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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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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장편소설. 아랑은 왜. 문학과 지성사. 2001.

 

르귄의 SF 소설 헤인의 세계 시리즈를 현충일에 읽느라 중간에 쉬는 바람에 하루 이틀이면 읽을 책을 며칠 끌어서 읽었다.

김영하의 장편소설 [아랑은 왜]는 여느 장편소설과는 다르다. '소설을 이렇게 쓴다'라는 과정을 보여준달까. 소설이나 시나리오 같은 것을 써볼 생각이 있는 이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겠다. 이런 형식의 소설도 그래서 처음 읽어 본다. 그 만큼 색다르다. 물론 소설책은 그리 많이 읽어보지 않아서...

 

여기저기 인용을 많이 하는 폼이 재미 없지 않나 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흥미진진하여 이야기꾼으로서 김영하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원래 이책은 인터넷에 연재하면서 이를 읽어나가는 이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가면서 이를 반영하여 지었다고 한다. 그런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소설은 세 가지 이야기 축으로 구성된다. (스포일러 무자게 많음)

 

하나는 당연히 과거 아랑의 전설을 둘러싼 것이다. 하지만 아랑의 얘기는 부차적이고 아랑과 그와 관련하여 죽은 전임 사또 2명의 죽음을 파헤치는 김억균이라는 종8품의 의금부 낭관(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이 중의 하나이다)과, 그와 함께 온 어사 조윤, 가해자로 설정된 호방, 사건을 해결한 영웅으로 전설에서는 묘사된 이상사라는 신임사또가 풀어나간다. 여기서 김억균은 이야기의 화자답게 근대적 의미의 탐정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아랑이 결국은 밀양부사라는 양반집 딸이 아니라 호방의 딸이자, 밀양부사의 첩으로 밝혀지는 것도 의외다.

 

다른 하나는 작가였다가 번역일을 하는 '박'이라는 사내와 미용사 '영주', 그리고 그 사이에 개입된 '아랑'이라는 유령의 얘기이다. 여기서는 '박'이 영주를 죽이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 얘기를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김영하는 이를 과거의 아랑의 얘기와 엮으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글쎄다.

 

마지막으로 작가인 나가 이 두 개의 이야기를 어떻게 엮어나갈까를 고민하는 얘기이다. 그래서 아랑의 얘기에 출연할 배우도 오디션하고 그가 할 역할에 대해 논의하기도 한다. 그리고 위의 사건들을 이렇게도 구성해보고, 저렇게도 구성해보고... 보통은 그 중에서 잘 되었을 만한 것을 하나만 제시하여 풀어나갈 텐데, 이런저런 가능성을 모두 제시하면서 선택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이 소설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아랑의 전설을 이렇게 긴(?) 장편소설로 만들었다는 자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쉽지 않다. 그리고 아랑의 전설에 담긴 일반적인 이야기구조를 파괴하는 내용도 흥미를 주고...

 

'아랑은 왜'에서 김영하는 중간중간에 자신의 평소 생각하는 바를 풀어놓는다. 나는 왜 소설을 읽어도 이런 것에 관심이 가는지... 물론 번안소설은 그렇지 않다. 뭔가 교훈적인 내용이 있어도 이게 번역이 잘 된건가 하는 생각에 그냥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으로 그치게 되는 것이다. 르귄의 SF 소설이 그랬다. 생각나는 것은 로캐넌의 세계에서 헤어질 때 하는 인사, "당신의 적이 자식 없이 죽기를!" ㅡ.ㅡ;;

 

세상 모든 이야기에는 어떤 틈이 있다. 이 틈이야말로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다. 어떤 이야기가 덧붙여지거나 이미 있던 이야기의 요소가 사라질 때, 거기에는 언제나 작은 흔적이 남게 마련이다. (16쪽)

 

이건 이야기만 그런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것들이, 토론, 대화, 논리 등이 다 그러하다. 이런 것에만 집중한다면 그 또한 편집증적이라 하겠지만, 여기에도 신경쓰면서 상호작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따지고 보면 이야기꾼이라는 작자들이 과거나 지금이나 밥 먹고 하는 일이 그거 아닌가. 다 아는 이야기를 다르게 말하기. (23쪽)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세가 아닐까 싶다. 다 아는 현상일지라도 자신의 관점에서, 아래로부터, 민중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고, 다르게 표현하는 것. 소수자의 눈으로 보는 것은 잘 훈련이 되지 않고, 어느 게 옳은 건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다수자의 눈으로 보게 되면 억압하게 되고, 배려와 연대의 정신이 사라지게 되는 걸까. 아직은 내가 부족하니... (그럼 언제 채워지려나.)  

  

비록 현실에서는 빈번히 일어나는 일일지라도 이야기 속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작가들이 백화점이 붕괴되고 다리가 무너지면서 큰 혼란이 벌어지는 상상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걸 소설이나 영화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런 일은, 현실에서나 용납될 수 있는 일이다. ... 현실에서는 어떤 일도 받아들여진다. '충격적인 일'이라고만 말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 '충격적인 사건'은 곧 잊혀진다. (32쪽)

 

현실이 만화나 영화보다 더 리얼리티가 떨어질 때가 많다. 특히 최근에그렇다.

 

"아무려면 어떠려구요. 대[竹]는 속에다 바람을 채우고 바람을 불러요. 자기 속에다 바람을 채우지 못하는 나무들은 바람과 싸워야 하지만 대나무는 그렇지 않아요. 대는 안이 곧 밖이고 밖이 곧 안이어서 바람이 불어도 맞서지 않지요. 그저 흔들리면서 노래를 불러요. 속이 다 비거든 내 얘기를 써봐요. 장어가 되어버린 여자는 잊어요. 쓰는 사람은 써야지요." (63쪽)

 

위의 대사는 아랑이 작가 '박'에게 하는 얘기이다. 장어가 되어버린 여자는 '영주'이고. 대나무는 여기저기에서 모티브가 된다. 아랑이 죽어 버려진 곳도 대나무숲이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 '대조영'에서 살아나가기 힘들다는 산에서 대조영이 빠져나갈 때 죽창을 사용했던 게 생각나네.

  

녀석이 입에 올린 '중독'이라는 단어의 실체는 분명해졌다. 녀석은 위험의 마력에 빠져들어 있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도박이나 다를 바가 없다.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비루한 현실에서는 얻어낼 수 없는 강력한 자아의 환상을 좇는 행위라는 점에서 그들은 같다. 중독된 자들이 더 강한 중독을 찾아 헤매는 이유도 같다. 이미 위험하지 않음을 알아버린 이전의 매개보다 더 강력한 무엇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더 강한 알코올과 더 센 마약을 찾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얻어내는 과정만큼은 단순 조립공의 노동만큼이나 무료한 것이다. 과연 누가 중독자들만큼 지루할 수 있을까? 강력한 자극이 엄습하기를 기다리고 준비하는 시간은 얼마나 길 것인가. 다가올 환상에 대한 기대가 클수록 더욱 그렇겠지. (83-84쪽)

 

나는 중독을 싫어한다. 중독이 되는 과정에서 겪는 지루함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멀티태스킹을 하는 게 좋고, 한 가지에 몰입하지 못한다. 이건 나에게 숙명일까.

  

오랫동안 외롭게 살아본 사람들은 의외로 그렇게 살아내는 방식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소식(小食)을 하다 보면 양이 줄어들 듯이 인간이라는 것도 만나지 않다 보면 필요량이 감소한다. 물론 자기 연민은 금물이다. 자기 연민은 가끔이야 달콤할지 몰라도 오래 하다 보면 괴물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 나는 바보다. 매력도 없다. 사람들은 나를 벌레 보듯 여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나를 피하지. 내가 잘하는 게 뭐 있겠어? 물론 이런 자학에는 쾌감이 있다. 문제는 스스로를 효과적으로 잘 괴롭혀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다시 더 가혹한 자학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자학과 가학의 화려한 탱고! 그러므로 자기 연민은 금물이다. 그저, 침묵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 그리고 음악이나 일에 몰두할 것. 그는 그렇게 살아왔다. (184-185쪽) 

 

작가 '박'에 대한 묘사이다. 이랬던 그가 영주가 들어온 후, 생활 방식이 180도 바뀐다. 나도 그렇게 바뀔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

 

TV는 눈물을 감추기에 가장 좋은 도구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TV와 사람 사이에 끼여들지 않아야 한다는 묵계 속에 살고 있다. 그렇기에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우는 사람의 눈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TV가 켜지는 순간, 시청자와 TV 사이엔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보호막이 형성되어 그 사이로 틈입하는 모든 것을 퉁겨내버리는 것이다. 가족도 연인도 이데올로기도, 심지어 죽음도 그 사이에 끼여들 자격이 없다. (253쪽)

 

그래서 TV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고 하면 오바일까. TV를 켜고 그에 몰입하는 순간 대화가 사라지고 사고할 틈이 없어진다. 그런데 TV가 없으면 왜 그렇게 적막한지... 거기에 중독된 것일까. 아니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TV 없이 조용하게 썰을 푸는 것이 참 어렵다. 적어도 집에서는... 어쩌다 이렇게 변했을까.

 

김영하의 소설 속에서도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 나오는 시 하나가 언급된다. 인상 깊은 시 중의 하나였는데, 여기서 보게 되다니...

 

최영미 -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요새 자주 선운사와 관련된 글을 접하게 된다. 송창식의 노래 중에도 선운사를 읊은 노래가 있었던가. 올 여름에 선운사에 한번 가봐야겠다.

 

마지막으로, 아랑으로 전설은 밀양이 기원이다. 최근 전도연, 송강호 주연,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이 개봉하여 상영되고 있는 것이 내가 이 소설을 읽은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아무 관련이 없는데, 왜 밀양이 중복되어 생각날까.

이 소설의 제목이 왜 "아랑은 왜"일까,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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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8 13:55 2007/06/08 13:55

4 Comments (+add yours?)

  1. 홍실이 2007/06/08 15:45

    장문 포스팅의 대가.. ㅡ.ㅡ 지난 3월 초, 동백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할 무렵에 선운사 다녀왔는데, 진입로에 무슨 생태공원인가 만든다고 엄청 넓혀놨더라구요. 절집 둘러보는 동안 내내, 풍천 장어 생각만 했더라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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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새벽길 2007/06/09 00:51

    대부분은 인용문입니다. 장문이라고 해도 제가 쓴 건 별로 없다고요. ㅡ.ㅡ;;
    아직까지 선운사에 가보지 못했어요. 선운사와 풍천장어가 무슨 연관이?

     Reply  Address

  3. hongsili 2007/06/09 17:06

    잉, 진짜 모르삼? 이런이런... 선운사는 동백만 알고 계셨구나...선운사 근처, 풍천장어+복분자술 진짜 유명한디... 산사 진입로에서 파는 복분자 호떡도 맛나요 (^^) 대전에서 가까우니 혹시 오실 일 있으면 제가 가이드해드립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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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새벽길 2007/06/09 23:59

    그렇구만요. 장어가 그 근처에서 나는 것도 아닐 텐데...
    복분자 호떡은 별미겠네요. 어떤 맛인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암튼 선운사에 한번 가봐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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