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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0/10
    [펌] 가을, 대추리 도두리
    모험가
  2. 2006/10/10
    정운영의 마지막 강의 '자본주의 경제산책'을 읽다가
    모험가

[펌] 가을, 대추리 도두리

 
   
가을, 대추리 도두리
[진재연의 리기다소나무](1) - 대추리의 추석
진재연(솔부엉이도서관 관장) luce21@jinbo.net
"도토리 주우러 가자"

대추리 가게집 앞 솔부엉이 숲. 긴 대나무 막대를 들고 도토리나무를 흔드는 대추리 아저씨들이 보입니다. “저짝 가생이를 쳐야 해유~” 고개를 바짝 들어 나무를 올려다 보던 할머니들이 한마디씩 훈수를 둡니다. 도토리가 후두둑 떨어지자 할머니들은 연두색 깍정이에서 열매를 꺼내 옷에 쓱 문지르고 바구니에 담습니다.

솔부엉이 숲을 지날 때마다 내 팔을 끌어 당기며 “도토리 주우러 가자”던 일곱 살 지영이도 신이 나서 도토리를 모았습니다. 도토리묵을 해서 같이 먹을 거라는 할머니들은 대나무 막대가 도토리나무를 후려칠 때마다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막대를 차지하지 못한 아이들은 커다란 돌멩이를 던져 나무를 흔들어 보기도 합니다. 추석 연휴 솔부엉이 숲에는 이렇게 도토리를 찾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명절을 쇠러 온 친척들과 함께 높이 솟은 나무를 쳐다보기도 하고 숲을 휘저으며 땅에 떨어진 도토리들을 주웠습니다.

 참세상 자료사진

곡식 거두는 대추리, 추석

대추리 도두리도 이렇게, 여느 마을처럼 추석을 맞았습니다. 이번 추석 대추리 도두리에서 가장 기쁜 일은 올해 수확한 쌀을 함께 나누어 가진 일이었습니다. 주민대책위 임원들과 지킴이들은 마을을 돌며 한 집 당 80kg의 쌀을 배달했습니다. 주민들은 철조망 바깥에서 잘 자라준 벼가 기특하기도 하고 추석을 앞두고 이렇게 라도 나눌 수 있어 기쁘다고 하셨습니다. 1반 뜸부터 4반 뜸까지 집집마다 다니는데 한 나절이 걸렸지만 마을 아이들은 지치지도 않고 신나게 쫓아다녔습니다.

땅을 가꾸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일년 농사지은 결과물을 수확하는 것만큼 기쁜 일이 있을까요. 이른 벼는 8월에도 수확하는데 벌써 늦었다고 추수를 서두르던 9월 초, 수확을 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한 일은 황새울 영농단을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4월 한달 건답직파를 하기 위해 매일 아침 모이던 황새울 영농단. 주민들과 지킴이들이 함께 모여 하루를 시작하던, 직파기계를 단 트랙터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논으로 나가던 바로 그 곳입니다. 국방부는 영농단 앞 길을 완전히 파괴해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어버렸지만, 농민들은 그곳을 청소하고 오랫동안 쓰지 않은 콤바인에 기름칠을 해 수확준비를 했습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판을 누비는 콤바인이 벼를 베고, 농민들은 그 뒤를 따라다니며 콤바인이 담아내지 못한 벼이삭들을 주웠습니다.

 참세상 자료사진

“좋지, 좋아. 한없이 좋지. 농민들에게 수확하는 것만큼 좋은 게 어딨어.” 대추리에서 가장 먼저 수확을 한 이정오(70)할아버지는 누렇게 익은 들판을 누비며 일을 하셨습니다. “농사만 짓게 혀, 피 하나도 안 나오게 할 것이니께” 배운 게 농사밖에 없어서 이 땅에서 절대로 나갈 수 없다는 이정오 할아버지는 농사만 지을 수 있게 하라며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예년에 비해 턱없이 적은 양이지만 수확을 하는 시간만큼은 농민들의 시름을 날려보내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황금빛 들판에서 거둔 낱알 하나가 아까워 주워담는 농민들의 갈라진 손을, 주름깊은 얼굴을 채증했습니다. 그것들을 증거로 대추리 도두리 사람들은 수백만원 벌금을 선고받게 될 것입니다. 철조망 바깥에 살아남은 논이라도 가꾸기 위해 새벽같이 논에 나갔던 사람들, 논둑을 줄지어 다니는 경찰들이 벼 한 포기라도 밟을까 걱정되어 마음을 놓을 수 없던 사람들, 철조망 안에 갇혀 있는 벼들이 얼마나 주인을 욕하겠냐고 시름을 떨치지 못하던 대추리 도두리 사람들. 그렇게 봄·여름, 아픈 시간들을 보낸 농민들에게 2006년 가을, 한국정부는 농민들이 수확의 기쁨을 맛보았다는 이유로 채증을 하며 범죄자로 만들고 있고 마을을 고립시키며 하루하루 목을 죄어 오고 있습니다.

대(大)추(秋)리(理). 가을에 많은 수확을 거둔다는 뜻

대(大)추(秋)리(理). 가을에 많은 수확을 거둔다는 뜻을 가진 마을입니다. 이름대로라면 가장 풍요로워할 시기인데, 2006년 대추리의 가을은 그 풍성함을 다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수확은 했지만 아쉬움을 감출 수 없고, 추석을 맞이했지만 걱정과 근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추석을 하루 앞둔 날, 주민들은 추석맞이 노래자랑으로 735일째 촛불을 밝혔습니다. 대추리 노인회장님이신 정태화 할아버지는 “내일 추석 날 노인정 앞에 다 같이 모여 풍물을 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하면서 노래 가사를 가지고 다니신다며, 주머니에서 하얀 종이를 꺼내셨습니다. 가사가 적힌 종이를 꺼내신 노인회장님은 ‘흙에 살리라’를 부르셨습니다.

대추리에서 태어나고 대추리로 시집 와 61년째 살고 있는 4반뜸 이옥자 아주머니는 ‘흑산도 아가씨’를 불렀고, 이날 예순 두 번째 생신을 맞이한 도두2리 이상열 이장님은 ‘울고 넘는 박달재’를 불렀습니다. 10살 도희와 승현이가 함께 무대에 서 폭발적인 박수를 받았고, 대추리 처갓집에 추석 쇠러 온 어느 아저씨는 ‘아침이슬’을 너무나 멋드러지게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날 가족들과 함께 대추리를 찾은 어느 현역군인의 눈물도 주민들의 마음을 적셨습니다. 추석 연휴 내내 떡과 과일을 들고 마을을 찾았던 많은 사람들이 있어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은 잠시나마 근심을 잊고 웃으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참세상 자료사진

마지막일 수 없는 대추리의 추석

마지막 일거라고들 합니다. 올해가 대추리 도두리에서의 마지막 추석일거라고, 추석을 앞둔 황새울의 가을걷이를 내년에는 볼 수 없을 거라고. 9월 24일 시청 앞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인 4차 평화대행진을 철저하게 외면했던 언론들이, 이 싸움이 끝났다고 말하는 이들이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또한 그 언론들은 10월 2일 국무총리실 주한미군대책기획단에서 마련했다는 ‘주민화합잔치’와 ‘추석 이후 40가구 이주’ 발표를 앞 다투어 보도했습니다. 이미 나간 사람들과, 회유와 협박속에서 불안하게 동요하던 사람들을 모아놓고 ‘화합’잔치를 벌인 한국정부는 또 한번 그렇게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마음에 생채기를 냈습니다. 추석을 앞 둔 대추리 도두리는 한국정부와 국방부의 변하지 않는 비열한 수작에 다시 한번 치를 떨었습니다.

글쎄요. 정말로 올해가 마지막이 될지, 내년에도 백로가 날아드는 황새울에서 벼를 베고 추석을 맞이하게 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곳에 사는 그 누구도 마음 한켠의 걱정과 불안을 떨치지는 못한 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난 3년 간 그래왔던 것처럼 이 땅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학교가 부숴지고, 논에 철조망이 생기고 급기야 집들까지 부숴진 이 곳에서 하루하루 힘든 일상을 이어가는 주민들이 있습니다. 부숴진 집들의 철근과 콘크리트 잔해들을 보면서 아침을 맞이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싸움의 끈을 놓지 않는 이들이 살고 있습니다. 국방부에서 떠들어대는 것처럼 지금 대추리 도두리에는 ‘강경파’만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요. 40명이 이주를 합의했는데 눈에 가시 같은 ‘강경파’ 때문에 미군기지 사업이 차질을 빚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곳 대추리 도두리에는 강경파도, 온건파도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 곳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고, 올해도 내년에도 농사지으며 살아가고자 했을 뿐입니다. 대추리 방효태(78) 할아버지 말씀처럼 그런 사람들이 ‘견디지 못해’ 하나 둘씩 떠나갔고, 그렇게 떠나간 사람과 남겨진 사람들은 등돌리는 아픔까지 떠 안아야 했습니다. 비열한 한국정부는 한 동네 살던 사람들을 더욱 분열시키고 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세상 자료사진

더 이상 속지 않는다

한국정부가 ‘40가구 이주’ 발표를 한 날도 여느 때처럼 농협창고 모인 사람들은 762일째 촛불을 밝혔고, 그렇게 함께 모여 아픈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이 날 방승률(72) 할아버지는 “개인이 거짓말하면 사기죄로 들어가고 난리가 날 거다. 그런데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이렇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인터넷을 쓸 줄 알면 좋겠는데 그게 안 되니, 인터넷을 하시는 분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계속 알려줘야 한다. 이놈의 정부가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있다” 언제나 침착하고 조용하신 방승률 할아버지는 이날 무척이나 화가 많이 나셨고 목청을 돋우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주민들은 한국정부와 국방부의 거짓말에 더 이상 속지 않습니다. 저들의 야만적이고 비열한 수작이 주민들의 올곧은 저항을 멈추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마른 땅에 볍씨와 비료를 뿌리던 봄날에도, 어느 날 갑자기 논에 가시철망이 들어서던 그 날 이후에도, 물이 찰랑찰랑하는 논에서 피를 뽑던 뜨거운 여름에도 땅을 가꾸며 사는 사람들의 손길을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민들이 지치지 않게 대추리 도두리의 문을 두드릴 더 많은 사람들을 기다립니다. 대추리 도두리의 추석은 올해가 마지막이 될 수 없습니다. 솔부엉이 숲 사이로 드러난 가을 하늘을 내년에도 볼 것이고, 대추리 아이들과 함께 도토리를 주울 것입니다. 황금빛 황새울의 가을걷이를 내년에도 꼭 볼 수 있기를, 지금 이 시간이 이곳의 마지막 가을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진재연 님은 사회진보연대 회원이며, 현재 대추리에 살면서 솔부엉이 도서관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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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의 마지막 강의 '자본주의 경제산책'을 읽다가

재미있거나 울림이 있는 부분을 발췌한다. 앞 장들을 읽을 때는 생각을 못해서 못했고.

정운영선생의 글은 학술적인 글일지라도 다른 학술논문과는 달리 논문투가 아니다. 유려한 수필같은 느낌을 준다. 기자출신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대중적 글쓰기의 노력의 소산인지 아니면 또다른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선생의 글이 쉽게 읽히는 것은 아니다. 예스럽고 함축적인 문장때문으로 보인다. 이번 책은 5장을 제외하곤 비교적 쉬웠다. 5장은 시간있으면 나중에 다시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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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다른 무엇보다 문화에는 국경이 있어야 한다. 국경 철폐를 외치는 세계화 문화는 진정한 의미의 보편적 문화도 아니고, 각국 문화가 유기적으로 배치된 다원적 문화도 아니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에는 문화조차 온전하지 못하다. 세계화 문화는 세계화만큼 불결하다. 소비 만능의 저속한 양키즘이 세계 문화를 지배하고 세계화 문화의 표준으로 등장하면서, 각 민족의 고유문화는 저항 능력을 상실한 채 거기 유린당하기 때문이다. 여기야말로 지식인의 역할이 절실히 필요한 지점이다.


에서


"저는 신파조든 연속극이든 감동이 자꾸 사라지는 이 시대의 삭막한 풍경을 아자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가을에 집착하는 이유요? 폐기 처분 선고가 얼마 남지 않은 제 연배에게 가장 상징적인 계절이 가을이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1990년대는 제게 모멸과 배반의 시대였습니다. 저는 세칭 명문이라는 S대학교와 K대학교에서 각기 10여 년 이상 강사 생활을 했습니다. 한때는 40~50개의 학과에서 200~300명의 학생들이 제 강의에 몰려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1993년께 이른바 엑스 세대(X-generation)가 나타나면서 강의실에서 학생이 쑥쑥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강의 선택의 기준도 무엇을 배워보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과목을 고르면 쉽게 학점을 따느냐로 바뀌는 듯했습니다. 정말 순식간의 변화였습니다.

다시 10년을 거슬러 1983년 그때쯤 저는 막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모든 첫 경험이 어색한 것처럼 저의 첫 강의도 어색했지만, 다행히도 제가 공부한 분야와 시대 상황이 잘 맞았습니다. 저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했고, 제가 알기로 한국 학생으로는 최초로 외국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로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귀국 후의 현실은 아주 처절했습니다. 캠퍼스는 최루탄 가스로 항상 매캐했고, 어느 해 5월에는 학생들과 젊은 근로자들의 분신과 의문사가 무려 10여 건에 이르렀습니다. 확실히 1980년대는 분노의 시대였습니다. 그 치열했던 시대가 1990년대 들어 저렇게 변절한(?) 데에 우리는 그저 당황하고 허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60년대 통틀어 수출 상품의 3위에 오를 정도로 가발은 경제 성장에 ‘효자 노릇’을 했습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한강》을 보면 당시의 애처로운 사연들이 나옵니다. 엿장수는 고무신 떨어진 것이나 양은 냄비 뚫어진 것 대신 머리카락을 받았고, 전국을 돌며 시골 처녀들의 머리칼을 사들이는 전문 수집상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정조를 중히 여겼던 이 땅의 아낙네들이 돈 몇 푼 떨어진다고 쉽게 머리카락을 내줄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전 여성의 파마화’ 운동이었습니다. 수집상들은 흔히 파마 미용사를 동반하고 전국을 돌았는데, 그것은 파마로 이렇게 멋을 내줄 테니 어서 머리카락을 자르라고 ‘꼬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파마 유행에는 이렇게 조국 근대화의 애환이 스며 있습니다."


"전망은 점괘로 끝나는 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망 대신 희망을 얘기하고 싶은데, 2000년대 시작이 무엇보다 성찰의 시대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저의 희망 사항입니다. 점괘 수준의 전망에서 보자면 서구학자들이 말하는 새로운 ‘유목 사회’의 도래가 그럴듯합니다. 유목민은 새로운 초지를 찾아 계속 움직이며, 긴 여행을 무사히 마치는 자만이 살아남습니다. 정착과 안정이 없는 이런 현실이 우리의 장래가 될 공산이 아주 큽니다. 학자들은 현대 유목민의 특징을 정보․통신 기술과 문명에서 찾지만, 저는 무엇보다도 평생 직장이나 종신 고용이 사라진 현대인의 직업 불안에서 찾고 싶습니다. 이 직장에서 내보내면 저 직장을 찾아 기웃거리는 것이 유목민 생활과 다를 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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