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지 않았다

나는 미안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를 맞닥뜨리고 많은 어른들이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할 때, 나는 미안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내가 어른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어른은, 아마도 아는 것을 하고 하는 것을 아는 이들이 아닐까. 어른은, 나이가 들면서 붙는 그런 이름이 아닐 것이다. 많은 어른들이 안다고 말하지만 하지 않는다. 세상이 뭐 그렇지. 이렇게 세상의 진실을 아는 것이 차라리 면죄부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하는 것이 이 세계로 연결된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없거나 알지 않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가 잊을 수 없는 그 아이들이 정말 어른이었던 것은 아닐까. 누구도 생명을 소홀히 다루지는 않을 것이라고 아는 대로 했던 어른. "바보같이 착한"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래, 나는 아는 만큼 하고 하는 만큼 안다고 생각해오기도 했다. 내가 아는 부조리함을 그냥 넘기지 않으려고 했고, 내가 하는 일들이 어떤 연결고리들을 따라 흐를지 알려고 했다. 그게 인권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던 어떤 것들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면, 그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는 말이라고. 

갚을 미안함이 없다. 그저 나는 이제 어른이 되려고 한다. 누군가가 살아내야 하는 불평등이 죽음의 위험으로 두텁게 쌓일 때 생명이란 얼마나 가벼운 것이 되는지. 할 일을 찾아내겠다는 다짐이다. 법을 바꿔야 한다면 바꾸고,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면 만들어야지. 법으로도 제도로도 안 된다면, 뭐 세상을 바꾸면 되지. 그게 사람 사는 것보다 어렵기야 하겠나. 다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다짐이 혼자만의 것이 되지 않도록, 모두의 약속 사회의 약속이 되도록 만드는 것. 그게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이다. 

우리가 무엇을 왜 어떻게 바꿔야 할지, 진상이 규명되기 전에는 다 알 수 없다. 다 알 수 없다는 건 부분을 아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철저한 진상 규명. 유가족들이 요구하는 이것은 어쩌면 가장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용산참사의 진상이 아직까지 규명되지 못하고 유가족들의 시간이 2009년 1월 20일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책임자 처벌도 쉽지 않다. 처벌이 어려운 게 아니라 도대체 이 세계의 책임 구조가 어떻게 생명과 존엄을 짓밟고 있는지를 밝히는 과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은 그저 시작일 뿐이므로 여기에 이르지 못하고서는 우리는 2014년 4월 16일을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정권을 바꿔야 한다면 바꾸고 세상을 바꿔야 한다면 바꿔야지. 그건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의 다음이 아니다. 어쩌면, 밀양 할매들이 그랬듯 우리는 그저 살아가야 한다. 정치적 책임을 다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어른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겠다. 그건 어쩌면 스스로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일지도. 누군가 아는 대로 하지 못하고 하는 대로 알지 못하는 '아이'여야 한다면 그건 그/녀가 아이이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그/녀를 '아이'로 만들기 때문일 터이므로. 내일 안산으로 가는 마음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4/05/09 22:20 2014/05/09 22:20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aumilieu/trackback/888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