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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하고 포근한 곳입니다.
숙소였던 마을 노인회관에는 메주냄새가 은은하게 나고
둘러보면 토담집도 있고 낯선이를 경계하는 요란스런 개 짖음도 있지만
그래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4백여 원혼들이 아직도 잠들지 못하는 곳입니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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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단양면 영춘면 주민 가운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노인, 어린아이들과
영월등지에서 남쪽으로 피난을 가다 길이 막혀 더 내려가지 못한 강원도 사람들등
줄잡아 400여명이 곡계굴에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1951년 1월 20일 오전 10시쯤 미군 비행기 4대가 갑자기 곡계굴을 행해 4시간동안
집중 폭격을 가했고 피난민들은 흰 옷을 흔들어 피난민임을 알렸으나 폭격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폭탄 파편이나 기관총에 맞아 쓰러졌으며 좁은 굴을 빠져나오 못한 사람들
대부분이 질식사 또는 소사했습니다.
그 곡계굴을 답사하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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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계굴 대책위원회 엄한원 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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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위원회 조병우 조사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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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회관옆에 임시로 유골과 유물을 보관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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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걸음으로 걸어가야만하는 이곳에 3-400명이 피난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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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속에 물이 차서 더 이상 답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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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계굴의 4백여 원혼들은 노근리의 4백여 원혼들과 왜 다른 대접을
받고 있는가?
주요언론과 정부의 무관심속에 곡계굴은 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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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민보의 이창기 기자님.
민간인 학살에 관하여 취재하고 인터넷 방송 [청춘]과 함께 다큐멘터리도 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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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시 민간인 학살 피학살자 유족회 최승호 조사부장님.
1950년 7-8월에 경북 경산의 코발트 폐광 수직갱도와 인근 골짜기에서
대구 형무소 재소자와 경산 청도지역의 보도연명원 약 3500명이 군경에 의해
학살당했습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 10대 정도의 군용 트럭에 사람들이 실려 왔는데
내려올 때는 빈 트럭이였다고 합니다.
학살은 약 열흘 동안 진행되었는데, 포승줄에 묶여 산채로 수장되기도 했고
흉기로 가격당하거나 기름에 태워지기도 했습니다.
경산 코발트 광산에는 지금까지도 수습되지 않은 유골들이 반세기 전의 한을
그대로 품은 채 기름덩어리에 파묻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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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서 학살당한 원혼들을 위한 위령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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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회 임시 거처인 컨테이너안에 유골들은 방치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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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과 같이 묻혀있던 탄피와 탄두.
어떤이는 말합니다.
거기 유골들이 조선시대나 그 이전 시기의 유골 일 수도 있지 않냐고...
그럼 여기 있는 당시 군경이 사용하던 M1의 탄피와 탄두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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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지역 수직갱도의 입구.
깊이 100m정도의 이 수직갱도에 물이 차 있었는데 민간인을 수장하거나 총살하여
갱도에 밀어넣었다고 합니다.
시체가 쌓여 더 이상 학살할 수 없어 이 산 골짜기 골짜기 마다 학살을 자행해
시체가 즐비했다고 합니다.
산 전체가 거대한 공동묘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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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지역 수직갱도.
이곳에서도 학살을 하고 시체를 밀어넣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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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갱도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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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갱도 안에 방치되고 있는 유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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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두개골에는 도끼로 찍은 듯한 함몰한 흔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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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유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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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가 그대로 있는 두개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망자가 10대혹은 20대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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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지자체의 무관심속에 유골이 묻혀있는 이 곳에 버젓이 골프장 건설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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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일시 : 2005. 11. 20.
답사주체 : 나라사랑 청년회 길사랑__사진1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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