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책은 상당히 일찍 쓰여졌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 8년 동안 아무 것도 안 썼지요. … 그것은 내 생에서 하나의 공백, 8년 간의 공백과 같은 것입니다. 삶에서 흥미있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삶이 내포하는 공백들, 균열들, 때로는 극적이고 때로는 그렇지도 못한 공백들 말입니다. … 핏제랄드의 아주 아름다운 소설이 하나 있습니다. 10년의 공백을 지닌 사람이 도시를 배회하는 이야기입니다. 반대되는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공백 대신 잉여적 추억들이 과도하게 떠돌아 어디에 놓아야 할지,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여분의 추억들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그런 상태입니다. 내 생애에서 흥미있는 것이라고는 이 두 가지, 건망증과 기억 증진 뿐입니다."(강조는 나)
- 질 들뢰즈, 「철학에 관하여」, p. 147, 『대담 1972~1990』,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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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구했는지, 아니면 그냥 어딘가에서 들고 왔는지,
위의 책은 출처를 알 수 없다.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
다만 책 맨 앞 장에 나오는, 들뢰즈의 사진과 함께 있는 인용문의 저 문구,
의미를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뭔가 강렬했던 저 문구가 때때로 떠오르곤 했다.
이런 문구가 늘 그렇듯이, 내 기억에 있던 말은 좀 더 멋있었던 것 같은데,
위의 번역은 좀 별로다. 아마도 amnesia와 hypermnesia를 번역한 것 같은데
대구도 맞지 않고, 특히 뒷 말이 너무 멋이 없다.
'기억상실(증)과 기억앙진/항진(昻進/亢進)(증)' 또는 건망증의 일상적 의미를 살리고 싶을 경우,
'건망증과 기억과잉증' 정도가 좋을 것 같다.
뭐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니체도 이 문제를 다뤘던 걸로 기억하고
아렌트도 망각의 문제를 정치적 행위로서의 '용서'(forgive)와 연결시켰으며
'건망증/기억상실증'(amnesia)와 '사면'(amnesty)는 같은 희랍어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기억을 다루는 것. 억압된 기억을 되돌이키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기억을 (억압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위'(displace)시키는 것.
나 역시 점점 더 이 문제에 빠져든다.
저런 말 또는 말의 묶음이 만들어지는 그 지점에서
철학과 문학은 만나고 또 헤어질 것이다.
Posted by 아포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