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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11

"철학자들은 세계를 서로 다르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최근 발리바르의 <맑스의 철학>을 다시 읽으며

이 테제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여기서 내기에 걸린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맑스는 요즘 말로 '수행성'(performativity)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이론, 또는 보다 일반화하자면 '말'에서 탈출하는 것으로까지 이해되기도 했고

맑스 자신도 그런 열정에 사로잡혔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지만,

그렇게 되면 '道可道 非常道'의 역설, 즉 말로 표현하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지만

그런 도/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적 궁지에 이르게 될 것이므로,

여기서는 '이론에서 실천으로의 이행', 또는 '이론 안에 있는 실천으로의 출구'

그도 아니라면 '실천이라는 이론외적 물질성에 의한 이론의 재편'

정도로 정식화 해 보자.

 

이 때 '해석'이라는 관념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독일 관념론이 정교화한 '표상'(representation) 개념,

결국 세계 안에 '조화'로운 '질서'가 내재한다

(따라서 이론의 역할은 이 질서를 찾아내는 것이고,

정치의 역할은 이 질서를 구현하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이 같은 기원적 질서를 파괴하려는 자('敵', '惡')들을 억압하고 통치하는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다.

 

반면 맑스는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는 그의 유명한 선언이 말하듯

세계가 갈등과 투쟁(그러나 이는 '무질서'는 아니다) 위에 서 있으며

그런 한에서 세계는 말의 강한 의미에서 '역사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볼 때 이론은 이 갈등과 투쟁의 일부가 되는 한에서

실천적이 될 수 있다.

 

이는 '물질'의 관점, 심지어 '노동자'나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을 취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해석', 따라서 '질서'라는 이념에 따라 조직되어 있다면

실천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또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념론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론이 객관성이나 과학성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실제로 투쟁을 해 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이 편과 저 편의 힘 관계를 최대한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분석하지 못하는 이론이란

현실의 투쟁에 아무런 쓸모가 없거나 심지어 해악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계가 정해진 방향과 질서에 따라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갈등과 투쟁으로 이루어진 불안정한 힘의 균형 위에 서 있으며

누가 이기고 누가 질지 선험적/목적론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할 때,

스스로의 역사적 정당성에 대한 자부가 대개 저 편의 강점과 이 편의 약점, 객관적 힘 관계를

파악하는 데 인식론적 장애물이 된다는 점을 깨달을 때,

이론은 실천적인 만큼 객관적이고, 객관적인 만큼 실천적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이론이 실천에 기여하는 한 가지 방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는 대중들을 실천으로 조직하고 이 조직화가 지속하는 데 필수적인

'역사적 정당성에 대한 자부' 곧 이데올로기다.

약간의 무리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여기서

이론은 실천적인 만큼 주관적/주체적이고, 주관적/주체적인 만큼 실천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실천에 기여하는 이론은

그 자체가 둘로 나뉘고 갈등한다. <과학-실천>, <이데올로기-실천>이라는

<이론-실천>의 두 복합체 사이의 갈등.

사태가 더욱 복잡해지는 것은, 물론, 이 복합체 두 가지가 갈등적으로 결합될 때에야

유효한 실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없는 과학은 무력하고, 과학 없는 이데올로기는 맹목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맑스주의(하지만 그 이전에 마키아벨리즘)의 독특성을 사고하기 위해

'당파적 과학'이라는 일종의 형용모순

(이는 말하자면 '주관적 객관성', '특수적 보편성'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리고 그 형용모순과 갈등을 북돋는 데 맑스주의의 진실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많은 경우 이 갈등의 한 항을 억압함으로써 결국 맑스주의 자체를 파괴한 것은

아마도 위와 같은 모순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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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1/23 17:50 2008/11/23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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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이야기 보론

엊그제 열차에 관한 글을 썼다.

그리고 그 때쯤 정태춘.박은옥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 글을 쓰고 나서야 의식하게 되었는지,

아님 그 노래가 내 무의식에 기입되어 그 글을 쓰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으나

그들의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에서

앞선 글의 착상 중 하나가 그대로 담겨 있는 걸 발견했다.

 

 

우리는 이 긴긴 터널 길을 실려가는

희망없는 하나의 짐짝들이어서는 안 되지

 

우리는 이 평행선 궤도 위를 달려가는

끝끝내 지칠 줄 모르는 열차 그 자체는

결코 아니지 아니지 우리는

 

무거운 눈꺼풀이 잠시 감기고

깜빡 잠에 얼핏 꿈을 꾸지

열차가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찬란한 햇빛 세상으로

거기 사람들 얼굴마다 삶의 기쁨과 긍지가 충만한

살 만한 인생 그 아름다운 사람들

 

 

중간에 나오는 그 대목이다.

인간,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치적 주체는

'짐짝'(사물)도 아니고, '열차'(신)도 아니다.

그/녀는 피곤에 지친 유한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찬란한 햇빛과 살 만한 인생을 꿈꾸고 거기에 도착할 수 있는 이들이다.

물론 운이 좋아 제대로 된 열차를 타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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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1/18 11:05 2008/11/1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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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후배랑 얘기하면서 생각난 몇 가지

어제(오늘 새벽인가? TT) 한 후배랑 이야기하면서 생각한 것.

 

첫 번째는 결정과 책임, 선택과 정정에 관한 것이다.

나를 데리다의 정치 개념에 처음 입문시켜 준 리샤르 비어스워스는

데리다의 결정 개념이 'less violent'(말하자면 '차악')의 논리를 따른다고 본다.

그가 볼 때 모든 결정은 예외 없이 폭력과 배제를 포함한다.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하거나 벗어났다고 주장하는 결정이야말로

가장 폭력적이라는 게 그의 견해다.

그렇다고 모든 폭력이 같진 않다.

폭력 안에는 정도(degree)가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최소화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등등.

 

내 생각에 이런 사고 이면에 깔려 있는 것은

결정과 선택을 요구하는 상황이란 결코 유쾌하지 않다는 견해다.

특히 선택이라는 관념은, '선택의 자유'라는 관념과 결부되어,

선택이 가능하지 않은 일괴암적인 상황에 비해 긍정적인 상황을 암시한다.

물론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여기서 데리다는

근원적이고 비극적인 '유한성'이라는 문제를 선택과 결정에 추가한다.

말하자면, 신은 선택할 필요가 없다.

선택한다는 것은 여러 갈래의 길을 동시에 가지 못하는 데서 비롯하는 것인데

정의상 전지전능하고, 만물에 편재(omnipresent)하는 신은

무언가를 버리면서 무언가를 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유한자인 인간은, 선택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어서 선택한다.

즉 모든 것을 다 취할 수 없고, 많은 것을 버려야 하기 때문에 선택한다.

이렇게 보면 선택은 필연적으로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한에서, 선택의 기준은 가장 덜 폭력적인 상황,

선택으로 인해 배제되는 가능성들을 최소화하고

그 배제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된다.

 

데리다가 선택/결정만큼이나 '책임'(responsibility)를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책임을 진다는 것이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한 '일관성' 쪽보다는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점에 대한 경청이고 응답인 것은,

선택과 결정이 열어놓은 것이 다름 아닌 끊임없는 '정정'의 시간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자신이 선택한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라진 길들의 소리를 듣고 곁에 눈길을 주는 것,

그게 내가 이해하는 데리다적인 책임이다.

 

이렇게 본다면

선택과 결정은 불가피한 갈라짐과 분기이지만

그/녀들이 책임을 행하는 한에서,

갈라진 길들의 실천적 거리는 의외로 가까울 수 있다.

모든 길들의 본질은 하나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수렴하게 되어 있다는 본질론/목적론이 아니라

이 모두가 완전한 해결책이 아니며 누르고 쫓아낸 목소리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데서

비롯하는 마주침과 수렴의 가능성이 나온다.

공통적 본질은 이질성과 차이에 돌이킬 수 없이 자리를 내어 주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대화와 교통을 불가능하게 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는 정세의 객관성과 당파성이라는 난문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던져 준다.

정세는 객관적이지만, 각자의 관점과 당파성 없이 정세를 파악할 수도 없다는 역설.

내 생각에 '대중들'(the masses)이라는 개념이 입장하는 곳은 바로 여기다.

왜냐하면 대중들이란, 성층론적인 계층론을 비판하는 심지어 맑스적인(곧 관계론적인) '계급' 개념

으로도 약분할 수 없는,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실존하지 않는

동일성 형성/동일화의 복잡성과 불균등성을 묘사하고 또한 처방하는 개념

(더 정확히는 '비개념')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각자의 관점과 당파성을 가지고 정세를 파악한다.

그것이 객관적인지 여부는, 대중들과의 마주침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대중들 안 깊숙한 어딘가에 모종의 공통적 본질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애초에 취한 입장을 통해서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복잡성과 이질성들이

우리의 관점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해체함으로써 우리를 변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거대한 충돌과 긴장의 공간('주체'가 아니라)이 바로 대중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이 곳은 막대한 폭력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 점을 가장 탁월하게 묘사한 것은, 물론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다.)

그렇지만 이것과 대면하지 않는 한 어떤 진리도 만날 수 없는 공간이기도 하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견한, 발리바르와의 워크샵 정리문

(http://www.mcrg.ac.in/Report_Etienne.htm)에서

나는 발리바르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관련된 부분은 다음이다:

 

In the History of 20th C, Heidegger in his seminal work on Time and Being analysed the category of the ‘event’. Certain contemporary philosophers also contributed to the theory of the event. In Foucault and Althusser’s work the category of “event” was part of the critique of the teleological time. In this context he reminded us that philosophy of the “event” is also about philosophy of the “present”. This is explicit in Foucault’s later interest in Kant’s Essay “What is Enlightenment?” For the first time Philosophers were debating with their own ideas; i.e, what makes the time singular and specific and how the old and new are fighting together. The leanings of these ideas can be found on concrete analysis of “concrete” moment.

In this context Balibar highlighted that the concepts of “over determination” and “under determination” should be taken together. Concept of “conjecture” is some kind of trope. Althusser and Foucault break away from the conventional use of “event” and instead uses it in a radical sense. He recalled his conversation with one of his friends when he went to Algeria as a Peace Corps Volunteer. His friend was the leader of the Maoist Students organization who felt that he was obsessed with theory. Prof. Balibar reflected on what drives him to find the subject of the theory. One possibility could be divine intervention; the other possibility, and the relevant one is “masses”. Masses have been the center of Mao’s writings. For Balibar, this question obsessed him throughout his life. 

It is through encounter with masses, meeting people and institutions one can locate the spirit of the times. It is important to disentangle the “social” of social movements, to understand the differences and crystallize discourses, practices and institutions. His personal experience is that “differences” are never absolute which make communication and sharing of experiences inexplicable. This is why he is favour of “‘dialogic’ way of making philosophy” as it speaks of “plurality of voices”.> (강조는 나)

 

물론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후배와 대화하면서 생겨난 착상을 가지고

그가 얘기한 것을 나름대로 이해해 보려는 사고 실험을 한 것이다. 또는 역으로

그의 얘기가 활동가들의 고민에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한 것이기도 하다.

 

돌이켜 보면, 알던 후배들 말고 전에 몰랐던 후배들을

이렇게 많이 본 게 참 오랜만인데,

문득 과학생회, 학회 시절이 생각났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한국 사회 그 어떤 공간에서도

그만큼 풍성한 대중운동을 경험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후배들을 만나면서 그 시간과 다시 마주치는 듯했다.

그리고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렇듯 삶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을 열어 준다.

그래서 사는 게 재밌는 것이겠지.

많은 자극을 준 후배들께 건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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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1/16 19:51 2008/11/16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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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정치(적 행위)가 할 수 있는 일

말년에 알튀세르는 '우발성의 유물론'을 말한다.

거기서 그는 유물론(적 철학)자를, 열차에 몸을 싣는 여행자에 비유한다.

 

그의 주장을 나름대로 해석해 보자면,

주체는, '호기'의 뒷받침이 없다면, 결코 충분히 멀리까지 갈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것인가?

이로써 알튀세르는 정치(적 행위)의 문제를

거대한 필연성의 바다 안에 허무주의적으로 익사시키고 만 것인가?

 

우리는 아무리 뛰어도 열차처럼 빨리 갈 수 없다.

하지만 열차가 올 때 정거장에 도착해 있을 정도로는, 빨리 갈 수 있다.

역량이 적은 자와 많은 자의 차이는,

정거장에 10분 먼저 도착하느냐, 10분 늦게 도착하느냐 라는

참으로 미미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작은 차이로 열차에 타느냐 마느냐가 좌우되고,

이로써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니게 된다.

 

물론 사태는 훨씬 더 복잡하다.

일단 역사의 열차에겐 예정된 시간표 따위가 없다.

역량이 출중해 너무 일찍 도착한 사람은,

일찍 도착한 시간 + 역사의 열차가 연착한 시간만큼을 목놓아 기다리다가

불과 몇 분 있다 도착할 열차를 만나지 못한 채 지쳐 떠날 수도 있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즉 오직 역량이 아주 출중한 사람만이 탈 수 있을 만큼

이른 시간에 열차가 도착할 수도 있다.)

반면 꼴찌나 다름 없이 늦게 온 이가 '때맞춰' 도착할 수도 있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 열차가 '타이타닉'이 될 수도 있다...

열차를 타지 않은 것이 그/녀에게 비길 데 없는 행운이 될 수도 있고,

일찌감치 포기해 다른 곳으로 간 이가 제대로 된 열차를 탈 수도 있다.

너무 힘들어 쉬던 곳에 문득 (토토로에 나오는) '고양이 버스' 같은 게 도착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일어날 수 있었을', 그러나 '일어나지 않은',

그렇다고 해서 '일어날 수 없'다고 할 수는 없는 수많은 사건들의

마주침과 엇갈림, 과잉결정과 과소결정 안에서 살아간다.

(내가 이해하기에, 데리다가 문학을 중시하는 것은

그것이 이 과소결정된 사건들을 과잉결정된 것으로 체험케 함으로써,

세계를 다른 식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운명 개념을 복잡화하고, 예정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전제로,

그러나 앞서 말했던 것처럼 주체의 정치(적 행위)는

정거장에 당도하는, 단 몇 분에 불과한 미미한 차이,

심지어 그 순간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고

오직 그 순간 이후의 사후적 전개 속에서만 분화를 낳는

그런 '특이점'(singular point)에서의 '차이 없는 차이'

를 만들어 낼 수 있고, 그런 한에서 역사를 바꿀 수 있다.

 

역사의 열차가 울리는 우렁찬 기적 소리가 점점 더 분명히 들리기 시작하는 이 때,

(물론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 몸체보다 소리가 늦게 도착할 수도 있다.)

우리의 청력과 시력을 그러나 우리의 각력은 따라가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설사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하더라도

저 변덕스러운 열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정거장을 지난다고 할 때

저 열차가 휘날리는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움켜쥘 악력,

설사 움켜쥐었다 하더라도

수많은 서부영화에서 나오듯 열차의 잔등에 타지 못하고

땅바닥에 질질 끌려갈 때 떨어져 나가지 않고 버틸 완력과 지구력,

그것이 우리에겐 여전히 부족하지 않은가?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그것을 갖추어 열차에 올라탄 결과, 빙산에 부딪쳐 침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로써 역사와 힘을 겨뤄 보기라도 하는 것이,

열차가 떠난 뒤에 스스로에 대한 온갖 자책에 휩싸이는 것보다는,

그 종착지 여부에 관계없이 훨씬 덜 후회스러운,

그리고 극한에서는 다만 아쉬울 뿐인 삶이라는 것이다.

선인들의 말대로,

주체의 정치(적 행위)의 영역은 '진인사'(盡人事)일 뿐이고,

그 다음은 '대천명'(待天命)일 것이다.

 

패는 분배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판돈을 마련하고, 판돈을 걸고,

만약 가능하다면, 아마도 손목을 걸어야 하겠지만,

밑장빼기라도 연습해 두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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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1/16 17:08 2008/11/16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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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에 관한 몇 가지 생각

깊이 읽지 못했지만

내게 가장 많은 관심과 흥미를 일으키는 철학자가 바로 데리다다.

 

최근까지 그의 작업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개념이

바로 '불가능성'(the impossible)이었다.

페넬로페 도이처가 쓴 'HOW To READ 데리다'(웅진 지식하우스)

(지나가는 김에 말하자면,

이 책 역자인 변성찬 씨가 역자 후기에서

들뢰즈와 데리다가 각각 유물론과 관념론 진영에 속한다

고 내린 평가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데리다를 얼마나 읽었는지 모르지만 그 용기가 부럽다.

이와 함께 'negotiation'을 '타협'이라고 번역한 것도 문제다.

통상 'compromise'를 타협이라 새기고, 'negotiation'은 교섭/협상으로 새긴다.

이 논리는 노조가 자본가와 '교섭/협상'하는 것이 곧 자본가와 '타협'하는 것이라는 얘기와 같다.

자신이 텍스트 '외부'에 주목하는 보다 혁명적인 진영에 속한다고 뽐내는 거야 본인 자유지만

그러려고 다른 이의 주장을, 그것도 역자가 이런 식으로 폄하하는 것은

내 상식으론 참 이해하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페넬로페 도이처도 참 좋아하는 철학자인데

이 역자 후기 땜에 짜증이 확 났다.)

를 읽다가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물론 틀릴 가능성이 많겠지만...

 

칸트와 데리다 모두에게 불가능성은 '이상'(the ideal)의 문제와 관련된다.

하지만 칸트에게서 불가능성은 실재적/현실적 차원의 문제이지만,

데리다에게 불가능성은 상상적/상징적 차원의 문제가 아닐까?

즉 칸트에게 있어 불가능성이란 실재/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며,

다만 상상/상징계에서 규제적 이념(regulative idea)으로 역할할 수 있다.

반면 데리다에게 있어 불가능성이란 실재/현실에서는 (매양, 또는 드물게) 일어나는 것이지만,

기존 상상/상징계의 지평, 이 지평 안에서 우리가 '가능한 것'(the possible)으로 체험하는

'정상적인 것'(the normal)을 깨뜨리는 효과를 낸다.

 

예컨대 과거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은

실재/현실적으로는, 또는 물리 법칙 면에서 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사회적인 상상/상징계에 따라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 곧 불가능한 일이 된다.

예컨대 우리가 '말도 안 돼!(That's impossible!)'라고 외칠 때 우리가 체험하는 바로 그것을

데리다는 '불가능성'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이건 지젝이 이야기하는 것과도 유사하다.

사실 지젝이 데리다(또는 알튀세르)를 폄하하지 못해 안달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되면서도,

그가 하는 모든 이야기가 결국 다른 누군가가 한 이야기라는 데서 오는 불안의 결과라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불가능성은 체험할 수 없는 것이기는커녕

우리가 (매양, 또는 드물게) 체험하는 것이다.

여기서 체험/경험의 문제가 나오는데

내가 데리다에 관해 가장 모르는, 그의 중요한 지적 원천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현상학

의 비판적 전유가 여기에서 중요한 것 같다.

좀 더 고민할 문제.

 

시간이 없어서 오늘은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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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1/12 17:14 2008/11/12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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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하거나, 안/못 하거나

요즘 새삼 느끼는 것은

뭔가를 한다면 제대로 하거나, 아예 안/못하거나, 해야지

어중간하게 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대로' 한다는 것은, 꼭 '잘' 한다는 것,

교육 쪽에서 많이 쓰는 표현으로 '수월성'(秀越性, excellency)을 발휘한다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무협지의 교훈대로 천외천(天外天)이 있는 법이니,

수월성을 추구하다 보면 악무한에 빠지게 마련이다.

 

다만, 모종의 문턱,

그것을 넘지 못하는 한 1도이든 99도이든, 모두 수증기가 아닌 물에 머무는

그런 임계점은 있는 것 같다.

광활한 허허벌판을 헤매다가

드디어 찾던 집 문고리를 잡는 입문(入門)의 순간,

앞으로도 많은 길이 남아 있지만

그 지점을 넘으면 어쨌든 그럭저럭 해 갈 수 있는 불귀점(不歸點).

 

그 문턱을 넘지 못하는 한

나는 다른 세계로 입장하지 못한다.

아무리 그 세계와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끼더라도,

단지 1도의 열이 부족할 뿐인데 라고 투덜거리더라도,

내가 여전히 이 세계에 머문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문턱 근처에 있는 이는 더욱 슬프다.

이 세계에도, 저 세계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자.

사람들은 그를 흔히 '유령'이라고 부른다.

또는 '박쥐'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 내가 슬픈 것은

내가 정말로 유령이거나 박쥐이기 때문이 아니라

유령/박쥐가 되지 못한 채, 유령/박쥐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하는 문턱이

눈 앞에서 끊임없이 달아나기 때문,

또는 내가 딛은 문턱이 끊임없이 늘어나 흡사 연옥이 되고

그 곳에서 제논의 거북이를 쫓는 아킬레우스 같은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분업을 받아들일 수도, 그렇다고 분업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는

이 결정불가능한 곳 앞에, 또는 그 한 가운데 나는 있다.

그리고 우유부단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옥은 넓어지고

문득 길을 잃고, 다시 길을 찾고, 또 길을 잃는

허깨비의 삶은 계속된다.

 

이것이 돌파하지 못한 자에게 내려진 형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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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1/10 15:40 2008/11/10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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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고는 전진하고 있는가, 또는...

나의 가장 큰 단점은 지속하지 못하고, 매듭짓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고에 관해서도 그렇다.

개인적으로 얼마간 꾸준히 읽었다고 자평하는 한두 명의 저자 및 책이 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하곤 내가 대략 2003년부터 2005년 정도까지

읽었던 여러 가지 책들은 거의 하나도 매듭짓지 못했다.

정신분석학이든, 언어학이든, 정치철학이든, 윤리학이든, 페미니즘이든, 예술이든, 스피노자든...

 

매듭을 짓지 못했으니 그 대부분은 잊히었다.

이 블로그 만든 걸 계기로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에 쓰던 글을 다시 읽게 됐는데

그 때 내가 부딪쳤던 벽을 거의 하나도 넘지 못했을 뿐더러

대개는 후퇴한 걸 보니 우울해진다.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적어도 한두 가지 정도는

다른 이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손에 익어야 하고

그것이 어느 정도 식상해질 즈음에 새롭게 내놓을 수 있을

다른 사고들이 바로 지금 꾸준히 익어가는 중이어야 하지 않을까.

 

서른이 넘으면서 점점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 불안(anxiety), 행동을 강박하는 이 정서를 또 다시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다시 스스로를 다잡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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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4 14:18 2008/10/24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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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항우는 28세에 '패왕'의 자리에 올라 32세에 죽었으며,
제갈량이 삼고초려 끝에 유비를 따라나선 것은 27세였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의 제2서기장에 오른 것이 30세요,
스피노자의 모든 위대한 저작들은 46세 전에 쓰여졌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쓴 것은 31세,
레닌이 상트페테르부르크 해방동맹을 결성한 것은 26세,
마오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이 된 것은 32세,
박헌영이 조공 결성과 함께 고려공청책임비서가 된 것은 26세였다.
그리고 발리바르가 <'자본'을 읽자>를 출판한 것은 24세였다.

일단 생각나는대로 적어보았지만
이 목록은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은 나이가 어리다'는 변명이 설 자리를 제거하기 위해서.

추신:
목록을 적고 보니 여성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한두명을 부랴부랴 끼워 넣느니,
나의 사고 안에 있는 저 엄정한 결여를
그 자체로 드러내는 게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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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15:12 2008/10/22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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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와 냉소주의

역시 2003년 쯤에 쓴 글.

 

난 지금도 살레츨의 이 분석이 극히 흥미롭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한 번 다시 읽고 싶은 내용이다.

현실 사회주의를 경험한 이들이 그 이데올로기의 실패를 증언하는 내용일 뿐더러

내가 지젝 등에게 관심을 갖게 된 가장 결정적 분석인 '냉소주의' 문제를

역사적 전거를 가지고 논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초 나름대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거쳤는데

지금도 내 동료들에게 쉽게 건네지 못하는 질문이 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한편으로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을 들을까 봐 두렵고

다른 편으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를 들을까 봐 두렵다.

전자는, 이제 그/녀들과 정말이지 완전히 이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까 두려워서고

후자는, 내가 그들을 '벌거벗은 임금님'의 백성들과 같은 상황에 몰아 넣었다는

죄책감이 들까 두려워서다.

어느 쪽이든 나에겐 고통을 재생하고 연장하는 일이다.

 

어쨌든, 이런저런 일 때문에 다시 살레츨의 책을 읽어 보고 싶다.

 

--------------

 

일요일에 하기로 한 스피노자 세미나가 연기된 김에
그냥 이책저책을 떠들어 보다가
슬로베니아 학파의 한명인 레나타 살레츨을 읽기 시작했다.

전부터 생각만 하고 못 읽었던 글,
<'Normalization' in the socialist regime>부터 읽었는데
과연 아주 흥미롭다.
그녀에 따르면 사회주의(사례로서 유고슬라비아)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요체는
공식 이데올로기의 나이브함 + 사적 이데올로기의 냉소주의였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도 공식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냉소적 거리두기/위반이 그것을 전복하기는커녕
오히려 필수불가결한 보충물로 기능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목표가 바로 이 냉소주의였다는 점이다.

냉소주의가 정치적 수동화를 낳는 것은 기본이다.
살레츨이 자신의 정신분석적 문제틀로 고유하게 기여하는 것은
이같은 냉소주의가 '죄책감'
(잘은 모르지만 정신분석은 이것이 상징과의 괴리 및 '비일관성'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하는 것 같다. 언젠가 칸트는 누군가 법을 어길 수는 있지만 거기서 나오는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고 말했는데,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즉 법에 대한 동의 여부에 상관없이 그것이 '법'(즉 지배적 상징)인 한, 그것에 대한 위반은 죄책감을 낳는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아무리 나쁜(물론 법 이전에 이에 대한 기준은 없다) 행동이라 해도 법에 의해 범죄로 지정되지 않는다면 죄책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즉 죄는 법의 사후 효과다)
을 낳고 이에 의해 '초-자아'가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음을 지적함으로써다.
말하자면 이렇다.
누구도 공식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고, 그것을 '속이면서' 각자의 '사생활'을 누린다.
그런데 또한 누구나 공식 이데올로기의 '정상적' 작동이
자신의 '사생활'의 보호와 체계적으로 연루되어 있음을 알고,
또한 '사생활'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즉 공적으로 표명되면)
공식 이데올로기의 작동을 교란시키고 따라서 결국 '사생활'을 파괴할 것 역시 알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공식 이데올로기의 우산 하에서 '사생활'을 누리는 모두
로 하여금 (그 강도가 어느 정도이건) 죄책감과 위협감을 겪게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녀들은 자신들의 '행복'이
공식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기'에 의해 지탱된다는 것,
어쨌든 사기는 나쁜 것일 뿐만 아니라
이같은 사기가 일반화되면 결국 공식 이데올로기가 붕괴될 것인데
모든 사람이 다 사기를 치고 있음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녀들은 공식 이데올로기를 전혀 믿지 않으면서도
보다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공식 이데올로기의 '외양'을 보존하는 데 호들갑을 떤다.
그것이 누구에 의해서도 신뢰받지 못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외양'마저 위협받으면 체계는 곧장 붕괴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왕의 권위가 침해되면 왕국이 붕괴한다는 것,
그런데 왕이 옷을 입고 있지 않다는 것, 더구나 그 사실을 모두가 다 알기 때문에
그에 대한 단 한마디의 공적 표명조차 충분히 일으킬 수 있는
엄청난 파급력을 두려워 해 침묵을 지켰던
안데르센의 '벌거벗은 임금님'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이같은 일반화된 죄책감과 위협감은 '초-자아'의 개입을 쉽게 만든다.
즉 다들 '사기'를 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누군가에 대한 초-자아적 개입에 강력히 반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심지어 내심 그것을 요구한다.
초-자아가 없으면 공식 이데올로기가 붕괴하고
따라서 자신의 사생활도 위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배계급에게 가장 좋은 상황은 바로 이것이고
따라서 지배계급 역시 공식 이데올로기의 준수가 아닌
냉소주의의 확산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살레츨의 이 같은 분석은
'현실사회주의'의 핵심 모순이 (전체주의적) '광신'이라는
통속적 관념과 근본적으로 대립한다.
즉 실제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냉소주의',
공식 이데올로기를 전혀 믿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외양'을 유지하려 했던 냉소적 실천이다.
(언젠가 홉스봄이 든 유명한 사례에 따르면, 서구의 저널리스트가 동구의 인민에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누구인지 물었더니 레닌의 후배 아닌가 라고 대답했던 것처럼 그/녀들은 전혀 '광신도'가 아니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살레츨의 분석은 사회주의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체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자본주의-자유주의/사민주의를 지탱하는 것 역시 냉소주의이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누군가의 용어를 빌자면 '시장전체주의')는 바로 이것으로부터 나온 초-자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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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0/22 14:48 2008/10/22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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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행복

2003년쯤에 쓴 글.

아마 한창 지젝을 읽던 중에 쓴 것 같다.

얼마 전 한 새내기가 이랜드 노동자들 앞에서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것'이라고 발언하는 걸 들었는데

문득 옛날에 쓴 이 글이 생각났다.

 

지금이라면 약간 다른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젝이 여기서 설정하는 진리/행복의 대당은

결국 칸트의 의무/행복 대당에 기초한 것일 텐데

그것은 본래 '행복'이라는 욕망에 눈이 멀어 봉기를 일으킨 프랑스 혁명의 대중들을

꾸짖기 위한 도식이기 때문이다.

행복과 일상이라는 문제, 대중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고민이다.

내가 지젝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

내가 계몽주의적 경향에 끊임없이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후기 알튀세르('이론의 이중적 기입')와 스피노자에게 동의를 보낸 것도 결국 그 때문이다.

 

다만 행복/일상의 언표 역시 계급에 따라 다른 효과를 내고

상대적으로 지배 계급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은 자들이 저런 얘기를 늘어놓는 것은

대개 반동적이다. 그냥 '착실하게' 살았다면 나에게도 가입 기회가 있었을 지배 계급

의 유혹과 아직 싸우고 있었을 때였으므로

나에겐 저 처방이 필요했다. 물론 앞으로도 '타락'을 막기 위해서는

항상 필요한 처방이기도 할 것이다.

 

------------

 

행복을 얼마간 부정적인 뉘앙스의 '일상'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국한시킨다면,
진리와 행복은 모순적이거나 심지어 적대적이지 않을까.

노동자가 마르크스주의를 배우는 것, 여성이 페미니즘을 배우는 것이
행복이 아닌 것처럼.

2001년(이었나...?)을 뜨겁게 달궜던
대우차 파업의 와중에 있었던 한 해고노동자가
이제 복직이 되어 다시 한 명의 '가장'으로 설 수 있었을 때
그의 가족에 흐르는 그 행복을 TV 다큐멘터리에서 스쳐가듯 목격했을 때
나는 까마득함 같은 걸 느꼈다.

그와 그의 아내, 자식들을 '속물' 따위로 바라봤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다만 진리와 행복 사이에 존재하는 그 거대한 간극 앞에서
휘청거리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이다.
그/녀들에게 '진리'를 말한다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에 대해서
내가 너무 고민하지 못했음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럴진대, (쁘띠 이상의) 부르주아와 남성이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을 배운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문득 이리가레의 'Speculum'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의 책을 펴들었을 때
나는 남성 및 가부장제에 포섭된 여성에 대한 거의 완벽한 사고가
프로이트와 그의 (이단을 포함한) 후계자들에게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남성이 페미니즘에 대해 안다는 것에 대해 나는 그동안 너무 간단히 생각했다.
일반적인 기준에 비추어 별로 '남자답지 못한 남자'로서
별로 누리고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남성성에 내가 어떤 식으로 포섭되어 있는지를
머리 속에 들어왔다 간 것처럼 꿰뚫는 그/녀들 앞에서
나는 하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의 진리는 나의 일상과 행복을 완전히 붕괴시켜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아마 곧, 혹은 이미 지금이나 과거부터
진리에 대한 본격적 저항이 발동할 것 같다는 예감.

진리는 파괴적이다.
진리는 비타협적이다. 따라서 진리는
잔혹하다.
그것은 따라서 행복의 반대편에 있거나
적어도 행복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진리는 그것에 고유한 어떤 행복을 분비하지만
그 행복은 진리를 부인하며 구축된 질서의 그것에 비하자면 너무 미약하다.

따라서 진리에 충실한 사고/정치가
붕괴론(혹은 비극)과 친화적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람들이 만일 진리를 따른다면 그것은
기존의 행복에 대해 더 '우월한' 행복을 진리가 약속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기존의 행복이 불가능해졌고
새로운 행복을 기초할 수 있기 위해 다시 진리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기 때문에.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정치적 진리/사건이었던
10월 혁명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므로 나는 행복을 비웃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것의 붕괴를 재촉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의 불가능성을 가슴 깊이 슬퍼하고
새로운 행복을 기초짓기 위해 통과해야만 하는
어떤 잔혹을 거부하려 들지 않기만 할 것이다.
그것이 행복을 해치는 것이라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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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0/22 14:07 2008/10/22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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