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전환’과 ‘신뢰형성’의 이중변주: 이행의 정치를 위하여(장석준, 미래공방 제2호, 2007)
아래 글은 진보정치연구소의 장석준 동지가 <미래공방> 2호 원고로 쓴 글입니다. 장석준 동지는 <미래공방>이 논문집의 성격을 강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어서 딱딱하게 쓰려고 노력했다고 하는데,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리 딱딱하지 않고 자신의 고민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고민은 아마 변혁을 생각하는 활동가들이라면 다들 어느 정도는 갖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동지들에게 추천하는 글입니다.
어쩌면 말만 살아 움직일 뿐, 실천을 제대로 하느냐 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는 우려도 듭니다. 이 글에 대해 저와 같은 정치조직에 속한 한 동지가 아래와 같은 덧글을 남겼습니다.
ㅇㅇ이 그 변혁의 주체가 될수 있을까요~!
정치조직이 정치방침도 정할수가 없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고, 민주노총의 위기를 초래한 진영과의 전술적 야합을 준비하고 있는 ㅇㅇ이 과연 변혁은 고사하고, 좌파이기나 한걸까요!
정치조직이 정치방침도 정할수가 없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고, 민주노총의 위기를 초래한 진영과의 전술적 야합을 준비하고 있는 ㅇㅇ이 과연 변혁은 고사하고, 좌파이기나 한걸까요!
자신들의 조직에 가입하고 활동하고 있는 회원들에 대한 아무런 조직적 강제나 정치적, 의식적 노력이 없는 소수 몇명의 왕당파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면서 끊임없이 원칙을 폐기하고, 수정하고 있는 ㅇㅇ이 과연 과연 과연.... 숙청으로부터 변혁으로, 자정으로부터 새로운 ㅇㅇ을...
이미 ㅇㅇ은 희망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말 슬픕니다.
정말 슬픕니다.
문제는 이러한 정서가 일부 회원만이 아니라 조직내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론이 있다면 이를 우선 조직내에서부터 강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체제전환’과 ‘신뢰형성’의 이중변주
- 이행의 정치를 위하여
- 이행의 정치를 위하여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유행한 것들이 있다. 우선 ‘로드맵’이란 말이다. 이 정부는 사회를 무슨 건설 공사 현장쯤으로 봤던 것 같다. ‘로드맵’이란 걸 잘 만들면 정말 사회가 그 시나리오대로 다 돌아가리라 믿었던 걸까? 아무튼 정책 전문가가 얼마나 그럴듯한 ‘로드맵’을 작성하는지가 정치의 관건처럼 됐다.
그래서 또 유행한 게 있다. 각종 보고서들이다. 한 동안 보고서의 생산이 ‘정치’를 대신했다. 정당의 강령이나 대중의 관심사보다도 청와대 주변이나 이러저러한 싱크탱크에서 나온 보고서들이 정치 의제를 규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진보 진영에서 갑자기 여러 개의 싱크탱크들이 등장한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진보적 싱크탱크의 역할이란 게 결국은 정부나 우파 연구소 쪽의 생산물들과 경쟁하는 또 다른 보고서와 청사진들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정치연구소의 ‘사회연대 국가전략’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는 않다.
하지만 ‘로드맵’의 정치(그것을 ‘정치’라고 부를 수 있다면)는 결국 파산 선고를 받고 말았다. 확실히 사회는 공학의 실험장이 아니었다. 더구나 한국 사회는 비록 단기적인 차원에서라도 테크노크라트에게 과도한 영광을 부여할 수 없었다. 노무현 정부와 개혁보수세력(혹은 ‘중도파’)의 실패는 어느 정도는 ‘로드맵’ 정치의 실패였다.
유럽도 아니고 라틴아메리카도 아닌 한국 사회
‘로드맵’ 정치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주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그것이 항상 어떤 모델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대개 외국의 사례에서 추출한 어떤 모델을 상정하고 그것에 맞춰 한국 사회를 수술할 방도를 찾는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빠져 있는 것은 결국 한국 사회 바로 그것이다. 다른 어느 곳과도 다른 한국 사회의 복합성, 그리고 그 어지러운 사회를 살아가는 현실의 주체들, 즉 한국의 노동자, 한국의 주부, 한국의 자영업자, 한국의 농민, 한국의 자본가 등등이 시야에서 지워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개혁보수세력의 문제만은 아니다. 좌파도 이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최근 <레디앙>에서는 한국의 좌파가 따라 배워야 할 모범 사례가 유럽인지 라틴아메리카인지를 놓고 입씨름이 있었다. 논쟁을 벌인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우리만의 대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걸 잊지는 않았지만, 한국 사회가 유럽에 더 가까운지 아니면 라틴아메리카에 더 가까운지에 대해서는 화해할 수 없는 입장 차이를 드러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 사회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부터 우리의 모든 고뇌는 시작되어야 한다.
한국이 유럽 사례와 더 가깝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한국의 노동계급이 과거의 서유럽처럼 대안적인 사회 세력으로 안정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현실에 눈감고 있다. 100년 전 서유럽의 좌파정당과 노동조합은 지금 우리가 고민하는 것 같은 난관을 겪지는 않았다. 적어도 산업 노동자가 인구 구성에서 차지하는 비율 꼭 그만큼은 노동조합 조직을 쭉 확대시켜갔고 좌파정당도 선거에서 계속 지지를 늘려갔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가? 87년 민주화 이후 곧바로 노동계급의 성장이 뒤따랐다. 하지만 그 행진은 10년만에 결정적인 후퇴를 맛보았다. 97년 경제위기 이후 직접적으로 몰아닥친 신자유주의 공세는 아직 취약한 상태에 있던 노동계급의 성과들을 하나하나 허물어뜨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안정된 일자리를 놓고 벌이는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이 연대의 가치를 무색하게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한편에는 일본 노동운동의 쇠퇴와 단순 비교할 수 없는 역동성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다른 한편에는 일본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내부 분열과 반목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좌파가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안정적 성장 궤도(물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고려에서 제외했을 때 이야기이기는 하지만)를 뒤따를 것이라고 장담한다면, 그것은 무책임한 낙관주의이거나 외국 동화 광(狂)이거나 둘 중 하나다. 네덜란드나 아일랜드의 선택을 남한에 그대로 이식할 수 있는 양 선전하는 개혁보수세력의 망상과 거리가 멀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라틴아메리카가 우리의 좌표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은 모두 자본 수입국들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종속 관계가 너무나 분명하다. 반면 한국은 중심부 국가들과 양적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자본 수출국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에서 애매한 중간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이런 나라는 거의 유례가 없다.
분단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어쩌면 라틴아메리카에서 대중을 규합하는 게 우리보다 좀 더 단순하고 수월하다면, 혹은 반대로 우리가 저들 나라에 비해 좀 더 복잡하고 힘들 수밖에 없다면, 그 핵심 이유 중 하나는 분단 문제다. 분단 때문에 대중이 반제 민족주의로 똘똘 뭉칠 것이라는 전망은 진실의 한 쪽 면일 뿐이다. 분단은 북한 체제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통해 대중들 사이에 심각한 균열과 갈등을 낳기도 한다. 그래서 이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경제사회적 의미의 민중계급이 최대 수준의 정치적 대중집단으로 결집하는 데 중요한 제한(constraint) 역할을 한다.
라틴아메리카와의 또 다른 차이는 사회적 유대의 양태와 자원, 효과(요즘 주류 사회과학은 이를 ‘사회적 자본’이라 표현한다) 측면에서 나타난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보이는 농촌 공동체의 잔존, 미디어의 상대적 저발전으로 인한 하층계급 생활세계의 역설적 자율성, 비록 일시적 단절이 있었다 할지라도 어쨌든 세대에 세대를 이어 지속되어온 좌파의 뿌리 깊은 전통 등이 우리에게는 없다. 그런데 다름 아닌 이들 요소야말로 라틴아메리카 좌파 민중주의 성공의 밑바탕인 것이다.
유럽, 라틴아메리카와의 비교를 통해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특성은 한 마디로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 할 수 있다. 한 세기 전의 서유럽과 비슷한 노동계급 초기 형성의 시간대와 신자유주의의 노동 유연화 공세의 시간대가 함께 하고, 자본 수출국의 위상과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민주주의 장치의 부재가 병존한다. 즉, 세계 자본주의 역사의 각기 다른 시기가 서로 공존하며 교차하고 결합하는 압축적이고 복합적인 시간대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시간대를 사는 우리 한국인들은 결국 상당히 (자기)분열적인 주체일 수밖에 없다.
‘정치’의 부활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한국 사회에는 분명 변화의 열망이 존재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과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광범한 불만이 존재한다. 아니 단순히 존재하는 수준이 아니라 저 심연에서 꿈틀댄다. 지각에 조금의 균열이라도 생기면 지표 위로 솟구쳐 오르는 마그마처럼 폭발의 계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이미 확인됐다. 바로 3년 전의 17대 총선이 그 사례다.
16대 국회 마지막의 탄핵 사태는 변화의 열망이 정치적으로 응집돼 폭발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물론 이 때 변화의 지향과 수준, 내용은 참으로 모호했다. 민주노동당이 내세운 ‘판갈이’ 구호만큼이나 막연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 강도만큼은 거의 혁명에 버금갔다.
그러나 이후의 진행 과정을 보면 2004년 봄은 그 열기 외에는 혁명과 아무런 닮은 점이 없었다. 대중은 기존의 것에 대한 불만은 확실히 표현했으나, 어떤 가치와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새로운 무엇을 위해 누구와 어깨 걸고 나아갈지 방향을 잡지 못했다. 이 격랑 속에서 방향타를 잡는 것은 정치세력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17대 총선 결과의 막연함에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데 실패했다. 아니 그런 시도 자체를 회피했다. 누구나 사례로 드는 게 2004년 말의 국가보안법 개폐 파동이고, 현 정부 집권 내내 반복적으로 터진 부동산 문제다. 정부, 여당은 그 어떤 경우에도 뚜렷한 가치와 이해관계를 바탕에 둔 지지동맹을 구축하지 못했거나 혹은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바로 여기가 노무현 정권의 실패 지점이고 또한 민주노동당이 첫 걸음을 떼야 할 지점이다. ‘사회연대 국가전략’의 일부인 ‘진보정당 헤게모니 프로젝트’는 민주노동당의 정치 전략이 복지동맹의 구축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연대적 성장전략과 복지모델을 무기로 경제사회적 이해관계와 직결된 정치적 지지동맹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만 야심찬 기획인 것이 아니다. 전체 한국 정치의 진로를 바꾸는 계기일 수 있고, 따라서 한국 사회의 미래를 결정하는 선택일 수 있다. 왜 그러한가?
복지동맹의 핵심은 17대 국회 초기에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의 주된 지지 기반이던 화이트칼라, 조직 노동자와 이른바 ‘저소득층’이라 불리는 신자유주의의 최대 피해 계층 사이의 연대에 있다. 후자는 그간 정치적 대의 과정에 참여하는 데 소극적이거나 양대 지역주의 보수정당에 상대적으로 강하게 얽매여 있었다. 이들의 이러한 정치 불참 혹은 한나라당, 민주당 지지는 보수 독점의 정치 구도가 유지되는 데 토대 역할을 했다.
따라서 복지동맹의 구축은 단지 민주노동당의 지지 기반 확대의 의미만 갖는 게 아니다. 보수 독점 정치 구도의 토대를 허물어뜨림으로써 한국 사회 지배구조의 한 핵심을 흔들자는 것이다.
즉, 민주노동당의 과제는 개혁보수세력과 이른바 ‘반한나라당연합’을 만들어 기존 정치 구도 내에서 덧셈 뺄셈의 정치를 하는 것일 수 없다는 뜻이다. 그게 아니라, 한나라당의 주된 지지 기반을 허물고 이를 오히려 새로운 좌파 정치의 토대로 뒤바꿈으로써 진정한 ‘판갈이’의 정치를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대안적인 역사 블록의 구축이라고 부르는 것이기도 하다.
한데,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우리에게 그런 메시지가 있다고 해서 이 메시지가 대중에게 그 내용 그대로 수용될 수 있을까? 더구나 여기서 ‘대중’이란 추상적 시, 공간의 이론적 주체가 아니라 2007년 한국 사회의 현실 주체들이다. 민주노동당과 그 대중 사이의 관계맺음이 ‘진보정당 헤게모니 프로젝트’가 좇는 방향 그대로 이뤄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사회연대 국가전략’은 저 흔한 ‘로드맵’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이행의 전망도 없는 공허한 모델론일 것이다.
이 질문을 치열하게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민주노동당도 이미 지난 3년간 혹독한 시험을 거쳤고 그 결과가 하나같이 다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은 우선 자신을 대안으로 내세울 ‘실적’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다. 사실 이렇다 할 실적이 없다는 것 자체가 근본 문제는 아니다. 지금 상황에서 이 당이 넘어설 수 없는 절대적 한계들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오히려 무엇이 그러한 실적을 이뤄낼 가장 효과적인 소재인지부터가 막연했다는 점이다. 아니, 그런 소재를 선택해서 거기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자체가 약했다는 점이다.
아무튼 그래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현재 대중의 전반적인 평가는 ‘평가를 할 무슨 거리가 없다’, ‘그래서 신뢰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당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불신의 벽을 돌파해야만 한다.
그런데, 대중의 불신에는 보다 뿌리 깊은 환경적 요인도 존재한다. 그 첫 번째는 남한 사회가 이제까지 한 번도 좌파 주도의 진지한 사회 개혁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겪어보지 않은 세력을 신뢰하기란, 더군다나 그 세력에게 자기 삶의 변화를 기대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두 번째는 노무현 정권의 실패다. 정권 초기 그토록 드높았던 기대 때문에 실망과 환멸 또한 측량할 길이 없다. 이것은 뭔가 변화를 이야기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여기에는 지금 민주노동당도 포함돼 있다.
세 번째는 민주노동당의 주된 사회적 기반인 민주노동조합운동의 침체와 혼란이다. 이 대목에서 노조 간부의 부패 문제는 차라리 에피소드라 할 수 있다. 더 심각한 것은 민주노조운동의 진보적 전망이 도대체 무엇인지 불분명하고 그래서 속 좁은 이익집단으로 낙인찍히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의 산별 전환 움직임은 분명 중요한 변화의 계기이지만, 아직 이런 수세 상황을 타개할 정도의 폭발력은 보이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의 복잡한 모순들로 인한 대중의 (자기)분열이다. 홍세화 선생의 표현을 따른다면, ‘존재에 대한 의식의 배반’이다. 현 상태에 가장 불만을 갖고 있고 그래서 변화를 가장 바라는 사회 세력이 현재 급격히 한나라당, 더 정확히 말하면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중심으로 한 성장동맹에 쏠리고 있다. 장기의 시간 지평에서는 민주노동당에 호감을 느낄지 몰라도 단기의 시간 지평에서는 이명박 세력에게 더 신뢰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좌파의 메시지가 대중에게 수용되고 그래서 정치적 실체로 부상하려면, 이러한 불신의 두터운 벽부터 파열구를 내야 한다. 그것이 노무현 정권의 참담한 실패 이후 이 사회의 대안적인 ‘정치’가 타파해야 할 첫 번째 화두다.
체제전환의 정치
이런 맥락에서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좌파 정치는 앞으로 두 개의 경로를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두 개의 경로란 ‘체제전환의 정치’와 ‘신뢰형성의 정치’다. 이 두 쌍은 고전적 용어법에 따르면 ‘혁명’과 ‘개혁’에 각각 대비되겠지만, 그것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굳이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필자는 체제전환의 정치와 신뢰형성의 정치가 동시에 추진되고 둘이 상호 영향을 미칠 때 복지동맹과 같은 대안적 역사 블록이 구축되고 그래서 변혁을 성공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체제전환과 신뢰형성의 노력이 병행되고 둘 사이에 끊임없이 대중적 차원의 해석적 순환이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변혁 프로그램 자체의 구체성을 높이면서 그에 대한 대중의 동의를 확대할 수 있다.
우선 체제전환의 정치부터 이야기해보자. 한국 사회의 가장 급박한 문제, 즉 양극화를 치유하기 위해서도 부분적인 개선 조치만으로는 부족하다. 체제 차원의 변화가 필요하다. ‘사회연대 국가전략’의 성장, 복지 모델도 사실 이런 수준의 변화를 전제한다.
물론 ‘체제’에도 여러 수준이 있다. 보다 심층의 구조(예를 들어 자본주의 생산양식)와 연관된 ‘체제’(영어로는 흔히 system이라 불리는) 개념이 있는가 하면, 그보다는 좀 더 표피적인 제도적 차원과 연관된 ‘체제’(영어로는 regime이라 불리곤 하는) 개념도 있다. 진보정치연구소의 ‘사회연대 국가전략’은 이 중 후자의 의미에서의 체제전환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전자의 맥락에서의 체제전환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조희연 교수는 “스웨덴 모델이건, 네덜란드 모델이건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적 모델을 넘어서는 모델의 현실적 구현에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계급적·사회적 역관계, 그것을 구성하는 민중의 분노가 필요하다”(<레디앙> 2006. 11. 1)고 지적한다. 즉, ‘사회연대 국가전략’이 제시하는 정도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도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더 심층적인 체제의 변화를 공세적으로 요구해야 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말이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어떤 수준이 됐든 부분적 개선 수준을 넘어선 체제전환을 지속적으로 선전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렇게 ‘선전’하기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보다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그와 더불어 체제전환의 현실적 계기를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세계 좌파정치의 역사를 보면, 그런 계기로서 대표적인 것이 제헌적 성격을 지니는 운동이나 사건이다. 물론 그 전형은 혁명이다. 하지만 고전적인 혁명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형태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우선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초기 역사에서는 보통선거권 쟁취 운동이 그런 역할을 했다.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보통선거권을 쟁취함으로써 선거로 집권하고 그래서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전망이 당시의 노동계급을 고무하고 단결시켰다. 브라질 노동자당의 초기 발전 과정도 비슷했다. 노동자당이 80년대 중반에 벌인 군사독재반대 민주화 투쟁은 일종의 선거권(대통령 직선제) 쟁취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970년 칠레의 인민연합은 대통령 선거의 핵심 공약으로 사실상 제헌 수준의 헌법 개정을 내걸었다. 이 공약은 실제 추진되지는 못했는데, 마르타 아르네케르(M. Harnecker) 같은 논자는 이것을 포기한 게 인민연합 정부의 실패의 주된 이유였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이 전략은 30여 년 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에서 실현됐다. 차베스 정부는 집권 직후 곧바로 헌법제정 작업에 착수했고, 이것이 이후 지금까지 8년 동안 계속되는 평화혁명의 출발점이 됐다.
우리의 경우도 체제전환의 현실적 계기로 민중적, 사회적 개헌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개헌 논의를 계기로 삼아 체제전환을 현실 의제로 부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개헌 논의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확대, 평화 체제, 경제 민주화, 사회권의 철저한 보장 등을 개헌안의 주 내용으로 제시함으로써 체제전환의 정치에 실체를 부여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헌법 개정 문제는 이미 현안으로 제기돼 있다. 어쩌면 개헌 논의를 18대 국회의 과제로 넘김으로써 2008년 총선 때까지 쟁점으로 남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인해 다양한 사회적 갈등이 폭발하는 순간(지금 그 대표적인 것이 주택 문제다)마다 혹은 한반도 통일, 더 나아가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화 과정에서 제헌적 운동이나 사건의 기회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2004년 탄핵 사태와 같은 우발적 사건에서도 드러났지만, 이런 순간에는 평소에 불가능할 것 같았던 새로운 정치 기반의 형성, 사회 세력의 재배열이 빠른 속도로 이뤄지곤 한다. 우리는 이런 순간을 포착해야 할뿐만 아니라 그러한 순간을 낳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신뢰형성의 정치
하지만 이와 함께 신뢰형성의 정치가 추진되어야 한다. 특별한 계기 없이 체제전환만을 선전한다면 이것은 특히 가장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노동자, 빈곤층을 정치적으로 결집하는 데 커다란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 이들 계층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워낙 급박하기 때문에 ‘말을 통한 선전’보다는 ‘행동을 통한 선전’, 즉 보다 실질적인 효과를 동반하는 행위들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신자유주의의 최대 피해 집단이 불신과 의혹을 걷어내고 기존 정당으로부터 좌파 쪽으로 과감히 이동할 수 있도록 세심하고 치밀하게 접근해야 한다.
신뢰형성의 중요한 수단은 ‘예시적 개혁’(prefigurative reforms)이다. 예시적 개혁이란 제한된 영역에서나마 우리가 지향하는 원칙들을 제도와 경험으로 구현하는 방식으로 현실을 개선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회연대 복지모델의 기본 원칙들을 연금 개혁이나 사회서비스 확대 등의 추진 과정과 그 제도적 구현 내용 등에 반영함으로써 사회연대 복지모델 자체에 대한 대중의 동의를 넓혀간다는 것이다.
예시적 개혁도 모든 다른 개혁과 마찬가지로 현 체제의 부분적 개선에 불과하다. 그것이 여럿 모인다고 해서 체제가 바뀌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러나 예시적 개혁은 집단의식의 파장 운동을 지향한다. 연못에 돌을 던지면 동심원의 파문을 그리고 한꺼번에 여러 개의 돌을 던지면 각각의 파문이 확대되면서 서로 만나는 것처럼, 예시적 개혁의 경험들은 대중 차원의 해석적 순환을 통해 그런 방향의 현실 변화 일반에 대한 지지, 체제 수준의 전환에 대한 지지로 발전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현실이 전개될 수도 있다는 경험을 통해 대중의 불신을 깬다는 데 의미가 있다. 브라질 노동자당의 참여예산제 실험을 비롯해서 민주화 이후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 추진된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참여민주주의 사례들이 커다란 의미를 가졌던 것도 바로 이런 예시적 개혁의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들 실험은 좌파가 건설하려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실물로 보여주었고, 그래서 다른 어떤 선전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대중을 고무하고 결집시켰다.
사실 민주노동당은 17대 의정 활동을 통해 이러한 예시적 개혁의 사례를 만들어내야 했다. ‘부유세,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그러한 실적을 만들어낼 주요 영역이라는 목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기보다는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는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겠다.
예시적 개혁은 우선 ‘새로운 경험’을 제시하는 게 중요하다. 여기에서 ‘새로운 경험’은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새롭다’.
첫째는 기존의 상식을 벗어난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배치되는 요소들, 가령 실질적인 재분배, 공공부문의 적극적 역할, 노동자·민중의 광범한 참여 등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둘째는 상투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좌파 스스로가 이제까지의 상투적 실천 관행을 벗어나는 행위들을 보여줘야 한다. 이것은 냉소의 빗장을 걷어내고 불신의 벽을 허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충격일 수 있다.
셋째는 최대한 다수의 대중에게 소원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즉, 되도록 많은 수의 대중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 개혁을 바로 자신의 권리 쟁취 과정으로 바라보게 되어야 한다.
예시적 개혁에서 또한 중요한 것은 그에 동반하는 주체의 전환 과정이다. 이런 저런 제도가 갖춰지는 것 자체는 어쩌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그런 제도를 바라보는 대중의 의식이며 그에 반응하는 행동 양식이고 그런 의식과 행동을 하나로 모으는 새로운 단결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개혁들 사이의 연속성이다. 하나의 개혁은 연속적으로 새로운 개혁 프로그램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를 통해 정치적 의식화와 조직화 과정도 지속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사실 지금처럼 민주노동당의 현실 역량이 제약돼 있는 상황에서는 예시적 개혁의 모범 사례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일단 한 방면에 역량을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일단 한 곳에서 물꼬를 튼다면 그 후부터는 이전과는 다른 상황이 열릴 수 있다. 진보정치연구소가 3월 발표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는 ‘소득연대전략’(가칭)도 바로 이러한 예시적 개혁의 모범 사례를 일구기 위한 하나의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
덧붙여 - 2007년 대선을 준비하며
당장 우리 앞에는 2007년 대선이 있다. 대선이 있는 올 한 해는 지난 3년과 맞먹는 (아니 어쩌면 더 중요한) 정치적 무게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올 1년의 실천이 과거의 모든 성과들을 무색하게 할 수도 있고, 역으로 지난 3년 동안 절감한 우리의 한계들을 집약적으로 극복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민주노동당은 올 대선 과정에서부터 본격적으로 과감한 체제전환을 주장하고 나서야 하며 동시에 신뢰형성에 초점을 맞춘 치밀한 핵심 정책을 펼쳐 보여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병행하면서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키는 정치 활동이 어떠한 것인지 스스로 그 모범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 그러한 전형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다면, 이것은 이후의 모든 실천 과정에도 우리의 밑천이 될 것이다.
그러한 노력 속에서만 당의 지지 기반은 재구성될 것이다. 항상 상징적 차원에서만 우리의 동지이던 민중계급의 다수가 실제 좌파를 지지하기 시작하는 일이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요약하자면, 올 한 해는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 우선 우리 자신부터 ‘변혁’하는 1년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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