,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에 관한 고전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7. 1914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국제 사회주의 운동은 대대적으로 분열되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의 대다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전쟁을 지지했다. 러시아의 콜론타이, 레닌, 트로츠키, 독일의 클라라 체트킨, 로자 룩셈부르크, 미국의 유진 뎁스 등 다른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에 찬성하는 사회주의자들을 노동자 계급과 노동자 혁명을 위한 투쟁의 배신자라고 비판했다.
8. “소비에트”라는 단어는 “평의회”라는 의미이다. 소비에트, 혹은 노동자 평의회는 공장과 지역의 회의를 통해 선출된 대표들로 구성되어 노동자들에 의해 통제되는 민주적인 기구이다. 소비에트의 대표는 그들의 유권자에게 보고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으며, 즉시 소환될 수도 있었다.
9. 1917년 10월/11월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후, 러시아 노동자 국가는 두 가지 큰 문제에 직면했다. 하나는 미국을 포함한 13개국으로부터 침략당한 것이고, 두 번째는 러시아의 친-군주 세력과 친-자본 세력의 저항이었다. 레온 트로츠키의 지시 하에, 소비에트는 노동자, 농민의 군대인 ‘적군’을 창설했고, 이들은 반혁명 세력을 척결했다.
10. 1차 대전에 앞서 여성들은 미국 각처에서 투표권을 얻었다. 21세 이상의 모든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연방 수정 조항이 1920년 8월 26일에 통과되었다. 196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노동 계급의 인민들이 투표하는 것을 가로막는 최후의 법적인 장벽이 무너졌다.
11. 콜론타이가 언급한 타협은 1918년 카이저가 몰락한 이후 독일에 새로운 자본주의 정부를 세운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반혁명을 지지했다.
12. 귀족출신의 레이디 아스토어가 영국 최초의 여성 의원이었지만, 최초의 의원으로 선출된 여성은 아일랜드의 혁명적인 콘스턴스 마키빅츠였다. 다른 신 페인 당의 성원들과 함께 그녀는 제국 의회에서의 자신의 자리를 거부했다.
13. 프랑스의 여성들은 결국 2차 대전 이후까지 투표권을 쟁취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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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9 16:56 2009/03/09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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