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를 만든 목소리를>
이건희 아닌 홍대 청소 노동자 앞에서 무릎 꿇는 이유 (프레시안, 유강은 국제 문제 전문 번역가, 2011-02-25 오후 6:18:55)
[프레시안 books]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를 만든 목소리를>(앤서니 아노브 엮음, 황혜성 옮김, 이후 펴냄)
"중국 놈들은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하워드 진이 엮은 <미국 민중사를 만든 목소리들>(황혜성 옮김, 이후 펴냄)의 한 구절을 읽다가 며칠 전에 가리봉동 후미진 주택가를 걷던 중에 마주친 낙서가 떠올랐다.
1848년,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을 비롯한 여성 운동가들은 뉴욕 세니커폴스에서 역사적인 여성 대회를 열었다. 미국 '독립선언서'를 고스란히 인용해 가며 작성한 선언문을 읽어 내려가다가 눈길이 잠시 멈추었다. "남성은 여성에게 가장 저속하고 무식한 원주민과 외국인에게 부여된 권한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200쪽)
세니커폴스와 가리봉동은 공간적,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억압 받는 소수자가 오히려 다른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적대에 사로잡히기 쉽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가령 1930년대에 시카고의 육류 가공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운동에서 활약한 비키 스타는 당시 노동운동의 이면을 직접 경험했다. "여자들은 노동조합에서 몹시 끔찍한 시간을 보냈다. 남자들이 노동조합에서도 그들의 편견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 평등을 믿고 여자가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 형제 중에도 등사판 인쇄를 하거나 타이핑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지만 정작 노동조합에서 유급 직원을 채용할 때는 으레 남자들 차지였다. 하지만 비키 스타 같은 사람들이 앞장서서 문제를 제기하고 행동에 나서면서 서서히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미국 민중사를 만든 목소리들>은 무엇보다도 변화에 관한 책이다. 아래에서 바라본 미국의 역사, 또는 그 이름도 케케묵은 민중사를, 그것도 200편에 달하는 각각의 사료를 지금 들춰보는 일은 그래도 뭔가 변화에 대한 희망을 놓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인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 노예, 여성과 동성애자, 노동자와 사회주의자, 민권운동가와 반전운동가 등은 모두 원래는 평범한 장삼이사들이었다.
아이티의 아라와크 족이 콜럼버스의 잔인무도한 만행 때문에 저항을 하기 시작했듯이,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자기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고 이주시키는 백인들에게 맞서 무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노예 신분에서는 해방되었지만 땅 한 뙈기 없이 그 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소작인으로 변신한 흑인들과 초창기 자본주의 공장의 위험하고 끔찍한 노동 조건 아래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노동자들은 어느 순간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인간을 피부색으로 차별하는 것이 부당한 일임을 깨달은 흑인과 백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깨달음이 닥치는 순간, 사람들의 삶은 송두리째 바뀐다. 사는 게 언제나 고되고 팍팍하고, 아무것도 변할 것 같지 않은 세상이었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만나고 작은 변화를 이루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투명하게 드러나는 법이 절대 없는 억압과 차별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고, 설사 그런 현실을 깨닫는다 할지라도 일상을 조이는 현실의 무게와 거대한 체제에 맞서서 행동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1964년에 흑인 투표권 등록 운동을 지원하고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갖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열린 미시시피 자유 여름 행사에 참여한 북부의 백인 대학생은 1학년답게 향수병에 시달렸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학생은 속내를 드러냈다. "내가 만약 미시시피에 사는 니그로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 나는 북부 백인이기 때문에 원한다면 이 일에 언제든 참여할 수 있고, 지겹거나 절망하거나 두려울 때면 또 언제든 집으로 도망갈 수 있어. 하지만 나는 이런 북부 백인의 태도와 입장이 싫어. 그리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나 자신을 경멸해." (695쪽)
그렇지만 1930년대 뉴욕에서 실업자 운동을 벌인 여성의 말처럼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투쟁에서 바로 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587쪽) 혼자서는 전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지만 "함께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힘을 느꼈고 웃을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한데 모여 세상을 바꾸었다. "지금 미국식 생활 방식의 일부로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이, 우리가 이를 요구하기 시작한 1930년대에는 혁명적인 아이디어들이었다. 우리는 실직 수당을 원했고, 주택 구호를 원했고, 학교에서 따뜻한 음식을 제공해 줄 것을 요구했고, 도시 빈민가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숙소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583쪽)
예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이 권리가 되고, 만인이 마땅히 누려야 할 복지가 되었다. 이런 투쟁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새롭게 거듭났다. 인간의 권리를 자각하고 착취의 비밀을 간파했으며 집단의 힘을 깨달은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변화시켰고, 역사의 빛나는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소수의 저항은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고, 행동과 연대 속에서 새로운 삶과 역사가 만들어졌다. "파업 후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파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여자들은 노동운동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심지어 플린트 시에서도 볼 수 없었던 전혀 다른 여자가 됐다. 걸음걸이가 달라졌고, 머리를 높이 들었으며, 자신감이 넘쳤다." (599쪽)
이 책은 이렇게 자신과 세상을 바꾼 사람들이 남긴 기록들로 가득하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지질한 인생들이 어느 순간 유창한 연설가가 되고 시인이나 가수 못지않은 노래를 읊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만큼 절절했기 때문이리라.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이 거대한 물결을 이뤄 분출한 1960년대 말 이래 미국 사회는 점점 보수화되었다. 노동 운동은 이미 체제에 포섭된 지 오래였고, 신자유주의가 전면에 대두함에 따라 기업 지배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빈부 양극화가 워낙에 고착되고, 소수 이민자가 자동적으로 하층계급을 이루는 오늘날의 미국 사회에서 민중의 목소리를 듣기란 어지간히 어렵다.
현실은 그저 답답하기만 할 뿐이고, 맞서 싸워야 할 적의 모습은 여간해서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우리의 현실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경제는 성장을 거듭하지만 '88만 원 세대'와 4000원 인생으로 대표되는 대다수 사람들의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고 잔뜩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이상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희망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민중의 역사가 있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단지 조그만 양심을 지키고, 작은 신념을 고수한 이들이다. 불과 몇 명의 행동이 수백만 명의 행진으로 이어져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었다. 세상이 온통 캄캄한 어둠속 같고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전혀 의외의 곳에서 사람들이 행동한 이야기가 이 책 곳곳에 담겨 있다. 민중의 역사를 기억하는 한 낙담은 금물이다. 얼마 전 이집트에서 일어난 민주혁명과 매서운 추위 속에서 꽉 막힌 학교 당국과 싸워 결국 승리를 일궈 낸 홍익대학교 청소 노동자들을 보라.
목재 회사가 1000년 묵은 미국 삼나무를 벌목하는 것을 막기 위해 738일 동안 나무 꼭대기에서 나무와 함께 산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은 원래 운동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힐이 나무와 숲에서 배운 교훈은 엮은이 중 한 명인 고(故) 하워드 진을 기리는 말인 동시에 미국 민중사에 바치는 헌사이다. "더 나은 세계에 봉사하며 사는 삶은 사라지지 않는 전설이다. 이는 흔적이고 이 흔적은 매일, 매 순간 우리가 내리는 결정과 행동에 따라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멋진 사람은 젊건 늙건 상관없이 선한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본 사람 중에서 누구보다 빛났고, 가장 아름답고 당당하고 감동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장 부자인 사람보다 힘이 세고, 어떤 모델보다 아름답다. 그들의 아름다움과 힘이 그들의 몸을 통해서 생명력 저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고 빛나기 때문이다. 나는 모델이나 남녀 배우, 또는 백만장자 앞에서는 절대로 무릎을 꿇지 않는다. 하지만 공통의 선을 위해서 일하거나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절하고 싶다. 그것이 명예다. 돈이 명예가 아니다. 삶에서 진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명예다." (1039쪽)
책은 하워드 진이 <미국 민중사>를 집필하면서 참고한 중요한 사료를 <미국 민중사>의 각 장별로 묶고 간단한 배경 소개를 곁들인 구성이다. 일기에서부터 선언문, 신문 기사, 편지, 구술 회고, 탄원서, 시 등 다양한 사료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미국 민중사>(유강은 옮김, 이후 펴냄)를 먼저 읽는 게 낫겠지만, 이 책을 먼저 읽으면서 자기 나름대로 미국 민중사를 재구성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생생한 1차 자료를 읽으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재미가 쏠쏠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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