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위험한 것 입니까?

나 여러 해 산 듯이 삶이 지루할 때가 있다. 가끔 사랑이나 삶, 행복 같은 말들이 우스워 지는 그런 감정, 그런 때 말이다. 아무것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앞에서 언급한 그런것들 말이다. 이것들의 피상을 쫒다보면 그 관념 자체들이 허위적인 것이 된다. 그런 사람을 보게 되면 나는 본래의 관념마저도 냉소하게 되는 듯 하다.

 

  .. 위험한 걸까?

 

 

 

"Travel is Dangerous", Mogwai, [Mr. Beast](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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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9 01:11 2010/04/29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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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x & Engels. - Belle & Sebastian

Marx & Engels. - Belle & Sebastian,

[Push Barman  To Open Old Wounds](2005)

 

 

 

*이 글은 2008년경 싸이월드에서 도토리를 받으려고 끄적인 짧은 글이다.

 

 

 

 

 



 
 부르주아들은 역사적으로 봉건제의 모든 것에 대항해
혁명적인 역할을 해냈어.

 

이상적인 관계였지.
        하지만 그들이 말하던 사유재산과 자유는
오로지 이윤을 위한 착취에 불과해.
                                               내말이 허무맹랑 하겠지.
                                      하지만 그건 예전의 망령과 똑같은 걸..
                                      우리는 역사로 부터 좀 더 배워야만 해...
                                
                                      Marx & Engels 중...
 
 
 

Rage Against The Machine의 노래가 아니냐고? 이 곡은 예상외로 영국 챔버팝 인디씬의 살아있는 전설이된 Belle & Sebastian의 싱글 B-side 모음집인 [Push Barman To Open Old Wounds]의 마지막 트랙이다. 분명 Belle & Sebastian은 한국에서도 제법 큰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2008년 현재까지도 냉전과 한국전 아래 형성된 반공이데올로기의 관념적 잉여물들이 국가의 절대적 행위가치를 생산하는 한국에서 "Marx & Engels"를 직접적인 언급하는 이 노래의 제목은 분명히 우리에게도 낯설 것이다.

 

 

  "Marx & Engels"이데올로기에 관한 노래인지 아니면 화자인 스튜어트 머독(보컬)의 연정과 연민의 대상으로서 곡 중에 언급되는 한 소녀에 관한 노래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어느 측면으로 접근하든 "Marx & Engels"는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완벽한 은유를 제공한다. "소녀는 웰러시 지방의 방언(方言)을 사용했기 때문에 화자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이 소녀는 노래중에 맑스와 엥겔스 이후에 존경할 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현대에서 방언 개념과 맑스, 이 두 가지 이미지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자본주의(혹은 조금 양해해서 자유주의)는 표준이 되었다. '표준'은 지향할 것이며 그 자체로 미덕이다. 반면에 맑시즘은 방언화 되었다. 표준과 단절로 인해 파생된 그것은 한정된 소수에 의해 공유되며 '표준'과는 호환성이 희소하다. 그리고 종국에는 '표준'속으로 '중화'되거나 소멸되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여겨지게 된다. 이것이 방언과 맑시즘에 대한 포스트 냉전세대의 이미 굳어져버린 관념은 아닐까? "Marx & Engels"에 서 화자가 언급하는 자본과 표준의 상징인 'TV'에서 견지하는 '비참함'과 소녀에 대한 애틋한 정서는 그나마 세상을 대하는 Belle & Sebastian의 미덕처럼만 느껴진다. 혹은 어떤 맑스주의에 대한 일종의 "요청"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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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6 22:13 2010/04/26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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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nB 디바의 일렉트로니카로의 선회와 확장

                            J(제이), 새로운 방향과 기로에 서다

 

 

* 이글은 2008년경 싸이월드에서 도토리를 받으려고 끄적거린 짧은 글이다.

 

 


 

나의 이름은 J다

 

 

  J는 2008년부터 기존과 다른 일련의 음악적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바로 (2008), (2008), (2009)로 이어지는 일렉트로니카 싱글 두 장과 케이블 드라마 O.S.T로 일렉트로니카가 가미된 모던락 싱글을 연속으로 선보인 것이다. 그녀는 2007년까지 6개의 정규앨범을 선보이며 RnB 팝 디바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그런 그녀의 일렉트로니카로의 선회와 음악적 확장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J는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놀라운 재능을 지닌 다른 두 명의 디바 박정현박화요비(박정현과 J는 98년, 박화요비는 2000년에 데뷔했다)에 비해 보다 조용한 활동을 지속해왔다. 세 명 모두 꾸준한 활동을 해왔지만 J의 활동과 대중인식은 놀라운 고음역 소화력과 폭발력을 지닌 두 동료들에 비해 그녀의 음악만큼이나 조용했던 것이 사실이다.

 

 

 

 


 

 

20세기 끝 무렵에 등장한 RnB디바의 트윈타워, 궁극의 뉴타입 혹은 RnB 발라드를 위한 신인류,
그리고 J.

 

 

  지만 J의 음악이 주목받지 못할 만한 것이거나 다른 두 동료의 음악보다 못하다는 말이 아니다. J가 들려주는 특유의 흐느끼는 듯한 느낌의 보컬은 다른 보컬테크니션들이 흉내내기 조차 힘든 오리지널리티를 가지고 있으며 J의 보컬이 보여주는 다른 채널의 음악과 융화력은 월등한 수준이다. 박정현과 박화요비에 비해 힙합과 일렉트로니카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도 J의 융화력 있는 보컬 색에 기인한다.


 

J의 일렉트로니카

  

  실 아직까지는 J의 일렉트로니카를 정리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비교적 장문의 리뷰를 하는 것은 J가 이 두 개의 싱글로 보여주고 있는 확장 가능성 때문이다. 실제로 두 개의 싱글은 이미 검증된 프로듀서들과의 합작품이고 이 싱글 자체만 두고 평가하자면 그리 좋은 평을 하기 힘들어진다.

  

 

 


         

문제의 두 싱글. J, 그대가 비록 달콤한 노래를 불러도 우리 귀엔 차갑고 슬프고 섹시하다.

 
 

  <J Electro Project Album-Love Child>,  이 두 장의 일렉트로니카 싱글은 각각 매드소울차일드허밍얼번스테레오와의 합작이다. 이 싱글들에 대한 대부분의(필자를 포함해서) 비판적 감상은 자칫 지루하거나 진부하다는 평가가 매겨지기 쉽다. 그 이유는 메인스트림의 작곡 공동체인 매드소울차일드와 이미 그 유명한 허밍얼번스체레오의 음악에 J의 보컬이 덧 씌워진 것에 지나지 않는 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상징적 불안요소 때문이다. 실제로 다양한 음악적 접근이 가능한 매드소울차일드는 결국 아주 평범한 하우스-유로댄스를 제공하는데 그쳤으며 허밍얼번스테레오는 그의 기존 곡들과 별반 차이를 지니지 않는 진부한 곡을 제공했다. 오히려 J의 보컬이 그들의 기계적 생산물에 새로움과 생명력을 불어 넣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지점에서도 오히려 주목해야 할 부분은 J의 보컬이 일렉트로니카와 상호작용 속에서 매우 도시적이고 차가우면서도 섹슈얼하고 탐미적인 이미지들을 생성해 내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것이다(J의 싱글들이 밝고 따뜻한 곡임에도 불구하고 곡들이 제공하는 이미지는 오히려 반대이다) 이것은 놀라운 가능성이다. J는 보컬로서 일렉트로니카를 상승시켰다. 아직까지 필자가 들어본 일렉트로니카와 조우한 어떤 보컬테크니션도 이 수준의 싱크를 달성하지 못했다.


 

확장과 기대

  

  장 최근에 선보인 싱글(2009, 2, 24)은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를 가미한 모던락이다. 이 곡 또한 J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영역이다. 하지만 J가 일렉트로니카에서 보여준 가능성 못지않게 개성이 강하지는 않지만 꽉 짜여있는 구성과 귀에 잘 꽂혀오는 J의 코러스 라인 오버랩은 지금까지 여성보컬들이 선보인 모던락과는 사뭇 다른 이미지들을 들려주고 있다.

 

 


J의 보컬과 모던락의 조우는 상당히 유니크한 분위기를 창조했다.
 
 

  금까지 살펴본 J의 최근 싱글들은 J자신에게도 청취자에게도 많은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이다. 또한 다른 청취자들은 필자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가능성을 현실로, 의심을 동의로 바꾸는 데는 결과물이 필요하다. 즉 그녀의 음악적 확장을 그녀의 다음앨범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보다 자신에게 가혹하고 치밀한 음악감독이 되어야 한다. 그녀의 다음앨범은 기존 자신의 스타일의 RnB에 충실할 것 일수도 있고 지금보다 진일보한 자신만의 일렉트로니카 일수도 있다. 혹은 유니크한 모던락 일 수도 있겠다. 어떤 형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지금 보여주고 있는 가능성들을 끝까지 끌어올린 다면 어떤 앨범이 될지 무척이나 기대된다. J는 현재 가능성과 불안 그 모든 것을 자신과 섞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J의 선회와 확장은 그녀의 음악경력에 있어커다란 기회이며 또한 기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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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6 22:00 2010/04/26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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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아 아리(India Arie)의 네 번째 정규앨범

 

사랑과 정치에 관한 증언,

혹은 오바마 시대의 어떤 군주론

 

 

* 이글은 2008년경 싸이월드에서 도토리와 바꾸려고 게시했던 짧은 글이다.

 

 



 

  디아 아리의 네 번째 앨범이 공개되었다. 그 외형은 보다 매끄러워졌고 속은 더욱 사려 깊었다. 주목할 만한 앨범이 뜸한 1월과 2월이 될 뻔했으나 인디아 아리는 이러한 우려는 커녕 범작의 수준을 넘어 의기양양하게 2009년을 통틀어 최고가 될만한 앨범이라고 조심스럽게 언급될 만한 결과물을 양손에 쥐고 복귀했다.

 

 

보다 솔직해지자 

 

  80년대의 락은 동시대의 힙합, RnB, 소울 등에게 많은 것을 배워야 했다. 백인청년들은 뉴욕과 LA의 하드코어 언더씬의 빈곤하며 분노해 있는 소수의 청년들을 제외하고는 사회성과 동시대성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묘하게 당시의 냉전을 자신의 승리 쪽으로 기울인 부유하고 강한 미국과 높은 경제성장 속에서도 내부에서 부패하고 있던 일본의 경제적 거품을 동시에 닮고 있는 양상이었다. 90년대를 지나며 모든 허위의식에 지쳐버린 락은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대고 있었다(이런 미국의 대중음악사적 양상 속에서 커트코베인) 

 

 

 

 


 

 

연속된 세대로 검은 음악의 새로운 시대를 만들었던 두 괴물 집단 NWA와 Wu Tang Clan 
 

 

  90년대를 지나며 흑인 음악은 흰색의 흑인 음악 마이클잭슨 이후 NWA와 East Old School씬의 자양분을 듬뿍받은 골든에라가 도래했다. 이 팽창이 어찌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백인 젊은이들은 랩을 시작했고 락 밴드들은 힙합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절대로 길들여 질 것 같지 않은 채, 잔혹한 야수같거나 혹은 한 없이 지적일 것만 같은 힙합씬은 무언가 똑바로 바라보기엔 좀 민망해졌다. 랩의 가사들은 돈과 여자, 혹은 여자와의 관계, 총격전으로 국한되는 듯 했고 음악은 패션 혹은 통조림 처럼 되었다. 도대체 지구 반대편의 검은 친구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와 같이 '성공'과 엔터테인먼트 '자본'의 힘은 검은 친구들을 바꾸어 놓을 만큼 그 위세가 대단해 보였다. 몇몇 소신있는 아티스트들 만이 자신들의 품위를 유지했으며 선구자들의 경고를 잊지 않았다. 그 수는 몇으로 제한 될 수 밖에 없으나 그들의 결과물들은 흑인음악 범주에서 절대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2001년에 데뷔한 인디아 아리는 그 마지막 주자였다.

 

 


 

 

 

 

무게감의 차이와 랩의 방법론적 고뇌 MosDef, The Roots

 

 


 

 

 

 

 

'Soul은 Soul에 의해 가능하다' 라는 명제의 증명들. Jill Scott, Erikah Baduh, Lauryn Hill

 

 

풀리지 않는 숙제들, 오바마 그리고 인디아 아리

 

  국 역사상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집권했다. 수 많은 검은 민중은 그가 백악관으로 입성하던 날 감동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고 그 광경은 전 세계로 생중계 되었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으로 어마어마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며 상징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는 어떤 가능한 변화들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여전히 미국의 구조적 핵심 집단은 금융집단들이며 민주당은 공화당보다 조금 더 영리하기에 그들과 군수복합체에 조금 덜 가까워 보일 뿐이다. 또한 무엇보다 미국 정치와 경제의 주류는 여전히 W.A.S.P(백인, 앵글로섹슨, 프로테스탄드- 아, 여기에 유태계 부유층을 더하자)이다.

 


 

부시 이후 미국의 극약처방 오바마. 대안(Alternative)의 종말 속에서 그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렇게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시기에 완성한 자신의 새 앨범에서 인디아 아리는 정치에 관해 이야기 한다. 그녀의 눈에 정치는 여전히 분노로 가득차 있으며 또한 여전히 사람들은 상처입고 죽어가고 굶주린다. 그리고 그것은 역병이 되어 전 세계로 번져나간다. 이것에 대한 유일한 치료는 사랑이라고 인디아 아리는 대답한다. 흑인 대통령이 집권하여 미국의 모든 흑인들이 감격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인디아 아리는 오히려 더 굳건하게 정치관념의 변화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인디아 아리의 신작은 이런 의미에서 과연 오바마 시대의 문화적 군주론이라 할 만 하다.

 

 

                                                                               Love & Politics

 


 

시작하는 오바마 시대의 통곡 혹은 문화적 군주론

  

 

앨범이 담는 소리를 짧게 평하자면 기존의 인디아 아리의 장점인 청량한 어쿠스틱에 잘 다듬어진 작법그리고 보컬테크닉과 사려깊은 가사는 잘 유지된 채로 비트감각이 덧 씌워져 더욱 매끄러워진 느낌이다. 이제 거의 완성된 작가의 반열 올라섰다고 볼 수 있겠다. "Therapy"는 앨범을 상쾌하고 자연스럽게 열어주고 인디아 아리의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그리고 직설적으로 담긴 "Ghetto",  "Better Way",  "The Cure"는 필청트랙이다.

 

 

정치인들은 우리의 전쟁에 명분이 있다며 짖어댑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어요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아무것도 확신이 안서요

그가 무슬림 이었기 때문일까요?

내게 말해주세요 이것이 민주주의 인가요 아니면 그저 말장난 인가요

이런 것들이 항상 뉴스에 올라요.

그저 급여가 지급되고 대통령은 골프코스에 가잖아요.

 

-"Better Way"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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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6 21:44 2010/04/26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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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하와 얼굴들, 의외의 성공.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백일몽 

 

장기하와 얼굴들, 의외의 성공 <별일 없이 산다>

 

 

 

*이 글은 2008년경 싸이월드에 도토리를 댓가로 짧게 끄적거렸다.

 


  실히 의외였고 확실히 난리였다. 인터넷 포탈에는 장기하와 얼굴들에 대한 논쟁들이 오고갔고 팬덤이 형성되었다. 입소문은 빨리도 퍼졌고 공중파 매체들도 매우 독특한 그들에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싸이월드 BGM에서 그의 판매고 역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였으며 그의 싱글 <싸구려커피>는 솔드아웃현상을 보였다. 2008년 끝에 쏟아지는 인디에 대한 비상한 관심, 우리는 이것을 옆에서 봐야하나 아래서 봐야하나 혹은 눈을 감고 봐야하는걸까?

 

 


 

싱글 <싸구려커피>, 잘 간직된 향수와 이미지 텔링의 독창성

 

 

참신한, 확실히 재미있는, 하지만..

 

  기하와 얼굴들의 노래들은 확실히 참신하게 들린다. 그리고 확실히 재미있다. 하지만 장기하의 스타일로 말하자면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참신하지만 참신하다고 하기에는 이건 뭔가 아니다 싶어. 확실히 재미있지만 이건 뭔가 아니다 싶어 계속 듣다보니까 아우 화들짝 놀라..'  뭐 이런식이다. 이제 정리해 보자. 그리고 핵심만 말해보자. 확실히 장기하와 얼굴들은 과대평가 되고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지는 있으나 평가는 없다(하긴 요즘엔 누구도 평가하지 않는다. 인기와 관심이 곧 평가이다, 지독한 파시즘의 논리) 팬덤의 지지와 평가는 분리되어야 한다.

 

  안하게도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은 전혀 새롭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매체에서 떠들어 대는 것 처럼 인디계의 서태지라고도 불리는 건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서태지의 데뷔를 이해하는 맥락이 단지 대중이 보였던 새로움에 대한 관심으로 치부하는 것은 너무 피상적 이해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은 오늘날 한국 대중음악의 특수성 상 새롭게 인식된 것 뿐이다. 그 이유를 단순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의 대중음악은 70년대 그리고 80년대 청년문화로 부터 계승되어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90년대 부터 단절된 뒤에, 특정 시기마다 한 가지 성공모델을 트렌드로 지정하고 그것을 향해 기형적으로 상품양산되는 풍조를 보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70년대와 80년대의 유산을 자신의 언어로 소환하는 장기하와 얼굴들에게 느끼는 기시감적 이미지가 마치 새로운 것인냥 받아들여 진다.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훌륭한 시작 지점 <별일 없이 산다>, 달은 차올랐다. 가면된다.

 

 

장기하와 얼굴들, <별일 없이 산다>의 의미

 

  에 제시한 필자의 견해는 장기하와 얼굴들을 평가 절하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현상에 관해 정확히 이해하고자 함 이다. 장기하와 얼굴들 그리고 그들의 음악은 분명 우리에게 제법 무거운 의미가 있다. 그는 70년대와 80년대 청년문화의 유산을 절대로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장기하와 얼굴들이 잘 표현해 내는 한국적 정서와 진솔함으로 직결되고 있다. 이런 부분에서 장기하와 얼굴들은 크라잉 넛, 달빛요정 역전 만루홈런 등의 뮤지션과 같은 장점을 공유하고 있다. 장기하와 얼굴들은 데뷔앨범 이전에 싱글활동으로서 대중들로 부터 이미 향수와 독창적 해석 능력에 대한 검증을 해낸 것이다. 

 

  기하와 얼굴들의 <별일 없이 산다>는 매우 훌륭한 출발 지점이다. 이제부터가 진짜 그들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지금까지 자신이 보여준 7,80년대의 유산과 독특한 작법을 앞으로 어떻게 풀어나가고 발전 시킬지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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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6 21:27 2010/04/26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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