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다는 말로 시작되는 시가 있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증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참 좋은 시였는데 다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 한 구절씩만 생각난다.
마지막은 이렇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내 자존심을 지킨답시고 난 저 아이를 버렸는데
그럼 지켜진 내 자존심은 대체 어디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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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준영(송혜교 분)과 헤어진 후 지오(현빈 분)가 하는 독백이다.
시는 황지우 시인의 <뼈아픈 후회>다.
얼마 전
이 시의 첫머리를 읊는 걸 보았다.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사.세>에서 들은 거였다.
"내 자존심을 지킨답시고 난 저 아이를 버렸는데
그럼 지켜진 내 자존심은 대체 어디 있는 걸까"
싸움의 목적은 자존심이었지만
싸우는 동안 그 목적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이것이 싸움과 갈등 일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알다시피 싸움과 갈등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물론 그 경계가 불분명하여 서로 뒤섞이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오가 싸움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잔혹'이며
(그의 전 연인 연희는, 지오가 가끔 너무 '잔인하다'고 말한다.)
이로써, 준영을 자신의 기억에서 완전히 추방/배제하고,
그녀와의 마주침을 통해 드러난 자신의 깊은 열등감과 결여를 환상적으로 메꾸려 한다는 점이다.
이런 종류의 싸움은 항상 목적을 잡아먹게 마련이다.
자존심이란 결국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정서인데,
이 싸움은 관계 자체를 파괴하고, 따라서 이 관계의 한 항인 자기 자신도 파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싸우고 갈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항상 모종의 위험, 이른바 '극단적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출몰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잘 싸울 것인가?(이 위험 때문에 아예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분야가 되었듯, 싸움과 갈등이 일어나는 곳이라면,
이는 항상 중요한 쟁점이 아닐 수 없다. 의외로 연애 이야기가 전혀 다른 분야의 문제에 관해
영감을 줄 수 있다면, 아마 연애에는 항상 싸움과 갈등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한다.
Posted by 아포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