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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런던 <강철군화>를 다시 읽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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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4 08:27에 쓴 코멘트 추가보완
<강철군화>가 20년 만에 재간되었다고 하는데, 20년 전에 나왔던 것과 내용이 다른 걸까. 20년 전에 내가 읽었던 <강철군화>는 감동이었다. 그것을 소설 자본론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지만, 당시 <자본론>을 읽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그에 동의하기는 어려웠지만, 그 정도의 생각할 꺼리를 남겨두었다고나 할까.
 
아래 서평에서 장정일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나는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 그리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 책이 의미 있다고 보았다. 구 사회주의권의 붕괴 역시 그런 차원에서 볼 수 있었고... 아마 지금 다시 봐도 <강철군화>는 흥미진진할 것 같다.
 
이재유의 서평은 다시 한번 <강철군화>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 이는 레닌의 질문이기도 하였다. 이재유는 이에 대한 답을 간결하지만 너무 추상적으로 하고 있어서 붕 뜬 느낌이다. 다시 읽는다면 나는 또 무슨 생각꺼리를 얻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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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군화'의 시대…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은? (프레시안, 이재유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건국대 강사, 2009-05-16 오후 2:44:23)
[철학자의 서재] 잭 런던의 <강철군화>
 
<강철군화>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날 한국은 바야흐로 '강철군화'의 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는 나라이다. 철거민을 비롯한 도시 빈민들이 '강철군화'에 의하여 짓밟혀 목숨을 잃고, 불에 타 죽는다. 수만의 평화적인 촛불 또한 '강철군화'에 의하여 '불법'(한국의 실정법이 보장하지 못하는 인권에 대한 모든 요구는 불법으로 매도 당한다. 실정법은 자본의 이익을 최대한 낼 수 있는 한에서만 시민권을 보장할 뿐이며, 이익을 내지 못하는 모든 인간 활동은 무가치한 것이며, 그런 활동을 요구하는 행위는 모두 불법으로 취급 당한다)으로 낙인 찍히면서 무참하게 꺼져 간다.
 
0교시 수업을 없애서 졸지 않고 수업하게 해 달라는 고등학생들, 취업해서 열심히 일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대학생들, 생존의 위협을 그나마 덜 받는 정규직으로 전환해 달라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부당한 차별을 철폐하고 한국인 노동자와 동등한 대우를 해 달라는 이주 노동자들, 최소한의 이동권 보장과 차별을 철폐해 달라는 장애인들, 성 소수자들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들의 염원과 희망의 촛불이 '강철군화' 앞에 서서히 꺼져 갔다. 이러한 모든 부당한 일들은 이미 <강철군화>(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 궁리 펴냄)에게는 예견된 일이었다, 이미 100여 년 전에!
 
신자유주의라는 미명 하에 더욱 광포하고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우리 시대를 배회하고 있는 '자본'이라는 저 유령이 날뛰고 있는 이곳, 이 시점에서 과연 잭 런던의 <강철군화>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혹자들은 <강철군화>가 소설 정치경제학이니, 소설 자본론이니, 100여 년 전에 이미 오늘날 자본의 첨예한 모순을 예견했느니 하면서 이 책을 칭송(?)하거나 아니면 일종의 예언서처럼 평을 하기도 한다(마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자본주의를 딱 들어맞게 설명을 하고 있느니 또는 아니니 하는 부르주아들의 호들갑과 어딘지 모르게 무척 닮아 있다).
 
그런데 <강철군화>에 대한 이런 평들은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며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평들에는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와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평들에는 '봐! 결국 해봐야 강철군화에게 무참하게 짓밟히잖아!'라는 교묘한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잭 런던은 이러한 평들에 깔린 이데올로기와는 거리가 먼 것 같다. 그는 <강철군화>에서 먼 미래의 이야기이지만, 이미 사회주의 국가를 꼭 올 수밖에 없는 사회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소설은 미완인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꼭 마르크스의 <자본론>처럼!). 잭 런던은 20세기 초와 이로부터 700년이 지난 가상 시점 사이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남기고 있다.
 
잭 런던이 우리에게 남겨 준 과제인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바로 이것이<강철군화>가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정말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사회주의를 맞을 수 있을 것인가? 잭 런던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어니스트'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한 마리로 말한다. "권력! 우리 노동계급이 그 중요성을 항상 강조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강철군화>에서 나타난 노동계급의 권력 쟁취를 위한 실마리
그렇다면 이 권력을 어떻게 쟁취할 것인가? 처음에 잭 런던은 부르주아 의회를 장악하면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 소설 전체에 걸쳐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환상인가를 너무나 절절하게 보여 주고 있다(이런 점에서 의회주의자들은 의회 진출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의회 장악이 아니라면 고전적인 방법대로 폭력 혁명을 통해 권력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때는 우리도 힘으로 봉기하는 거지요."
"그때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선혈 속에 잠겨 있을 거요."
"그런데 지금 여러분의(필자 수정) 힘이란 게 어디에 있지요?"
 
도대체 폭력혁명을 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 즉 힘은 정말로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역사를 통틀어서 보면 대체로 그 힘이란 '강철군화' 앞에서는 찻잔 속의 태풍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혁명은 도처에서 실패했고, 사회주의권은 무너져 버렸다. 이제 그 힘을 어디서 찾아서 권력을 쟁취할 것인가? 다시 의회주의로 돌아가서 자본주의 체제만이 자신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중의 표를 통해서? 이미 잭 런던은 그것이 환상임을 자신의 소설 속에서 밝혀냈다.
 
그러면 도대체 그 힘은 어디에 있는 것이며, 또 어떻게 해야 그 힘을 현실화시켜 권력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인가? 잭 런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게다가 여자들이야말로 파업의 가장 강력한 추진 세력임이 입증되었다. 그들은 전쟁에 대해서 한사코 반대의지를 굳혔다. 그들의 남편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죽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또 그 총파업이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사람들의 기분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대중의 유머 감각에 적중했다. 그 아이디어는 전염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학교에 걸쳐서 어린이들까지도 수업을 거부했으며, 학교에 오는 교사가 있더라도 텅빈 교실로부터 집으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총파업은 거대한 국가적 야유회의 형태를 취했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총단결이라는 생각도 그처럼 확고한 증거로서 나타나고 나니까 모든 사람들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바가 컸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대대적인 놀이판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위험도 없어졌다는 점이 있었다. 모든 사람이 유죄인 판에, 어떻게 어떤 사람들만 처벌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해야 할 일 하나-여성의 해방을 위한 물질적 조건 확보
여기서는 크게 2가지가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처럼 보인다. 첫째,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신 스스로를 반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 세력으로 형성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이다. 둘째, 노동계급의 총파업을 어떻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 민중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놀이판으로 만들 것인가이다. 그런데 이 둘 중에서 선차적인 것은 첫째이다. 여성, 그리고 여성의 노동이 모든 사회적 생산의 근원지이기 때문이다. 즉 자본을 만드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생산하는 노동은 가사노동, 돌봄 노동인데, 이 노동은 성별 분업화된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에게 부과되어 있다는 것이다.
 
먼저 첫째의 할 일에 대해서 말해 보자. 첫째 할 일은 출발점은 가사노동, 돌봄 노동으로부터 여성이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 하에서의 사회화, 즉 상품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상품화를 시켜봤자 결국 여성의 몫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사노동, 돌봄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중적으로 그 부담을 여성에게 덧씌우는 것이다. 즉 여성이 자본과 임금 노동자인 남성 노동자에게 이중적인 착취와 억압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노동계급→자본이라는 먹이사슬 체제처럼 구성되어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임금은 최소한의 신체적이고 기계적인 생활만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이지만, 자본은 이 노동자가 기계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돌아오길 바라며, 노동자 역시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데, 이렇게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인간 '생산' 노동에 대해서는 단 한 푼의 임금도 지불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의 인간으로서의 자기 생산 내부에는 정치경제학적으로 부불노동(임금으로 지불되지 않은 노동)의 착취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을 가사노동, 돌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노동계급 자신 내부에서의 착취의 계기를 근절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계급의 경제주의적 경향은 여성을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오히려 여성을 더욱 더 억압과 착취의 사슬로 옭아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제주의적 경향은 개별 노동자의 임금 상승에만 초점을 두는 것인데, 개별 노동자의 임금 상승이 의미하는 바는 임금 상승에 따라서 노동자 자기 생산을 위한 더 많은 요구를 여성에게 강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착취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대 자본 투쟁은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물적 조건 확보를 위한 투쟁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예를 들어 노동계급의 모든 임단투 투쟁은 일단 아이들의 공동 양육과 공동 교육을 위한 물적 조건 확보에 맞춰져야 한다. 공동 양육과 공동 교육에 필요한 비용을 자본으로부터 쟁취해야 한다. 이렇게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될 때, 노동계급의 진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이는 노동운동이 고민하고 있는 지역운동의 활성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 둘-노동계급의 총파업을 대대적인 놀이판으로 만들기
둘째 할 일에 대해서 말하려면, 첫째 할 일과 관련한 이야기를 좀 더 할 필요가 있다. 공동 양육, 공동 교육은 철저하게 자본 교육, 제도권 교육으로서 공교육에 반대된다는 의미에서 반 자본 교육, 비 제도권 교육, 노동계급 교육으로서의 사교육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이 사교육 체제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누구와도 연대할 수 있는 창조적이고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상상력 풍부한 열린 인간을 생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이러한 인간 생산의 방법으로는 각 연령 별로, 각자 하고 싶은 영역 별로 코뮌을 형성해서 자신들이 하고 싶고, 또 해야 할 일들을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각 코뮌들이 상호 의사소통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며 자유롭게 연대할 수 있는 사회적 개인들로 자신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생산된 사회적 개인은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각 활동 단체들 속에서 활동할 수 있는 새로운 인재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자신의 부모나 누나, 형들이 파업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모든 일상생활을 잠시 접고 여행 가듯이 파업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각 코뮌 단위로 각각의 깃발 아래서 먹고 놀고 자유로이 담소를 나누면서 휴식을 가지는 파업이 될 것이다. 물론 이 파업은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파업, 나아가서 모든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파업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모든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사표를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사표 던지고 논다는데, 그것을 불법이라고 잡아 갈 것인가? 설령 잡아가더라도 감옥에는 온통 나의 동지들일 테니 그것도 괜찮은 일일 것이다. 감옥에서 놀면 될 테니까 말이다.
 
자본에 대항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본이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서 움직이는 수동적인 활동이 아니라, 자본이 무엇을 하던 간에 억압과 착취가 없는 새로운 세상을 끊임없이 만드는 일이다. 몇 푼의 임금 인상이 새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 노동계급 자신 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사악한 억압과 착취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이야말로 <강철군화>를 완성하는 길일 것이다. 또한 자매, 형제애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를 우리 노동계급의 손으로 만드는 일일 것이다.



100년 전 한 소설가의 경고…'결국 전쟁인가?' (프레시안, 장정일 소설가, 2009-03-13 오후 4:06:17)
[화제의 책] 20년 만에 재간된 <강철군화>
 
궁리에서 기획한 '잭 런던 걸작선' 가운데 1차분 세 권을 읽었다. 연번대로 나열하면 <비포 아담>(1907)·<버닝 데이라이트>(1910)·<강철군화>(1908)인데, 괄호 속은 작가가 작품을 발표했던 연도다.
 
책을 좀 읽은 내 또래의 독자들은 1989년도에 한울에서 출간된 <강철군화>의 강렬함을 아직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때 같은 출판사는 의욕적으로 <마틴 에덴>·<잭 런던 모험소설>을 연이어 펴냈고, 마지막엔 <잭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1904년 러일전쟁 종군기>까지 내놨다. 여담이지만, 잭 런던에 혹해 그 책을 번역한 역자는 "순식간에 읽고 난 후 남은 것은 허전함이었다. 아니 배반감이란 표현이 더 솔직한 감정일 것이다"라는 실망감을 역자 서문에 솔직히 적어 놓았다.
 
실제로 그 여행기는 잭 런던의 우생학적인 백인 우월주의가 고약하게 드러나 있으며, 제국주의 일본·러시아·중국에 끼어 신음하는 조선의 운명에 대한 고려가 전무하다. 행여 이 책을 찾아 읽으실 독자는, 조현범의 <문명과 야만-타자의 시선으로 본 19세기 조선』(책세상 펴냄)을 함께 읽으시라. 알고 보면 잭 런던의 기분 나쁜 '조선 관찰기'는 그만의 것이 아니라, 19세기 서양 지식인이 아시아를 바라보는 보편적인 한계였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반짝 소개된 잭 런던은 오랫동안 새로운 번역이 나오지 않다가, 몇 년 전에 잭 런던의 미완성 유고인 <암살주식회사>(문학동네 펴냄)가 출간되었다. 여담을 더 하자면, 이 소설이 쓰인 계기가 재미있다. 당대의 최고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그는 엄청나게 씀씀이가 늘어났던 반면, 스물네 살 때 첫 단편집을 낸 이래로 쉬지 않고 작품을 쓰다 보니 상상력과 소재가 고갈됐다. 그래서 돈을 주고 이야깃거리를 샀는데, 34세의 베스트셀러 작가에게 소재를 판 사람은 25세의 무명작가 싱클레어 루이스였다.
 
<암살주식회사>는 1910년 3월에 잭 런던이 싱클레어 루이스에게 70달러를 주고 샀던 열네 편의 짧은 소설 개요 가운데 하나다. 그는 개요를 받자마자 반 넘어 썼던 이 소설을 중도에 포기했는데, 사후 40여 년이 훨씬 지난 1963년에 추리소설 작가 로버트 L 피시가 결말을 완성하여 출간했다. 이 소설은 잭 런던의 화제작 <강철군화> 이후, 작가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다. 참고로 싱클레어 루이스는 훗날 미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된다.
 
▲ <강철군화>(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 궁리 펴냄). ⓒ프레시안
다시 '잭 런던 걸작선'이다. 나는 세 권의 책을 받고나서, 국내 초역된 두 권의 책이 궁금하기보다, 재간된 <강철군화>가 더 반가웠다. 그래서 <비포 아담>과 <버닝 데이라이트>를 젖혀두고 그것부터 손에 잡았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새로운 산책로보다 한번 걸어 봤던 길을 더 선호하는 법이다. 그러면서 어제는 미처 보지 못했던 구석구석과 먼 산을 다시 보는 것이다. 과연 20여 년 만에 다시 읽은 <강철군화>는 어땠을까?
 
<강철군화>가 처음 번역되었던 1989년 7월, 이 소설은 일개 문학 작품이 얻기 어려운 '소설 자본론'이란 명망을 얻었다. 그 만큼 이 소설은 소설의 줄거리보다, 소설 속의 정치·경제적 분석이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소설 자본론'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번역서가 나오고 난지 불과 몇 달 뒤인 11월, 베를린 장벽이 철거되고, 몇 년 뒤인 1991년 8월 소련이 해체됐다. 그러면서 <강철군화>는 시나브로 절판의 수순을 밟게 되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 망각됐다.
 
이 소설은 공상적 사회주의가 완성된 2632년, 우연히 발견된 미국 혁명 투사들의 기록을 발굴하게 된 형식을 취한다. 부연하면 이 소설의 시간적 무대는 사회주의 혁명 투사들이 미국의 과두지배 계급에 대항해서 일으켰던 1차 봉기가 실패하고, 새로 준비된 2차 봉기를 목전에 둔 1912년과 1932년 사이다. 소설 속의 과두계급은 의회·법원·군대는 물론이고 언론·학교·교회까지 물샐 틈 없이 장악하고 있는 독점 자본가들이다. 향후 300년간 지속될 작중의 과두계급 체제 아래서 노동자들은 절대적 빈곤·실업·산업 재해에 무방비인 채 노예로 살아가며, 언론인·지식인·종교인들은 끽 소리 없이 과두계급에 기생한다.
 
대부분의 미국 역사서를 펼치면 <강철군화>가 재현하고 있는 묵시록적인 풍경이 작가의 공상이 아니라, 잭 런던이 생존했던 시대(1876~1916)의 가감 없는 반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작가가 살았던 시대는 미국 사회가 계급사회로 분화하면서 최초의 양극화를 맞이하는 시기였으며, 독점이 가속화되던 때였다. 중산층은 나날이 몰락하고 노동자들은 빈곤에 허덕였다. 당연히 노동운동이 불타올랐으나, 독점재벌의 사주를 받은 파업 파괴자들의 총격에 쓰러져 갔고, 경찰과 언론이 그런 불법을 비호했다.
 
<강철군화>는 앨런 브링클리가 쓴 방대한 저서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휴머니스트 펴냄)에 쓰인 것처럼 "미국 역사에서 1900년에서 1914년 사이의 시기보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급진적 비판이 많은 지지를 받은 때는 없었다"(2권, 501쪽)던 그 시절에 나왔다. 하므로 이 소설은 열아홉 살 때 사회당과 처음 접촉하고 스물다섯 살 때 사회당 후보로 오클랜드 시장에 출마하기도 했던 사회주의자로서의 작가의 이력, 1860년대 초부터 번성한 폭로작가들(muckrakers)의 전통, 그리고 190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고작 10만 명도 되지 않던 사회당 지지자들이 1912년에는 100만으로 늘어났던 그 시대의 혁신주의 정신이 낳은 혼합물이다.
 
하지만 이 책을 다시 읽으며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은, 잭 런던의 사회주의적 지식과 사태 분석이 이루어낸 예언의 정확성이다. 그는 국내의 독점과 시장을 찾지 못한 잉여생산이 한 나라의 파시즘을 추동하게 되며, 출구를 찾지 못한 파시즘 세력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고 분석하면서, 미구에 있을 제1차 세계 대전을 미리 예언했다. 길지만 인용한다.
 
"(미국의) 과두지배체제는 독일과의 전쟁을 원했다. 그들이 전쟁을 원하는 이유는 열두 가지쯤 되었다. 그러한 전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국제적인 카드를 다시 섞어 새로운 조약과 동맹을 맺는 과정에서, 과두지배체제는 얻을 게 많았다. 더 나아가, 전쟁은 국가의 많은 잉여를 없애주고, 모든 나라를 위협하는 실직자 군단을 줄이고, 과두지배체제에게는 그들의 계획을 완성하여 수행할 수 있는 숨 쉴 여유를 줄 것이다. 그런 전쟁은 사실상 과두지배체제가 세계시장을 장악하게 해줄 것이다. 또한 전쟁은 해산할 필요가 없는 대규모 상비군을 창출한 것이며, 대중의 머릿속에 '사회주의 대 과두지배체제' 대신 '미국 대 독일'이라는 쟁점을 심어줄 것이다."
 
잭 런던은 1907년에 쓰고 1908년에 발표한 <강철군화>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1912년 12월 4일에 미국 공사(公使)가 독일 수도를 철수했다. 그날 밤 독일 함대는 호놀룰루를 급습해 미국 순양함 세 척과 밀수 감시선 한 척을 침몰시키고 도시를 폭격했다. 다음 날, 독일과 미합중국 둘 다 전쟁을 선포"했다고 건조하게 써놓았다. 2년 뒤에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을 거의 적중시킨 것이다.
 
이 무슨 역사의 장난이란 말인가? 20년 만에 새 번역으로 재독한 <강철군화>는 과두지배와 파시즘에 대한 20세기 초의 공포를 비웃게 하는 게 아니라, 훨씬 더 현실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이 책을 읽으며 또 다른 세계 대전을 점치는 것은 무리이겠지만, 석유와 군산업체의 이익에 휘둘린 미국 정부의 대 이라크 전쟁을 보건대, 독점과 시장을 찾지 못한 잉여생산이 국지적인 저강도 전쟁을 잦게 하리란 우려는 할 수 있다.
 
<강철군화>에 자세히 설명되었듯이 과두계급이란 한 나라의 부를 몽땅 차지한 한줌의 독점재벌과 그들의 정권을 가리킨다. 이들은 국가의 행정기관을 자신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해 주는 무료 '서비스 기관'으로 축소시키고, 국가의 사법기관을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고 불법을 무마해주는 '로펌'으로 전락시키며, 국가의 공권력은 '용역(깡패)회사'로 만든다.
 
제2롯데 월드와 삼성 에버랜드는 이들이 어떻게 국가와 정부를 '서비스 기관'으로 만들고 '로펌'으로 만들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공권력을 일개 '용역 회사'로 만드는 문제는 이렇다. 용산 참사의 경우, 지금은 경찰이 용역회사의 직원을 불러 물대포를 잠시 잡고 있으라고 했을 뿐이라고 말하지만(기껏 그게 문제 되지만), 조금 있으면 일개 '용역 회사'의 말단 계장님이 용산경찰서 서장을 불러 '너 물대포 잡아!'라고 시키게 된다. 이게 과두계급의 지배다.
 
오치 미치오의 <와스프(WASP)-미국의 엘리트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살림 펴냄)를 보면, 헤밍웨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잭 런던의 소설이 교과서에 실린 것을 알게 된 그의 어머니가 학교 이사회에 나가 "이런 책을 읽히는 것은 올바른 기독교도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항의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전후 맥락이 모자라긴 하지만, <비포 아담>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강철군화>가 '소설 자본론'이라면 이 소설은 '소설 진화론'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잭 런던은 자서전적인 소설 <마틴 에덴>이 출간된 1909년 이후, 진지한 작가 생활을 포기했다고 본다. 무명의 작가에게 작품의 소재를 양도받은 행각이 그런 심증을 갖게 하는데다가, 쓰다가 말았던 <암살주식회사>가 암살단을 만들어 비윤리적인 사업가를 한 명씩 제거한다는 '윤리적 광인'들의 순진 소박한 문제 해결에 안주하고 있지 않은가? 한때 레닌과 트로츠키를 애독자로 거느리기도 했던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문학적 후퇴다.
 
▲ <버닝 데이라이트>(잭 런던 지음, 정주연 옮김, 궁리 펴냄)
<마틴 에덴> 이후로도 잭 런던은 많은 작품을 썼지만, 타작에 불과하다는 게 중평이다. 하지만 전작에 이어지는 또 한 편의 자서전적 소설 <버닝 데이라이트>는 누구나 흉내 내고 싶은 태양 같은 남자 주인공이 나온다. 남자라면 자신의 힘으로 도시를 건설해 봐야 한다! 그런데 버닝 데이라이트는 무려 두 개의 도시를 세우고, 마지막엔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만을 위한 아르카디아를 만들어, 거기에 은거한다.
 
미혼모의 사생아로 태어나 스토우 부인과 마크 트웨인을 잇는 미국 최대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잭 런던은 '미국의 꿈'을 실현한 행운아이면서, 자신의 꿈을 스스로 거스르는 '빨갱이'가 됐다. 성공한 부르주아이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이상을 추구했던 그는 입방아를 찧기 좋은 먹이였다. 내가 본 미국 문학사는 잭 런던을 거의 난외로 처리하거나, 소략하게 다룬다. 그러면서 예의 '자기모순에 빠진 작가'라느니 '알코올 중독자'면서 '무절제한 쾌락주의자이자 나르시스트'였다는 인물평을 앞세운다.
 
이런 꼬투리는 미국의 역사 속에서 마르크시즘의 영향력과 프롤레타리아 작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원천 소거하기 위한, 강단 연구가들의 정직하지 못한 술책이다. 대체 자기모순이라곤 없으며, 술독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데다가, 무절제한 쾌락주의자이자 나르시스트가 아니었던 작가가 어느 세상에 존재하는가? 주류 미국 문학사가 떠받들고 있는 헨리 제임스·헤밍웨이·피츠제럴드·포크너도 알고 보면 더했다.
 
작가에 대한 풍문을 제거하고 나면, 훨씬 윤택해지는 텍스트가 잭 런던이다. 특히 그가 살았던 시기가 자국의 양극화와 20세기 최초의 세계화로 몸살을 전운(戰雲)을 앓던 시대였던 만큼, 그것과 똑같은 국내 문제와 21세기의 세계화를 온 몸으로 맞고 있는 우리들에겐 더욱 각별한 텍스트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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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런던 걸작선’ 미국 사회주의 싣고 오다 (한겨레,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2009-03-13 오후 09:24:19)
 
 
〈비포 아담〉잭 런던 지음·이성은 옮김/궁리·9800원
〈버닝 데이라이트〉잭 런던 지음·정주연 옮김/궁리·1만2800원
〈강철군화〉잭 런던 지음·곽영미 옮김/궁리·1만1800원 
 
잭 런던(1876~1916)은 우리에게는 <야성의 부름> <하얀 엄니> 같은 어린이·청소년용 동물 소설의 작가로 주로 알려져 왔다.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다룬 그의 또다른 대표작 <강철군화>(1908)가 1980년대 말에 번역 소개된 일은 그를 이념소설의 작가로서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은 러시아혁명의 전령사로 일컬어지는 막심 고리키(1868~1936)의 <어머니>(1907)에 견줄 만한데, 미국과 러시아에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두 작가는 어린 나이서부터 갖은 직업을 전전하며 고학을 거쳐 작가로 입신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비포 아담’ ‘버닝 데이라이트’ 국내 초역
전설의 ‘강철군화’ 혁명가 일대기 직조

체제 도구 된 사법부·언론, 변절한 노조 등 우리사회 현실에도 시사하는 내용 많아 
 
길지 않은 생애 동안 19편의 장편소설과 200여 편의 단편, 500여 편의 논픽션을 남긴 잭 런던의 문학세계를 갈무리한 선집이 나왔다. 출판사 궁리가 기획한 ‘잭 런던 걸작선’이 그것으로, <강철군화>와 <비포 아담> <버닝 데이라이트> 등 세 권의 장편을 1차분으로 선보였다. 선집은 올가을 <야성이 부르는 소리>로 이어지며, 2011년 초에 전체 일곱 권으로 완간될 예정이다.
 
1차분 세 권 가운데 <비포 아담>과 <버닝 데이라이트>는 이번이 국내 초역이다. 1907년작인 <비포 아담>은 ‘아담 이전’이라는 제목에서 짐작되듯이 원시 인류의 삶을 독특한 상상력으로 되살린 작품이다. 소설은 20세기 초 현대 미국의 한 젊은이가 꿈에서 경험하는 원시인의 흥미진진한 삶을 들려주는 형식을 취한다.
 
주인공인 ‘큰 이빨’은 원래 나무 위에 둥지를 짓고 생활하는 나무부족의 일원이었으나 의붓아비에 의해 쫓겨난다. 이웃 동굴부족의 주위를 조심스럽게 맴돌던 그는 가까스로 동굴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며 거기서 평생의 동무가 될 ‘늘어진 귀’를 만난다. 큰 이빨과 늘어진 귀는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나 허클베리 핀처럼 소년다운 모험을 즐기며 성장한다. 호랑이 ‘칼송곳니’를 놀려먹는가 하면 들개 새끼를 데려와 애완동물처럼 키우다가 잡아먹기도 하며, 통나무 둥치를 뗏목 삼아 강을 건너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기도 한다.
 
성장한 큰 이빨은 눈이 크고 코가 오뚝하며 온순한 암컷 ‘재빠른 것’을 만나 결혼한다. 그러나 동굴부족의 우두머리인 ‘붉은 눈’이 재빠른 것에 눈독을 들이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그 일이 조금 잠잠해지는 듯하자 더 큰 위험이 닥친다. 활과 화살로 무장한 ‘불부족’이 동굴부족을 공격한 것이다. 부족원들 대부분이 몰살당한 가운데, 큰 이빨과 재빠른 것은 몇몇 부족원들과 함께 살아남아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멀고 험한 여행을 떠난다….
 
<버닝 데이라이트>(1910)는 ‘해가 불타고 있어!’(Daylight is burning!)라는 말로 동료들을 깨운다고 해서 ‘버닝 데이라이트’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사내, 일럼 하니시의 이야기다. 소설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1부는 알래스카 클론다이크에서 그가 금 채굴과 밀가루 매점매석 등으로 한몫을 잡아 도시로 떠나기까지를 그린다. 2부의 무대는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1부에서 카잔차키스의 조르바를 연상시키는 야성미와 남성성의 소유자로 그려졌던 데이라이트는 “규모가 큰 포커판”(205쪽)인 캘리포니아의 재계에서 성공을 향해 내달리는 동안 냉혹한 자본가로 면모를 일신한다. “난 버닝 데이라이트야. 신도 악마도 죽음도 파멸도 두려워하지 않아”(193쪽)라는 말은 황금신 마몬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적 인물 데이라이트의 자기 선언이라 할 법하다.
 
2부의 후반부는 신데렐라적 주인공이 등장하는 멜로드라마처럼 전개된다. 자신의 사무실에서 속기사로 일하는 디디 메이슨에게 매혹된 데이라이트가 끈질긴 청혼 끝에 디디의 승낙을 얻어 내는데, 그 대신 사업을 모두 포기하고 전원으로 들어가 단순 소박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결말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글렌 엘런 농장에서 농업공동체를 꿈꾸던 잭 런던의 낭만적 이상주의가 반영된 것으로도 보인다.
 
<강철군화>는 전세계가 사회주의로 통합된 27세기에 와서 발굴된 20세기 사회주의 혁명가의 일대기 형식을 취한 소설이다. 주인공은 1912년에서 1932년까지 미국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어니스트 에버하드. 그 기간은 소설 속 현재인 27세기에서 보자면 까마득한 과거이지만, 이 작품이 발표된 1908년보다는 미래에 해당한다. 런던이 가상한 이 근미래 시점에 미국은 일곱 개의 트러스트(독점재벌)가 전체 산업과 국가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소자본가와 중산층이 몰락하는 등 사회 양극화가 심해진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부당한 대우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집회와 파업에 나서고 대중들 사이에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사회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지만, ‘강철군화’로 표현되는 과두지배체제는 군대와 민병대, 비밀경찰, 폭력단 등을 동원해 탄압한다. 지배권력의 무기가 폭력만은 아니어서, 체제와 기득권에 봉사하는 언론과 종교, 학계와 사법계의 폐해 역시 심각하다.
 
“미국의 언론은 자본가계급에 기대어 살을 찌우는 기생충들이에요. 언론의 기능은 여론을 조작해 기존 체제에 봉사하는 것이고, 그 봉사를 썩 잘해내고 있죠.”(131쪽)
어니스트의 신랄한 어조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비판 언론에 대해 운송을 중단시키고 폭도들을 동원해 인쇄시설을 불태우는 장면은 섬뜩하기조차 하다.(182~3쪽)
 
<강철군화>에서 잭 런던이 ‘예언’한 사태 가운데 한층 불길한 것은 “거대 노동조합들의 변절과 노동귀족의 생성”(231~2쪽)이다. 1937년 이 소설의 러시아어판이 나왔을 때, 트로츠키가 찬사를 보낸 것이 바로 이 대목이거니와, 대기업 노조와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의 이원화가 갈수록 심해지는 우리의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아 보인다. 이 ‘기록’에서 어니스트 등이 주도한 봉기는 강철군화의 발 아래 처참하게 짓밟히고 혁명은 일단 좌절한다. 그러나 고리키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강철군화> 역시 패배의 현실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낙관을 놓치지 않는 가운데 마무리된다.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영원히는 아니에요. 우린 배웠어요. 내일 우리의 대의는 다시 일어날 것이고, 지혜와 훈련으로 더 강해질 거예요.”(362쪽)

직공·해적 경험과 마르크스·다윈 흔적 곳곳에
■ 잭 런던의 문학은
 
잭 런던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신문배달, 얼음배달, 통조림공장 직공을 거쳐 굴 양식장을 터는 해적질을 하다가는 거꾸로 해적을 감시하는 해안 순찰대에 가담하기도 했으며, 바다표범 잡이 원양어선의 선원을 거쳐 부랑아로 떠돌다가 교도소에서 중노동을 하기도 했다. 열아홉 살 늦은 나이에 고등학교에 들어가 18개월 만에 속성으로 공부를 마치고 버클리(캘리포니아주립대)에 입학했으나 역시 집안 사정으로 한 학기 만에 그만두어야 했다.
 
이십대 초반 알래스카 골드러시 합류를 포함해 다양하고 생생한 경험은 그의 문학의 속살을 찌워 주었다. 그러나 몸으로 직접 세상과 부대끼는 동안 마르크스와 니체, 다윈 같은 당대의 첨단 사상은 순전히 독학으로 습득해야 했다. 그의 사상에 때로 일관성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비체계적이고 즉흥적인 독서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가령 <강철군화> 중 ‘꿈의 수학’ 장이 마르크스 잉여가치설의 빼어난 문학화라 할 수 있다면,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아닌 위로부터의 혁명을 밀고나가는 어니스트 에버하드의 모습에서는 니체적 초인의 모습이 만져진다.
 
올해로 탄생 200돌을 맞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 역시 런던의 소설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특히 원시 인류를 등장시킨 <비포 아담>에서 진화론의 영향은 뚜렷하게 보인다. 주인공인 현대 미국의 젊은이는 자신의 꿈에 나타나는 원시 인류의 이야기를 ‘생물학적 기억’이라고 표현한다. 유전자를 통해 뇌에서 뇌로 전달된 종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본능은 단지 우리의 유전적 형질에 찍힌 습관에 불과하”(23쪽)다. “진화가 바로 열쇠였다.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다”(29쪽)는 문장은 진화론에 대한 런던의 경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나무부족과 동굴부족, 불부족이 동일한 시간대에 존재한다는 설정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세 부족의 운명은 적자생존의 법칙과 인류의 단계별 진화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강철군화>에서는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사회 상황에 응용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과 사적 유물론의 결합이라 할 만한 형태가 나타난다. 어니스트가 사회주의의 필연성을 역설하는 대목을 보자. “기억하십시오, 진화의 물결은 결코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진화의 물결은 계속 흘러, 경쟁에서 연합으로, 작은 연합에서 큰 연합으로, 큰 연합에서 거대 연합으로, 마침내는 모든 연합들 중 가장 거대한 연합인 사회주의로 흐르게 됩니다.”(157쪽) 1896년 사회노동당에 가입했던 잭 런던은 1901년 사회당으로 당적을 옮겼다가 세상을 뜨던 해인 1916년 사회당을 탈당한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사회주의적 대의와 계급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혁명에 대한 그의 열정은 거의 사그라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성이 부르는 소리>(1903)의 성공 이후 그에게는 돈과 명예가 함께 굴러들어왔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그는 호화 농장과 최고급 요트, 포도주 양조장의 소유주로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다. <강철군화>의 과격한 혁명론과 <버닝 데이라이트>의 낭만적 이상주의 사이의 괴리는 그의 굴곡진 삶과 비체계적인 독서를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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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3 03:49 2009/05/23 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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