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2006).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정리
우석훈(2006).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녹색평론사,
작년 8월 중순에 나온 책인데 참 재미있게 읽었다. 하지만 읽고 나서 몇 군데 빼고 나면 별로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거. 정부조직에 관한 부분과 국민투표에 관한 부분.
국민투표에 대한 내용이 나온 김에 관련글을 찾아보았는데, 정당원만 국민투표 활동을 할 수 있을 뿐이란다. 그래서 이를 통해 대중적인 토론을 하는 길은 막혀 있다.
저번에 동생과 얘기한 대로 부안의 주민투표 경험을 살려서 민중투표를 해보는 건 어떨까. 이에 대해 좀더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 한미 FTA가 국민경제에 미치는 충격을 생각해본다면, 최소한 4인 가족 기준으로 연소득 6,000만원 이하의 국민들에게 한국땅은 ‘지옥’이 된다. (18쪽)
○ 한미 FTA의 경우와 같은 경제의 기조를 형성하는 정책의 경우에는 논의가 넓을수록 튼튼해지고, 다양한 문제가 제시될수록 시행되었을 때 미리 예측하지 못한 ‘부정적 효과’를 줄일 수 있다. 폭넓게 논의하는 것이 조약의 깊이와 ‘이행 가능성’을 높게 만들어줄 뿐더러, 그 자체로 한국의 협상력을 높이는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9쪽)
제1장 한미 FTA란 무엇인가
○ EU와 나프타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노동력의 국가간 이전을 포함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이다. EU와는 달리 ‘노동력의 국가간 이전’을 나프타에서는 제외하고 있다. ‘상품의 이전’이 관세철폐이고 ‘자본의 이전’이 국제투자조항에 해당한다면, ‘노동력의 이전’은 실제로 노동시장 통합과 관련된 거대한 사회경제적 흐름에 해당한다. 북미지역에서 진행된 경제통합은 상품과 자본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였지만,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까지 허용하고 있지는 않다.
만약 나프타가 EU처럼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전까지를 허용하고 있다면, 멕시코 노동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미국 국경을 넘어가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EU의 경우는 비자 없이 역내 거주민의 자유로운 이동과 이사 혹은 취업 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42쪽)
‘인적 이동의 자유’는 미리 의도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종의 안전장치로 작동한다.
유럽 국가에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가라도 이러한 통합을 통해서 사회가 붕괴되거나 기본 체계가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여러 가지 배려를 하고 지원책을 만들게 된다. 일종의 ‘상호보조’ 체계에 의한 안전장치를 확보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위험해지는 상황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착취’ 혹은 ‘기생’이 아니라 ‘공생’ 관계로 경제협력을 전환시키는 장치가 바로 ‘노동력의 이동’이다. (43쪽)
나프타의 경우 노동력의 이전을 제외하는 ‘약한 수준의 통합’이라는 장치 하나가, 실제로 상품과 자본관계에서는 충분한 이득을 취하면서도 노동력이라는 부담을 떠안지 않는, 즉 ‘일방적으로 이득을 보는’ 비대칭적 관계를 형성하였다. (44쪽)
○ 2003년 8월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채택한 소위 ‘FTA 로드맵’에 따르면 미국과의 FTA는 일본과 중국 등 한국 경제와 직접적 관계가 큰 나라 및 싱가포르 등 별로 상관없는 국가들과의 예비연습이 충분히 끝난 다음에 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61쪽)
○ 관세를 어떤 제품에 대해서 언제까지 없앨 것이고, 여기에 예외가 되는 제품은 무엇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FTA의 본질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약간의 투자자 보호와 서비스 등 특별상품에 대한 조항들이 따라붙는 정도가 될 텐데, 이것은 현재 존재하는 미국형 FTA가 아닌 FTA가 가지고 있는 기본 성격이다.
유럽도 영화 기반 정도를 지키기 위해서 ‘문화다양성협약’이라는 다자협상의 틀을 사용하지, 미국과 양자 관계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한다. 이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매우 특별한 ‘비대칭적 관계’ 때문에 그렇다. 이러한 힘을 기반으로 전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보호무역 장치를 가지고 있는 나라도 미국이다.
미국이 이 힘을 사용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협상을 이끌기 위해서 몇 가지 장치를 사용하는데, 그 가장 전형적인 장치가 ‘표준형’(standard form)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때의 표준은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니라 ‘미국 입장에서의 표준’이다. 미국은 어떤 특정한 국가에 대해서 별도로 양자협상을 만들지 않고 대개는 미국정부의 표준형을 제시하고, 이 표준형에서 약간의 수정 정도를 하게 된다.
세계은행이 제시하는 미국의 표준형과 다른 FTA와의 차이점은 “핫머니에 대한 보호, 양허상품에 대한 리스팅 방식, 그리고 지적재산권 보호 방식에 대한 공격적 규정” 등이다. 즉 관세가 아닌 ‘비관세장벽’에 대한 처리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더 ‘무식하게’ 표현하면 “미국 제품이 한국에서 팔리지 않는 것은 한국정부가 나쁜 놈이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규정한다는 얘기다. ... 국민이 하는 일은 ‘관행’이라고 하는데, 정부가 하는 일은 ‘정책’이라고 한다. 그래서 상대방 정책에 관한 일이지, 국민들의 관행에 관한 것은 아니다. (63-65쪽)
제2장 왜 한미 FTA는 준비가 덜 되었다고 하는가
○ 한미 FTA는 본질적으로는 현재의 일반관세를 두 나라 사이에서 일시적으로 사라지게 하는 조약이다. 그리고 그 기간은 DDA 협상의 연장선에서 ‘조기개방’과 관련된 관세철폐가 등장할 때까지이다. FTA는 WTO의 보완장치일 뿐이기 때문이다.
FTA라는 경제조약은 일반적으로 영구조약이 아니라 보통은 10년마다 갱신 혹은 재검토를 거치게 되는 시한부 조약인 경우가 많다. 이렇게 재검토 주기를 갖는 것은 원래 경제적 조건의 변화가 많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결정된 숫자나 정책들에 현실성을 주기 위해서이다. (71쪽)
○ 가장 황당한 것은, 이른바 ‘4대 선결조건’이라 불리는 스크린쿼터, (광우병 의혹이 여전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의약품 가격 재조정, 배기가스 규제완화 등의 사안을 한국이 협상도 하기 전에 내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결정적 협상카드를 협상도 하기 전에 내어준 꼴이었다. (정부는 그동안 이 ‘4대 선결조건’에 관한 의혹을 전면 부정해왔으나, 2006년 7월 21일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이 사실을 시인했다.) (73쪽)
○ 박정희 시대에서 노태우 시대까지 정부 내 경제팀의 골격은 경제기획원(EPB, Economic Planning Board)이 모든 것을 총괄하고, 금융경제는 재무부에서, 그리고 실물경제는 상공부에서 총괄하는 것이었다. (96쪽)
나중에 관치금융과 계획경제의 상징이 된 경제기획원이 폐지되면서 경제라인의 주축이 재무부 인맥들로 변하고, 실물경제에 대한 정부의 상황 파악능력이 극히 약화되었다. 문제는 ‘모피아’가 너무 강해졌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정부의 실물경제 파악능력이 지나치게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결정적으로 한국의 실물경제 파악능력은 IMF 이후 ‘작은 정부’를 향한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위험수위를 넘어버린다. 예를 들어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 산업 같은 부문은 김영삼 시대까지 1개의 전담과가 있었던 덩치 큰 3대 산업이었다. 그런데 IMF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정부에서도 개편이 생겨나 기초소재산업과라는 한 과가 이 모든 실물경제를 담당하게 됐다. (98쪽)
이런 변화가 한국에서만 문제를 일으킨 것은 한국정부의 독특한 ‘순환보직제’ 때문이다. 보통은 2년주기로 담당관들은 보직을 바꾸게 되고, 과내에서의 업무조정은 수시로 벌어진다. 산업에 대해 ‘이해할 만하면’ 보직을 옮기게 된다.
실물경제를 이해하느라고 잔뼈가 굵은 외국의 담당관 시스템과 한국의 순환보직제에서 발생하는 정부담당관에서의 ‘전문성’ 차이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실 특정한 몇 개의 산업, 특히 중소기업들이 경쟁하는 조그마한 산업 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정부 내에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래서 문제가 터진 다음에 담당관들이 ‘현황파악’을 하게 되는 상황이 구조화되었다. (99쪽)
현재 한국정부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면서 통합관리를 한 셈인데, 이 통합관리가 순환보직제와 결합되면서 정작 정부부처가 주무 분야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이상한 상황을 발생시킨 것이다. 금융경제는 속성상 수치로 통계들이 잘 나오고 표준화가 많이 이루어져 있으므로 구조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실물 쪽은 상황이 약간 다르다. 기술과 업계관행 그리고 국제시장의 동향과 크고 작은 흐름들에 대해서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면 정말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10년 전 담당관들은 그래도 실제 업무분량이 적었기 때문에 현황파악의 깊이가 있는 편이었지만, 최근의 담당관들은 자신이 파악해야 할 산업의 업체 이름도 잘 모르는 경우조차 종종 있다. 어차피 몇 달 안 있으면 또 다른 자리로 옮기게 될 것이므로, 굳이 파악해야 할 이유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에너지 산업만을 비교하더라도 박정희 시절에는 동력자원부의 젊은 공무원들이 미국 에너지성의 나이 많은 담당관들에 비해서 에너지 시장과 산업동향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하기가 어려웠으나, 지금 순환보직으로 움직이는 산업자원부의 에너지 담당관과 경험 많은 미국 에너지성의 하위직급의 실무자들 수준은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상황이다. (99-100쪽)
제3장 노무현 시스템의 닫힌 의사결정 구조
○ 사실 국민투표는 대통령이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려’ 부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대통령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추진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전형적 장치이다. 실제로 한국사회가 이미 ‘자애로운 호민관’의 시대를 지나버린 것은 2004년 1월 29일 주민투표법이 공표된 순간인데, 이때부터 헌법 72조가 9차 개정헌법의 최대약점이 된 셈이다.
이제 ‘87년 체제’는 하나의 근본적인 모순점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미 경주의 방폐장 유치가 공식적 주민투표로 결정된 상황에서 이보다 훨씬 큰 문제, 즉 국가적 사안에 대해서도 국민들이 발의를 원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87년 체제’의 정신대로라면 국민들이 원한다면 대통령이 그 뜻에 따라 ‘부의’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87년 체제의 호민관’인 대통령이 간절히 원해서 어떤 행정행위를 한다면 그때에는 이 시스템이 그것을 제지할 아무런 제어장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딜레마가 생긴다.
9차 개정헌법 시스템은 나름대로 균형을 갖추고 있는 헌법이라서 특정 세력이나 특정 집단이 독주하는 경우가 거의 없도록 되어 있다. 또 궁극의 심판관인 헌법재판소가 최후의 심판을 내려주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그 자체로는 괜찮은 시스템이고, 대통령도 ‘국회해산권’을 부여받고 있지 않아서 이 체계에서 특정집단 혹은 특정인의 ‘폭주’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 시스템에서 ‘폭주’가 발생하는 경우는 논리적으로 딱 두 경우이다.
첫 번째는 조직의 폭주로서, 만약 국민의 50%가 늘 좋아하는 정당이 존재하는 경우, 그들은 인물을 교체하면서 폭주할 수 있다.
두 번째의 경우는, 개인의 폭주다. 예를 들면 100%의 국민이 원하더라도 대통령이 제72조에 부여된 대통령의 부의권을 사용하지 않고 임기 말까지 특정 정책을 강행하는 경우, 개인에 의한 ‘폭주 조건’이 발생한다.
한미 FTA의 경우는 ‘87년 체제’에서 한번도 등장하지 않은 시스템 오류이다. 대통령의 폭주가 문제가 아니라 다음 호민관이 지난 시스템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일종의 ‘디버깅’ 메커니즘을 작동시킬 수 없기 때문에 문제가 어마어마한 것이다. 다음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바로 재협상을 하기도 곤란하고 또한 향후 10년간 어지간한 부작용이 드러나기 전에는 현실적으로 재협상을 추진하기가 어렵다는 점. 그 점이 ‘87년 체제’가 최악의 형태로 붕괴하는 ‘유일하고 그 경우에만 유일한(only and only if)' 시스템 다운의 조건이다.
외부적 해법으로서 9차 헌법 시스템의 파국을 피하고, 10차 헌법 시스템으로 대한민국이 성공적으로 진화할 수 있는 논리적 조건은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한미 FTA의 직․간접효과들이 국민경제에 치명적 타격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미미할 경우다. 매우 가능성이 희박한 가정이지만, 한국이 일본보다 개방도가 훨씬 높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국민경제가 다행히도 플러스 성장을 5년간 유지하거나 경제의 토대가 붕괴하지 않을 가능성이 존재하기는 한다. 미국이 한국을 ‘진정한 경제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다면, 파국은 면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다음번 ‘호민관’ 혹은 그의 그룹이 한미 FTA 체결을 ‘대선’ 기간까지로 연기하는 데 성공한 경우이다. 사실 현재와 같은 대통령의 폭주가 시스템 붕괴로 이어지는 이유는 ‘결정의 시기’와 ‘책임의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시간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국민경제의 운용을 책임져야 한다면 협상문에 한 조항이라도 제대로 집어넣으려고 최선을 다할 것인데, 현재의 시스템은 단선제 조건 때문에 절대로 자신이 책임질 일이 벌어지지 않음으로 인해, 시스템적으로는 억지로 필요한 조항을 만들어야 할 강력한 동기가 발생하지 않는다.
세 번째는, 국민들의 직접행동이 발생하는 경우이다. ‘87년 체제’가 물리적 저항을 비롯한 일체의 국민 직접행동권을 시스템 내부에서 허용하지 않으므로, 이 조건 역시 ‘외부조건’에 해당한다.
시스템적으로 해석한 한미 FTA는, ‘87년 체제’에서 ‘디버깅이 불가능’한 대통령의 ‘폭주’가 ‘특수한 외부조건’과 결합되어 결국 시스템이 붕괴하게 된다. 가장 쉽게 시스템 오류를 벗어나는 방법은 대통령이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인데, 어찌해볼 방법이 없다.(143-150쪽)
○ 2005년 7월, 쌀협상에서의 이면계약 이후, 뭔가 자꾸 감추려는 정부에 대해서 국회는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 ‘통상절차법’이 발의되었는데 아직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현재로서는 국회가 한미 FTA에 대해 ‘형식적 비준’이라는 전례를 따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와중에 외교부는 미국정부와 ‘한미 FTA 비공개’ 원칙을 결정해 버렸다.
이 문제의 본질적 핵심은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다”에서 국회가 ‘외부’에 해당하느냐라는 문제이다. 국회의원과 국회사무국의 통외통위 담당관들은 모두 정부 직제절차에서 담당관에 해당한다. 너무 중요한 것이라서 국회의원 전부한테는 보여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통외통위에는 공개하는 것이 옳다. 세상에 자국 국회에 “당신들은 외부”라면서 협상안을 감추는 나라가 대한민국 외에 또 존재할까.
더 이상한 것은 비공개의 이유가 ‘미국의 요구’라는 점이다. 미국은 국회의원은 물론이고 각종 협회를 통해서 주요 업체로부터 체계적인 의견서를 받아들고 본협상에 임한다. 심지어 한국에 있는 미국 기업들도 이미 보았을지도 모르는 한국의 초안 기본 내용들을 한국 국회의원들에게 안 보여주겠다는 게 말이 되는가? (161-163쪽)
○ ‘무오류 집단최면 시스템’이 끝까지 간 것이 스탈린 시스템이다. ‘당의 무오류성 원칙’과 ‘민주집중제’, 즉 전체가 선택하고 일단 선택한 것은 모두가 따른다는 두 가지 원칙이 결합되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는지 인류는 이미 경험했다. 황우석 사태와 SBS의 사과를 통해 한국사회는 ‘국익’으로 작동하는 집단최면 시스템에 한번 제동을 걸었다.
황우석 사건과 한미 FTA는 게임의 관점에서는 비슷한 구조다. 국익이라는 척도로 국민을 몰아가는 구조도 같고, 김병준 전 실장과 같은 ‘측근’들이 주도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같다. 그리고 워낙 기술적인 논의라서 일반적 관찰자들이 내용에 대해서 깊게 관여하기 어렵다는 점, 국민들이 조금씩 가지고 있는 편견에 기생한다는 점도 같다.
그러나 소소한 차이점이 몇가지 있기는 하다. 근본적으로는 자연과학과 경제학의 차이 때문이다. 자연과학과 달리 경제학은 증명이 어렵다. 경제학에는 실험이 없고, 만약 계산에 실패했을 때에는 자신이나 기업 하나만을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 혹은 인류 전체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 (166-167쪽)
천하의 황우석 박사 실험실에서도 내부 고발자가 나왔지만, 김병준 전 정책실장과 같은 ‘사과 없는’ 닫힌 모델에서는 내부 고발자가 나올 가능성은 없다. 한미 FTA라는 게임은 경제학이 가지는 구조적 약점인 ‘사후약방문’을 그대로 발현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169쪽)
제4장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철학적 질문
○ 박정희 시절의 경제모델도 복잡하다. ‘시그널 경제’라고 불리는 독특한 계획경제를 운용하던 프랑스의 드골 경제계획모델과 정부가 직접 외부재원 할당역할을 수행하는 이집트형을 결합시키고, 세계은행의 ‘경제도약’에 관한 권고를 결합시키면서 그야말로 ‘유신경제’라고 부를 수 있는 한국형 경제시스템이 탄생했다. 그리고 경제의 원천기술은 일본 기업으로부터 주로 도입하였다. 세계은행에서 나름대로 그 성과를 평가받던 이 시스템은 IMF 경제위기로 인해 일본보다 높은 실물경제 개방도와 세계 최고수준의 금융시장 개방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해체됐다. 노무현 정부가 경제권을 넘겨받은 순간에 한국 경제의 상황이 이미 그랬다. (185-186쪽)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경제의 장기적 모델에 대한 논의가 공개적으로 진행된 적은 없었다. 이 혼란스러운 기간 동안에 실물경제는 계속해서 위기로 빠져들게 된 셈이다. 그 기간 동안에 수행된 금융정책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수준의 저이자율 정책으로 대표되고, 재정정책으로는 이헌재의 ‘한국형 뉴딜’과 박현채 선생의 제자들이 만들어낸 ‘균형발전’이라는 이름의 ‘불균형 성장전략’이 결합되어 일종의 ‘케인즈 우파’ 정책이 수행되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되었을 때 거시경제에서 생길 수 있는 긍정적 효과라면, 시장에 과다 투입된 자금에 의한 ‘투자진작’과 재정효과에 의한 ‘경기진작’ 효과일 것이다.
그런데 시장에서는 긍정적 효과보다는 전국적인 부동산 가격 상승에 의하여 투자자금이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가는 ‘가장 나쁜 효과’가 먼저 발생했다. 가장 표준적인 경제학 용어로는 특정 정책의 부작용으로 가격 변화에 의한 재산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토지를 통한 부등가교환’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186쪽)
○ 문제는 어느 나라의 모델을 채택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 고민했던 것과 같은, ‘포괄적 방향’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없었던 것이 근본적인 문제였다. 따져보면 유신경제와 ‘이헌재 경제’의 차이점은, 유신경제에는 정부의 경제운용은 프랑스식으로 하고, 기술체계는 일본식으로 하고, 생태관리는 독일식으로 한다는 몇 가지 기본기조에 있었는데, 이헌재 경제는 “무조건 성장한다” 외에는 별 정책기조가 없다는 점이다.
시스템이라는 관점에서 따져보면, 유신경제의 점차적 해체 이후 ‘혼자 하는 결정’이 아니라 ‘같이하는 결정’으로 소위 철학적 논의의 시스템이 바뀌는 과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결정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이것이 한국 경제 위기의 근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결정할 수 없었던 것은 ‘논의’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고, 이러한 면에서 이헌재 경제의 어려움은 ‘철학의 부재’ 혹은 ‘철학적 논의의 부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88쪽)
제5장 한미 FTA, 주요 체크 포인트
○ 현재 한미 FTA는 외교부가 거의 완벽하게 국회의 눈을 가리고 진행하는 일이므로 지금처럼 진행된다면 국회에서 비준동의권이 제대로 행사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아마 시간을 끌다가 ‘브리핑’이라는 형태로 몇 쪽짜리 간단한 표로 설명하고 국회 통외통위를 형식적으로 거치게 될 것이다.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어 몇 명의 의원 발언 시간이 주어지겠지만 본회의에서 부결되는 국제조약은 한국에서는 현실적으로 거의 없다. 정부안 원안이 그냥 통과될 것이다. 발효와 관련법 제정 등의 절차가 거의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고, 현재 정부가 제시한 일정대로라면 이 일은 2007년 6월 정도에는 종료된다.
미국 의회의 비준 때문에 6월에 맞춘 현재의 협상구조상 우리 국회에서 비준권을 행사해서 원안을 재협상하도록 만드는 일은 발생하기 어렵다. (211쪽)
그러므로 다른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 국민투표가 그것이다. 헌법 제72조가 규정하고 있는 대로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인정”하여 한미 FTA의 비준을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주요정책”으로 국민투표에 부치는 것이다.
하지만 ‘87년 체제’에서는 국민투표가 한번도 실시된 적이 없다.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한미 FTA의 경우, 사실 레퍼렌덤이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즉, 국민투표 자체가 국제협상에서 자국의 협상력을 높이는 효과를 가진다. 협상과정 혹은 비준과정에서 일종의 ‘국민 비준권’을 활용하는 것은 포괄적인 경제통합 협상에서는 일반적인 일이며, 미국과의 FTA 협상과정에서 스위스가 이미 활용한 전례가 있다.
국제협상은 성사 여부보다도 ‘어떤 합의’를 이룰 것이냐가 사실 본질적인 문제이다. 많은 단서 조항과 부문별 보호장치를 만든다면 사실 한미 FTA가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경제조약을 맺더라도 오히려 국가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 정부가 제시하고 있는 것과 같은 형태의 FTA이다.
불편해보여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차이’를 사회갈등으로 전환시키지 않는 방법이 바로 투표이다. 또한 이러한 국민비준권은 협상단에게 협상력을 획기적으로 높여주는 가장 중요한 협상전략이 될 것이다. 국민을 설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협상을 해서 그 정도면 충분히 경제적 실익이 있겠다고 납득하도록 하는 것이다. (212-213쪽)
○ 현재의 일정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실제로 한미 FTA로 벌어질 일들은 차기 대통령의 재임기간에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결과를 뒷수습하고 국제적으로는 관례가 별로 없는 ‘조기재협상’과 같은 부담이 다음 대통령으로 넘어간다는 의미다. (215쪽)
○ 경제통합의 단계를 구분한다면, 상품과 자본, 그리고 인력이라는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상품은 일반관세의 폐지, 자본은 해외투자자본에 대한 보호, 그리고 인력은 ‘자유로운 이동’이라는 척도가 국제협약의 기본이다.
그런데 그 이름이 아무리 복잡하고 절차가 까다로워도 미국은 상품과 자본에 대한 협상으로 끝을 내고, 절대로 인력에 대한 협상은 열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야 한국 시장에서 이익만을 챙기고 한국 경제의 붕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는 최적조건이 구성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이 캐나다와 멕시코와 체결한 나프타가 그런 협상이다. 반면에 유럽 국가들끼리 체결한 EU 협상은 노동시장의 이전까지를 포함하기 때문에 훨씬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고 상대국가를 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시장을 연계했는데, 무역 상대국이 붕괴하게 되면, 그 사회 붕괴의 책임을 자신도 공동으로 져야 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224쪽)
→ 사실 이 논리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노동시장 개방은 노동자들에게 유리한가? 게다가 미국과 한국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면... 또한 인간의 얼굴을 하면 FTA는 괜찮은 것인가? 요새는 우석훈 교수도 이 얘기는 하지 않는 듯 하던데...
제6장 양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 한미 FTA로 인하여 더 가난해지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더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좋은 FTA'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좋은 FTA는 우리에게 없다.”
지금 해야 할 것은 분야별로 다양한 테이블을 열고, 최소한 “소외되는 국민이 없도록 하겠다”는 협상 입장을 정하고, 국민과의 다양한 대화를 시작하는 일이다.
정부가 친절해지면 국민들의 살밍 나아질까? 물론 그렇다. ‘작은 정부’나 ‘정책 절차에 대한 개방’ 같은 요구들도 사실상 정부가 국민들에게 보다 친절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선진국에서 만들어낸 장치들이다.
‘좋은 FTA'는 가능할 수도 있지만, 지금의 구조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논의를 열고, 이렇게 열어놓은 논의에 최소한 ‘동네 미장원’과 ‘동네 빵집’을 대변하는 사람들 정도까지는 참가하게 도와주고 지원하는 것이 타당하다. (256-258쪽)
○ 내가 정치학자나 사회학자라면 ‘국민 직접행동’이나 ‘맥락의 소통’ 혹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 등에 대해 더 많은 분석을 하겠지만, 경제학자로서 내가 한미 FTA의 솔루션으로서 이 사회에 제시할 수 있는 것은 국민투표 정도이다.
국민투표에 적지 않은 비용이 들 것이고, 전사회적 찬․반 토론과 상호 설득에도 상당한 사회적 비용이 들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한미 FTA가 우리 사회에 미치게 될 ‘포괄적 영향’에 비하면 국민투표에 드는 비용은 훨씬 저렴한 것이 될 것이다.
만에 하나 이 비용이 국민경제가 감당하기에 너무 커서 국민투표를 할 수가 없다면, 2007년 12월로 예정되어 있는 대선에 ‘한미 FTA 국민투표’를 연계시키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기왕 사용하는 투표용지에 기표란 하나만 추가하면 되는 일이니까 추가 비용은 거의 들지 않는다. (259-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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