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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3(오늘) 7시, 서울역에 모입시다!

사람을 죽여 놓고 저렇게 뻔뻔한 작자들.

죽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불안한 처지에 눈물 흘리는 유아적인 작자들.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반성을 못할 망정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작자들.

여론의 추이를 보고 책임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비겁한 작자들.

결국, 믿을 것은 우리의 힘이요 연대 뿐입니다.

 

chul_web.jpg

 

이명박 정부의 학살만행,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원통하게 죽어간 이들의 넋을 기리며 함께 모여 외칩시다!

범국민추모대회

 

일시 : 1월 23일(금) 오후 7시

장소 : 서울역광장

주최 : 이명박정권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

(http://mbout.jinbo.net)

 

- 철거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살인진압 규탄한다!

- 살인진압 폭력만행 책임자를 처벌하라!

- 정부와 검찰은 사건 왜곡과 은폐 기도를 즉각 중단하라!

- 살인적인 재개발정책 즉각 중단하라!

- 노동자민중 다 죽이는 이명박 정권 퇴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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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1/22 23:52 2009/01/22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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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적인 살인

이게 살인이 아니면 뭐가 살인일까?

 

국가 폭력에서 특히 무서운 점은, 이 폭력배들이

자신들은 대중들의 '대항폭력'에 맞서 '법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공직자/공무원'으로서 '정당한 법 집행'을 했을 뿐이라며 스스로의 정당성을 확신한다는 점이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들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기에 책임이 없다고 변명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비판에 대해,

'법은 법이다'라는 주문을 되뇌인다.

하지만 역사적 비극과 그에 대한 반성을 거치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잔혹 중 하나였던 유태인 학살이

철저히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그 집행자 중 한 명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자신은 국가가 합법적으로 부과한 의무에 충실했을 뿐이므로

무죄라고 스스로를 변론했다는 것을.

사고(思考)와 저항 없이 법에게 바치는 절대적 복종,

그것이야말로 가장 거대한 악의 뿌리라는 것을,

자유주의자들이 페스트처럼 싫어하는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것을.

 

"이번 사고가 과격 시위의 악순환을 끊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청와대 부대변인이라는 작자의 개소리나,

"우리는 임무를 다한 것 뿐"이며

"이런 말하면 또 욕먹겠지만 정의가 없는 사회인 거 같다. 우리 편은 어디에도 없다"

며 '절규'했다는 특공대원 S 씨의 말을 듣자니,

우리 나라 지배 계급들과 그 집행자들에게 새삼스레 절망감이 든다.

사람을 죽였으면 그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일단 죄책감을 느끼고 입을 닥쳐야 하지 않을까?

뭐 좀 도덕적인 얘기긴 하다. 정치란 그런 게 아니겠지.

 

그렇긴 한데도, 이 바닥을 모르는 우리 나라 지배 계급들

(물론 이건 전용철, 홍덕표, 하중근, 허세욱 열사를 죽인,

더욱이 '분신'을 수단으로 한 공세에 굴하지 않겠다고 지껄인 노무현 부류들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의 윤리 수준을 보면, 참으로 환멸이 든다.

제발 입 좀 다물어라. 확 찢어 버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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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1/21 15:07 2009/01/21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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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이란

전통적 의미에서 '존재론'이 아니다.

즉 존재를 결정하는 일차적 원리가 '물질'인지, '정신'인지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알튀세르 등의 철학자가 분명히 한 것처럼,

유물론이란 관념론 비판이다. 그의 제자 발리바르의 좀 더 상세한 설명을 빌자면,

"그것[맑스의 유물론]은 본질적으로 2차적인 입장으로서, 즉 개인들의 노동 및 사회적 생산을 결정하는 현실성을 은폐, 기만[신비화], 억압하는 (추상적, 사변적인, 등등의) 관념론적 표상들/환상들에 대한 비판으로서, 제시된다."(에티엔 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pp. 218~219, 도서출판 b, 2007)

 

(물론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발리바르가 즉각 덧붙이는 것처럼,

"무엇보다도, 역사유물론은 그 자체로서, 역사와 정치에 대한 관념론적 표상들의 형성 및 현실적 생산의 과정에 대한, 요컨대 관념화 과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에 대한 분석 프로그램이다. (…) 역사유물론은, 역사의 관념화는 그 자체가 결정된 역사의 필연적 결과임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구성"(같은 책, p. 219)되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의 문제이므로,

유물론/관념론이라고 할 때 쟁점이 되는 철학의 문제를 다소 초과하지만,

유물론적 비판이 진리/허위라는 인식론적 대당에 갇히지 않는다

는 점을 말하기 위해 덧붙인다.)

 

유물론은 본질적으로 2차적이고, 말하자면 (대체)보충적(supplementary)이다.

하지만 이것이 유물론의 습득을 더 쉽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사태는 반대일 수 있다. 자기완결적인 유물론의 체계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말하자면 유물론의 '교과서'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유물론에 접근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유물론에 접근하려면

그것이 비판 대상으로 삼는 관념론을 알아야 하며, 더욱이 그 구조와 모순과 아포리아와 분기점

들에 대한 철저한 파악에 입각해 이를 사후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관념론에도 역사가 있고, 정세에 따라 관념론의 지배적 형태가 변화하므로,

또한 관념론에 대한 유물론적 비판이 항상-아직 관념론적으로 전유될 수 있으므로,

(한편 역으로 관념론의 어떤 요소가 특정 정세에서 유물론적 효과를 산출할 수 있으므로)

특정한 정세에서의 유물론(적 효과)이 다른 정세에서도 지속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유물론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은,

'오늘 이 곳에서 유물론(적 효과)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세적 질문으로 대체된다.

조건이나 관계와 분리된 본질을 서술하는 게 아니라

조건이나 관계에 대한 날카로운(곧 모순을 움켜쥘 수 있는) 분석이 문제이므로

과학이나 정치 따위의 비철학적 사고/실천들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그러나 유물론적 철학은 과학이나 정치로 환원할 수 없다.

특히 과학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보자.

간단히 말하자면 과학이란, 주어진 문제에 대한 문제 해결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항상 과학이 다루는 것보다 많은 문제들이 있다.

또 어떤 문제에 대한 선택과 해법은 착취 체계를 강화할 수 있고,

다른 문제에 대한 선택과 해법은 그 역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전자를 '부르주아 과학', 후자를 '프롤레타리아 과학'이라 부를 순 없다.

또한 과학에 대한 부르주아적 전유가 되풀이되면서 만들어진

현재의 지배적 과학 형태로부터 '과학 일반 = 부르주아적 사고 형태'라는 결론을 추론한 후

과학 일반을 거부하는 것 역시 논리적으로는 비약이며, 정치적으로는 무장해제일 뿐이다.

 

문제는 부르주아적으로 전유된 과학의 지배적 형태를 해체하고

과학을 해방적으로 전유하면서 개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특정한 문제 안에 걸려 있는 쟁점을 드러내고, 해방에 긴급한 문제를 제기하며,

기존의 과학적 문제 해결 과정 안에 스며들어 있는(따라서 과학의 과학성을 억압하는)

관념론적 사고를 비판하고, 이 해법이 산출하는 과학외적 효과를 반성하는

말의 강한 의미에서 '철학적' 사고를 요청한다. 알튀세르가 말한 것처럼

정치가 과학 쪽에 파견한 사고라는 의미에서의 '철학'을.

 

알튀세르가 굳이 철학을 말하는 것은, 정치와 과학의 외재적 관계가 미치는 효과

(자본주의 안에서 수없이 나타나지만,

'뤼셍코주의'에서 보듯 현실사회주의 역시 비극적으로 체험한)

를 경계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철학이란

정치와 과학 사이의 '취해진 내적 거리', 서로가 서로를 환원하지 않으면서도 분리되지 않는,

긴장적이고 갈등적인 묶음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는 관념론적 철학이 항상-이미 점유하고 있는, 따라서 가득 찬 공간이며

(왜냐하면 정치와 과학 자체가 관념론적 철학의 깊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방적 정치와 과학에게 필요한 '이데올로기적 공백'을 쟁취하기 위해

관념론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투쟁의 공간이다.

 

오늘날 유물론을 말한다면, 또는 누가 유물론 철학인가를 판단하려면,

오늘날 해방과 변혁, 연대 등을 위해 가장 긴급히 사고해야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기존의 정치적/과학적/철학적 사고 안 어떤 요소가 이 같은 사고를 억압하는지,

특정한 입장취함의 노림수와 위험부담은 무엇인지 등을 반성해야 한다.

이견과 갈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진리적 사고 과정의 구성적 요소라면

아마도 이를 묶으면서 그 에너지를 동력으로 삼을 수 있는 그런 기예와 윤리가

오늘날 유물론의 (충분조건은 아니더라도) 필요조건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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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1/13 15:33 2009/01/13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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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 규정하는 근원적인 갈등

중 하나를 흔히 '개인과 국가' 사이의 갈등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더 근원적인 갈등이 있다. 그것은

'일차적 공동체와 이차적 공동체' 사이의 갈등이다.

왜냐하면 '개인'이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일차적 공동체에서 해방되어 기존의 공동체가 제공하는 자원을 초과하는

새로운 자원들을 제공해 주는 새로운 관계들 및 공동체들과 접속하고

그 자원들을 독특하게 결합시켜 자신만의 개인(성)을 만듦으로써 비로소 '획득'되는 결과이며,

이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 중 하나가 바로

일차적 공동체와 이차적 공동체 사이의 갈등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개인이라는 자율적 존재와 국가라는 대표적인 이차적 공동체 사이의 갈등이 있는 것이다.

 

한 종족, 한 가문, 한 신분 따위의 일차적 공동체에 절대적으로 소속될 때

강한 의미에서의 개인(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차적 공동체는, 이 역시 공동체인 한에서, 개인(성)의 가능성을 축소할 것이지만,

(물론 공동체가 제공하는 자원이 없다면 개인(성)은 아예 존재할 수 없다.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언어다. 언어 없는 개인, 아니 인간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것이 일차적 공동체와 맞서는 한에서는, 개인(성)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바로 이 같은 모순이, 국가의 모순의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를 이룬다.

 

이로부터 몇 가지 중요한 결론이 따라 나온다.

 

국가 이전의 공동체를 이상화하는 낭만적 아나키즘은

자신들의 주장/바람과는 달리 전혀 개성화를 촉진할 수 없다.

그/녀들은 개인화/개성화의 역사적 조건, 그것과 국가의 (모순적이지만) 내재적인 관계,

또 일차적 공동체가 개인(성)에 가하는 제약을 제대로 사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오늘날 국가의 위기가 개인(성)의 해방으로 이어지기는커녕,

개인(성)의 축소와 한층 배타적인 일차적 공동체의 복귀를 낳는 이 역설 앞에서

다만 당황스러워하거나 고개를 돌릴 뿐이며,

또는 이 위기에 처한 국가의 퇴행과 폭력을 알리바이 삼아

자기 주장이 정당하다고 주장할 뿐이다. 그러나 공동체와 개성화의 사고에 관한 한

낭만적 아나키즘은 단연 근대 국가보다 퇴행적이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근대 국가라는 역사특수적 제도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일차적 공동체를 해체하되, 이로써 공동체(가 제공하는 자원) 없는 원자로 퇴행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맑스가 말한 이중적 'free of', 즉 농노라는 속박에서 벗어났지만,

동시에 기존의 생산/생존 수단을 빼앗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아니라, 이를 더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자원이 풍부한 공동체의 창설로 연결시키는 것,

(근대라는 시대에, 민족 국가의 창설은 바로 이런 사례 중 하나였다)

하지만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공동체가 부과하는 역사적 제약을 다시 넘어서려는

끊임없는 봉기-구성의 '운동'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 운동이 결코 근대 국가 안에 기입되어 있는 역사적 해방의 경험보다

'더 작은' 해방을 지향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점이다.

더 많은 보편성만이 더 많은 개별성/독특성을 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푸코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제기되는 동시에 정치적.윤리적.사회적.철학적인 문제는, 개인을 국가와 그 제도들로부터 해방시키려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국가와 거기에 결부된 개인화/개성화 유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주체화를 촉진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에게 문제는,

근대 국가 이전 또는 그와 분리된 더 작은 해방과 개성으로 퇴행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국가가 표상하는 이차적 공동체에서보다 더 많은 해방과 개성을 향유할 수 있는

더 보편적인 공동체, 더 정확히 말하면 공동체들 간의 '관계',

따라서 더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다원적인 주체화의 궤적과 자원을 구성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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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2/26 18:39 2008/12/26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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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상태란 없다, 그렇다면...

정치 철학에 관한 이런저런 글을 보다가

다시 '자연 상태' 개념으로 되돌아온다.

 

자연 상태 개념을 비판할 때 내기에 걸린 건 무엇인가?

특히 폭력에 관한 사고 측면에서.

 

일단 '기원'(origin) 개념에 대한 비판,

그 너머의 순수한 기원이란 존재하지 않는 '기원적' 복잡성과 불균등성.

따라서 사회/시민 상태, 국가와 제도 이전의 자연 상태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항상-이미' 사회/시민 상태, 국가와 제도가 과잉결정한다.

 

이는 (비)폭력을 말할 때, 그 원인을 기원이나 본성/자연(nature) 편에서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는

홉스(폭력 = 자연 상태 / 비폭력 = 사회 상태)와 루소(비폭력 = 자연 상태 / 폭력 = 사회 상태)

모두를 비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는

자연/사회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아니라, 자연과 사회의 구체적 상호 결정에 관한 역사적 분석

이기 때문이다.

 

물론 홉스와 루소가 제기한 질문,

곧 폭력적인 전쟁 상태(에서 어떻게 '문명'을 건설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비극적이게도, 그 어느 때보다 유효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폭력적인 전쟁 상태는 '前-정치적'이 아니라 '超-정치적'이라는 점,

따라서 단순한 제도 창설과 파괴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

또는 차라리, 폭력의 원인을 자연 상태 쪽으로 돌리고 제도 창설을 그 해법으로 제시한다든지,

역으로 폭력의 원인을 제도의 존재 자체 쪽으로 돌리고 제도의 파괴를 그 해법으로 제시한다든지

하는 접근이야말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는 점이다.

 

스피노자가 등장하는 것은 바로 여기다.

그는 자유주의의 사회계약론적 전통을 비판하면서,

'자연 상태 / 사회 상태'라는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대중들과 국가(제도)라는, 약분할 수 없이 분열된 두 항 사이의 내재적 변증법으로

전위시켰고, 어느 한 쪽을 절대적 선(따라서 다른 한 쪽을 절대적 악)

으로 고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이 같은 노선에서는

(기원적인 것으로 상정되는) '유대'와 '질서'의 문제설정이 근본적으로 해체된다.

모든 개인 사이의 선험적 '일치점' 노릇을 하는 본성이 사라졌으므로

이제 남은 것은 차이와 개별성/독특성(singularity),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갈등 뿐이다.

루소가 말하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자연 상태란 영원히 기각되는 것이다.

물론 홉스는 이 같은 전쟁 상태야말로 자연 상태의 본질이라고 말하면서,

그 해법으로 사회/국가의 창설을 제시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하건대, 자연 상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험적 일치점이 존재하지 않는 만큼, 선험적 차이와 적대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각 개인들은 사회/국가/제도와 분리된 본성을 갖지 않으며,

사회/국가/제도가 작동하면서 산출한 사후적 결과가 바로 각 개인들의 본성이다.

개인들이 서로 갈등한다면, 이는 그/녀들이 원래 갈등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갈등하게끔 사회/국가/제도가 그/녀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주어진 생물학적 질료를 가지고. 이 질료는 또한 역사적으로 규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갈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감축하고 조정하는 것은

사회/국가/제도를 단순히 창설하는 문제가 아니라,

항상-이미 그/녀들의 개성 및 그것들 사이의 갈등에 개입하고 있는

사회/국가/제도를 변혁하고 개조하는 문제가 된다.

(물론 그 계기 중 하나가 새로운 제도의 창설일 수는 있을 것이다.)

 

이 같은 태도는 어떤 의미에서도 낙관주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개별자 사이의 교통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따위의) 비관주의도 아니다.

발리바르가 좋아하는 표현을 쓰자면, 이는 '비극적'인 관점이다.

즉 우리의 역사와 정치와 삶에서 차이와 갈등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우리의 역사와 정치와 삶이 곧 '전쟁 상태'라는 뜻은 아니다.

차이와 갈등은, 특정한 조건에서, 전쟁이 된다.

하지만 다른 조건에서 그것은, 가장 뛰어나고 생명력 있는 문명의 원리가 된다.

또는 이것이 다소 낙관적이라면, 적어도, 차이와 갈등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모든 反문명과 전쟁 상태의 불변수를 이룬다.

 

그러므로 문명과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차이와 갈등을 제거하려 들지 않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익히는 것이다.

때로 괴롭고 때로 스스로가 파괴되는 지경까지 이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차이와 갈등이 없다면 아예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보다 '비극'이라는 말과 잘 어울리는 상황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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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2/26 17:10 2008/12/2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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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 아나키즘 비판의 쟁점 2

broader than the juridical and administrative form that is referred to by that name in the modern period (that is, the period of the bourgeois nation-state). Thus, this definition can help us to envisage, at least in theory, historical forms of the State other than the present form. And it also identifies for us the decisive mechanism by which those new forms can be created: the democratisation of knowledge.>

 

- Etienne Balibar, Spinoza and Politics, p. 124, Verso, 2008(윤소영, 『알튀세르의 현재성』, 공감, 1996에 국역 수록)

 

---------------

 

(국역본이 집에 있는데, 집에서는 인터넷이 되지 않는 관계로

인터넷에서 구한 영역본을 인용한다.)

 

여기서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국가' 개념이

근대 시기, 곧 부르주아 민족-국가 시기에 국가로 지칭되었던 사법적.행정적 형태보다

훨씬 광범위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국가의 현재적 형태와 다른

국가의 역사적 형태가 있을 수 있다고, 스피노자에게서 그 핵심은

지식의 민주화와 관련된다고 말한다.

 

이에 관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 개념을 역사화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결국 국가 개념을 영속화하는 것이라고,

왜 이렇게까지 국가 개념을 고수하려 하는 것이냐고.

 

정치적인 이유가 있고, 이론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전자는, 역사적으로 출현한 '국가 없는'(sans Etat) 상태가,

예컨대 (파시즘으로 이끌린) 국가 붕괴 상태의 독일이나,

파시즘 때문에 추방당한 난민들의 무국적 상태(아렌트의 삶이 생생하게 증언하는),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의 여러 내전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동일성과 안전이 파괴된 극단적 폭력의 한쪽 극

(그 반대쪽 극은 물론 일괴암적 국가주의인 파시즘이다)

이었다는 것과 관련될 것이다.

 

후자는, 그가 스피노자를 따라, 자연 상태에서 시민/사회(곧 국가) 상태로의 이행이라는,

근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신화적 불변수를 완전히 기각하는 것과 관련될 것이다.

자연 상태에는 항상-이미 모종의 시민/사회/국가 상태가 기입되어 있으며,

시민/사회/국가 상태는 항상-아직 자연 상태('대중들'이라고 부르는)의 규정을 받을 것이다.

이와 함께, 그것을 '국가'(state)라 부르든, '도시'(city)라 부르든, '공화국'(republic)이라 부르든,

인민들의 정치적.사회적 권리를, 이상적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물질적 수준에서 설립하고 보장하는 정치체(politeia)의 문제를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가 최근 아렌트를 따라 인권에 대한 시민권('citi'zenship)의 우위를 말하거나,

휜스테렌의 신-공화주의(neo-'republic'anism)를 우호적으로 언급하는 것 등은

이론적 아나키즘과 '노마디즘'에 대한 그의 비타협과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권리의 천부적/자연적 기초란 없고, 오직 현세적/정치적 기초가 있을 뿐이라는

양보할 수 없는 유물론적이고 현실주의적인 노선 위에 그가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다시 정치다.

단 랑시에르처럼 치안(police)과 엄격히 구별되는 정치(politics)라기보다는,

이 두 개념을 한 단어 안에 품고 있던 고대 그리스의 '폴리테이아'(politeia),

그 갈등적 변증법과 유희로서의 정치,

다시 근대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봉기에서 구성으로,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구성에서 다시 봉기로 이어지는 정치가 문제인 것이다.

 

추기: 발리바르는 Politics and the Other Scene, Verso, 2002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틀림없이 랑시에르를 염두에 둔 것이리라.

<'Community' and 'citizenship' have had a problematic relationship since the origins of political thought. (The Greeks had only one word to express these two aspects: politeia, whence we derive our 'politics' as well as our 'police'. But this meant that the contradictions were located within this single concept, and conferred on it an immediately 'dialectical' mea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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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2/17 21:32 2008/12/17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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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란과 랑시에르

<아렌트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를 첫 번째 권리로 설정한다. 우리는 거기에 다음의 것을 덧붙일 수 있다. 타인에게 자신의 권리를 인정하도록 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강제를 부과할 수 있는 자가 권리를 가진다고 말이다. 타인이 매우 자주 그것을 인정하기를 회피한다는 사실은 전혀 근본적으로 문제를 바꾸지 않는다. 원리상 타인이 알아듣지 못할 것이며, 공통의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권리를 인정하도록 만들 수 있는 토대마저 잃어버린다. 반대로 마치 타인이 언제나 자신의 담론을 알아들을 수 있는 듯 행동하는 자는 비단 담론의 구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 자크 랑시에르, 「민주주의의 용법들」, p. 115,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길

 

------------

 

저 대목을 보고, 어디선가 저런 태도가, 아주 인상적인 형태로, 상연된 적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어디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다가

오늘 문득 떠올랐다. <파이란>.

강재를 대한 파이란의 태도가 저런 것 아니었을까?

 

언젠가 <파이란>에 관해 끄적이면서(그 글은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파이란(장백지)을 대하는 송해성 감독의 태도가

은수(이영애)를 대하는 허진호 감독의 태도와 비슷한 것 같다고 적었던 것 같다.

여성을 '타자', 곧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통상적인 이해가능성의 경계를

넘는 존재로 그린다고 느꼈던 것이다.

한 쪽은 남성을 파멸시키는 존재고, 다른 쪽은 남성을 구원하는 존재지만,

결국 남성들이 가진 판타지를 투영해서 만들어낸 불가능한 존재라는 게

그 때 내 생각이었던 것 같다.

 

허진호에 관한 내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에 관한 가장 탁월한, 특히 영화적인 비판은, 여전히 정성일 평론가의 것이다)

하지만 <파이란>에 관해서는, 분명 내가 틀렸다.

<파이란>은 말하자면, 사랑이 (랑시에르적인 의미, 곧 '탈동일화'라는 의미에서) '주체화'

의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또는 뒤집어 말하면,

'주체화'의 효과를 산출하는 한에서 사랑은 다른 모든 위대한 실천들처럼 위대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냉소주의가 판치고, 그렇고그런 시시한 사랑이 넘치는 곳에서,

파이란이 남긴 기록은 참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그 기록과 마주치면서 냉소적이고 야비한 3류 깡패 강재는,

<화려한 휴가>에서 인봉이 말한 것처럼, '양아치에서 인간이' 된다.

곧 파이란이 상징하는, 인간과 시민의 '공통 세계'와 '공통 언어' 안으로 들어온다.

 

<파이란>은 이 냉소적 시대에 위대한 사랑, 또는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이상'의 힘을 말한다. 이 이상과 판타지의 차이점, 그러나 또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 어려운 질문 앞으로 나는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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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2/09 21:22 2008/12/09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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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쓴 농담

어제 한 친구를 만났는데

내가 요새 가장 강하게 동조하는 정서가 억울함이라는 내용의 글이 내 블로그에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런 기억이 없었는데

아마 이금이 씨 책에 관한 글에서

'내가 가장 강하게 동조하는 정서가 억울함'

이라고 한 대목을 얘기한 것 같다.

 

하지만 이건 내가 '요새' 동조하는 정서는 아니고

내가 '원래' 가장 강하게 동조하는 정서다.

이걸 주제로 2004년쯤 글을 하나 쓴 게 있다.

문득 그 글이 생각나 퍼 온다.

 

-------------

 

정신없던 지난 한주를 보내고
이제 원래 하고 있었고 하려 했던 일들을 시작하려 한다.
특히 '정신분석'.
어제 드디어 따로 노트도 만들고 그린 책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당분간은 이거 정리하는 데 주로 힘을 쏟을 참이다.

그린 책을 다시 읽다 보니
'dead mother complex'라는 게 나온다.
죽 읽다가 이걸 '둘리 컴플렉스'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났다.

많은 이들이 기억하겠지만 둘리는
느닷없이 빙하기를 맞아 엄마 공룡과 이별한다.
이때 엄마 공룡은 급속냉동되어 얼음 속에 갇힌다.
즉 '매장'된 것이 아니라 살아 생전의 상태 그대로
그렇지만 차디차게 얼어 접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니 둘리에게 있어 엄마는 죽은 것도 그렇다고 산 것도 아니다.
이게 그린이 말하고자 하는 상황과 유사하지 않은가?

물론 이건 농담이다. 즉 진지하게 하는 얘기는 아니다.
따져 보면 사태에 적합한 개념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굳이 이런 농담을 하는 것은
내가 느끼기에 상황 면에서 좀 유사한 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둘리라는 단어를 통해
'dead mother complex'에 대한 나의 관계를
설정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어릴 때는 그렇게 눈물이 많았으면서
어느 시점 이후에는 전혀 울지 않게 된 후
난 그 사이에 내가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점이 있었겠지만
어릴 적 나를 울게 만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면서
실제로는 내가 그렇게 많이 변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즉 나는 원래부터 '슬퍼서' 울어본 적은 거의 없다.
다만 '서러워서', '억울해서' 울었을 뿐이고,
그러니까 그런 상황을 당한 주인공과 동일화될 때만 울었다.
일종의 '(피해)망상'인 셈이다.

내 기억에 난 '둘리'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그 한 편 동안 세 번 이상을 울었고
다시 볼 때마다 또 울었다.
내가 이 애니메이션을 볼 때쯤엔
눈물이 많이 줄어들었음을 감안할 때 좀 이례적이다.
주로 둘리가 잘못한 게 아닌데 누명을 쓰고 쫓겨나는 장면
에서 울었는데, 이는 망상의 연장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둘리가 그런 상황을 겪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엄마와 그런 식으로 이별했기 때문이다.
그는 엄마와의 이별이 너무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이별의 방식이 외양을 보존한 냉동이었기 때문에
엄마를 '애도'하지 못한다. 그는 항상 엄마가 살아 있다고 믿고,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부당한 대우를 당할 때마다
'1억년전 옛날이 너무나 그리워 보고픈 엄마 찾아 모두 함께 떠나'
려고 한다. 즉 그는 '죽은 엄마'에게 사로잡혀 있다.

난 혹시 그런 둘리와 동일화했던 게 아닐까?
물론 이건 농담이다.
이 같은 둘리의 상태는 그린의 개념과도 많이 다르고
(일단 둘리는 엄마와의 '과거의 행복'을 기억하고 있지만
'dead mother complex'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엄마의 갑작스런 변화 때문에 과거 자체를 상실한다.
그/녀들은 엄마와 이별하면서 사랑의 능력과도 이별한다)
또 내가 둘리의 그런 상태와 동일화했다는 것도 미심쩍다.
(이건 그냥 과거 망상의 연장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이렇게 하는 것은
'재미'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 사실 자체가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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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2/08 21:21 2008/12/08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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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에서 경계로

'~란 무엇인가?'는 본질의 문제설정을 규정하는 핵심 질문이다.

이 같은 본질주의는 여러 가지 인식론적, 정치적 문제를 갖는데

이를 비판할 때 우리가 흔히 부딪칠 수 있는 반론은

'그렇다면 ~을 ~이 아닌 것과 구별하는 개(별)성이 전혀 없단 말인가?'라는 물음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성립한 개(별)성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럴 때는 대개 문제를 얼버무리거나 절충하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을 본질이 아닌 '경계'(border)의 문제로 제기하고

그 기원적 자의성과 사후적 물질성, 곧 '역사성'을 사고한다면

얘기는 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것 중 하나가 (근대) 문학이다.

(하지만 철학이나 예술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분명히 문학이라는 것이 있긴 한 것 같은데,

그것을 어느 하나의 본질로 약분하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모든 게 다 '문학적'이라는 식으로 말하면

문학을 통해서 노리고자 했던 모종의 효과가 다 무화되는 것 같고...

 

최근 문학에 관한 데리다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거기서 그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말한다.

'모든 것을, 모든 방식으로 말하도록 허용하는 제도화된 허구이자, 허구적 제도'라고.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자신의 관습과 규칙 등을 가지고 있는 역사적 제도, 또한 원칙적으로 모든 것을 말하고, 규칙을 자유롭게 깨뜨리며, 규칙을 전위시키고, 이로써 자연과 제도, 자연과 관습적 법, 자연과 역사 사이의 전통적 차이를 설립하고, 발명하며, 심지어 의심하는 힘/권력을 부여하는 허구의 한 가지 제도/설립"(Jacques Derrida, This Strange Institution Called Literature - an interview with Jacques Derrida, p. 37, Acts of Literature, Routledge, 1991)이며,

그런 한에서 그것은 '모든 것을 말하는 것에 대한 권위부여' 및

'근대적인 민주주의 이념의 도래'와 결부되어 있다고.

 

이 같은 관점에 따르면 예컨대 고급 문학 / 대중 문학 등의 구별을 써서 후자를 배제할 순 없는데

왜냐하면 문학은 하나의 경계이자 제도이지, 어떤 본질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관점에 따르면 예컨대 이 같은 제도가 설립되기 이전에 쓰인 기록,

예컨대 호머의 [일리아드], [오디세이] 등은 그 자체로는 문학이 아니다.

다만 이들이 문학이라는 근대적 제도 안에 들어와서

이 제도에 고유한 방식으로 재생산되고 해석되는 한에서,

들뢰즈를 흉내내 말하자면 '문학-되기'(becoming-literature) 운동의 일부가 되는 한에서,

그것은 문학이 된다.

또 일차 목표가 '정치적 효력'의 발효에 있지, '표현의 자유'에 있지 않은 칙령 같은 기록 형태 역시

그 자체로는 문학이 아니다. 물론 그 칙령이 문학이라는 근대적 기록 형태에서 영감을 길어 오고,

또 문학 제도 안에서 그 본래 목표와는 다른 방식으로 전유될 수 있는 한에서,

문학과 무관하지 않고, 나아가 특정 과정을 통해 문학으로 탈바꿈할 수 있지만 말이다.

 

여기서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이 같은 접근이 다양한 문학을 포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으면서도

동시에 문학과 문학이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분명한 기준 역시 갖는다는 점이다.

이는 여기서 사용되는 개념이 '본질'이 아닌 '경계' 또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경계/제도는 한 편과 다른 편을 구별하고

사후적으로 자신의 경계/제도에 속한 것들 안에 심지어 본질 비슷한 것을 (재)생산할 수도 있지만,

설립 때 자의적(arbitrary, '자연적/본성적'(natural)이 아니라 '인공적'(artificial)이라는 의미에서)이고

자신 안에 다양하고 심지어 적대적인 경향들을 포함할 수 있으며

(기원적 자의성을 갖기 때문에) 정치적/역사적으로 변화가능하다.

 

말하자면 발리바르가 루소에게서 취한 질문,

곧 '인민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인민을 인민으로 만드는가?'처럼

'~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을 ~으로 (재)생산하는가?'라고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곳이야말로 정치와 철학이 만나는 곳이다.

레닌, 그리고 그를 읽은 알튀세르가 말한 것처럼

정치는, 그리고 철학은 다름 아닌

선을 긋고, 선을 지우며, 다시 선을 긋는 끝없는 행위 자체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정치와 철학에 고유한 윤리 역시 나올 것이다.

'적법한 강제력'을 정치의 특수한 수단이라고 정의한 막스 베버는

이로부터 '정치의 모든 윤리 문제가 지닌 특수성'이 나온다고 말했다.

곧 '모든 강제력 속에 숨어 있는 악마적인 힘과 관계를 맺는' 것에 관한 반성과 책임이 그것이다.

이런 사고 방식에서 착상을 얻는다면,

이 편과 저 편 사이의 선을 긋는 (자의적) 행위를 정치와 철학의 정수 중 하나라 규정할 때

그 행위자들에게 부과되는 윤리적 문제는 그 무엇보다,

저 편과 이 편이 '적(敵)과 아(我)', 곧 군사주의적 용어로 번역되고,

여기에 적에 속한 이들에 대한 절멸 충동과 아에 속한 이들에 대한 획일화 충동이 달라 붙는 것

을 반성하고 책임지는 것이리라.

 

곧 정치적 갈등과 적대가 군사(주의)적 갈등과 적대로 전환되는 것을 막고,

그렇다고 비폭력과 절대적 평화의 유토피아(아마도 실제로는 디스토피아)

에 따라 정치적 갈등과 적대를 해소하는 것도 아니라,

갈등과 적대를 정치적 형태로 '지속'하고 '보존'하는 것,

그리하여 기존의 구조를 혁신할 새로운 대중들과 정치적 주체가 항상-아직 입장할 수 있는

정치적 틈이 결코 닫히지 않게 투쟁하는 것,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스스로 역사의 메시아로 등장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정치가 아니라

메시아의 도착을 기다리며 그/녀들이 들어 올 문을 열어 놓는 세례자 요한의 정치,

(물론 이는 너무 이분법적이며, 사태는 아마 훨씬 더 내재적이고 변증법적일 것이다)

그것이 지금 내가 이해하는 '시민인륜'(civilite)의 정치의 정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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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2/01 15:57 2008/12/0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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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 아나키즘 비판의 쟁점

퀜틴 스키너의 책을 읽다가 이 문제에 관한 생각을 연장해 본다.

 

<과연 고대 공화국과 같은 민중 국가의 신민들만이 자유롭고 왕국의 신민들은 모두 노예일까? 홉스의 자유론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앞서 보았듯이 홉스에 의하면, 인간이 신민이 된다는 것은 국가 주권에 의해 제정된 법에 의해 안전을 보장받으면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국가의 신민으로 산다는 것은 법에 종속해서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는 간섭과 방해의 부재를 뜻하는데 법도 인간의 행동을 간섭하고 방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민의 자유라는 것은 법이 간섭하지 않고 방해하지 않는 것을 하는 것뿐이다. 즉 신민의 자유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은 바로 법의 침묵에 대해서 논하는 것일 뿐이다.>

- 조승래, 「노예의 자유를 넘어서」, pp. 41~42 (퀜틴 스키너, 『퀜틴 스키너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푸른역사, 2007 수록 논문)

 

자유와 법(따라서 국가)의 관계는 무엇인가?

홉스(를 읽는 스키너를 읽는 조승래)에 따르면 이 문제를 사고하기 위해선

자유 개념을 분할해야 한다. 여기서 이사이아 벌린이 말한 저 유명한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구별이 등장한다.

전자가 '~으로부터의 자유'라면, 후자는 '~에 대한 자유'다.

 

주지하듯 홉스는 자연 상태와 시민/사회 상태를 구별한다.

전자에서 인간은 자유롭지만 그만큼 위험하다.

이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 누리던 자유의 일부를 양도하고 국가(의 법)에 신민으로 종속되면서

그 대가로 안전을 얻는 것, 그것이 바로 시민/사회 상태다.

후자에서 인간은 덜 자유롭지만 그만큼 더 안전하고,

이로써 국가라는 필요악에게 양도한 자유 이외의 나머지 자유를

국가의 보호 아래서 안전하게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바로 홉스의 기획이다.

 

홉스가 볼 때 자연 상태가 끝난 상황에서 적극적 자유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소극적 자유일 뿐이며,

국가(의 법)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말의 강한 의미에서 복종적 관계다.

대신 국가(의 법)이 간섭하지 않고 침묵하는 곳에서 우리는

정말로 안전하게 소극적 자유, 곧 '국가(의 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홉스의 이론이, 아마도 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말의 강한 의미에서 '이론적 아나키즘'으로 전유될 수 있음을 발견한다.

예컨대, 국가를 '필요악'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러나 소극적 자유의 공간을 확대하기 위해,

국가를 최소화하자는 자유주의적 기획은

홉스의 문제설정 안에서 정당한 권리를 갖고 전개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지다.

또, 국가를 '필요악'으로조차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국가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역설하며

(이는 주로 소극적 자유 개념을 발본화하는 것이다)

국가의 폐지를 주장하는 정치적 아나키즘적 기획 역시

홉스와 정반대의 결론에 이르는 것이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동일한 문제설정 안에서

전개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선택지인 것이다.

 

과연 맑스주의는 이 같은 이론적 아나키즘의 변종들과 다른

정치적 기획을 제시했는가? 나는 발리바르의 질문을 이렇게 이해한다.

예컨대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은 정말 자유주의와 구별되는가?

또 다양한 꼬뮌/평의회 개념은 어떤 점에서 정치적 아나키즘과 구별되는가?

혹 맑스주의는 정치적 아나키즘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적 비판을,

그리고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정치적 아나키즘에 따른 비판을 수행하면서

끊임없이 동요하지 않았는가?

 

물론 이 동요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이는 자유주의와 아나키즘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신의 정치적 거점을 찾아 내려는

필사적인 노력일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그 거점을 확보하지 않는 한 맑스주의가 어느 한 쪽으로 끌려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우리는 그 동안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잘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 외 어떤 이론적/정치적 자원이 필요할까?

그 중 하나가 '공화주의'일 수 있다는 것이 요즘 나의 생각이다.

물론 공화주의 역시 극히 다양한 판본을 갖기 때문에

이는 즉각 많은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예컨대 칸트는 민주주의에 대한 '테르미도르적' 대안으로 공화주의를 정의했고

남한의 공화주의는 최장집을 필두로 한 공화주의 우파의 헤게모니 아래 있다.

대부분의 공화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의적 지배'의 대안으로 '법치'를 강조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발본적 비판을 전제로 한 공화주의의 좌익적 전유 쪽에

나는 많은 가능성이 있다고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발리바르가 헤겔을, 아렌트를, 또한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를,

비판을 전제로 점점 더 많이 얘기하는 것을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어쨌든 이들은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다면) '정치주의'의 전통에 서 있으며

그 곳을 우리가 좀 더 탐색해야 한다는 것이 지금 나의 잠정적 결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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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1/29 14:58 2008/11/29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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