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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고 지나쳐버렸다. 13일이 시인 김남주의 14주기였단다.
김남주... 그와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과 시원함과 슬픔을 기억한다.
IMF 때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여름방학때인가 집앞 독서실을 다닌 적이 있었다.
당시 안어려운 집이 없었듯이 우리집도 울 아빠가 다니던 회사가 망하면서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웠었다. 그 빠듯한 살림에 없는 돈으로 독서실을 등록해줬건만, 솔직히 앉아서 공부하는데 취미가 없었던 나는 다니는 시늉만 했다.
아침밥먹고 독서실 가서 한 30분 공부하다가 만화책 빌려서 1시간쯤 보고
계속 책봤으니 산책 한 30분하고 다시 책상에 앉아서 소설책보다가
지루하면 노래듣고 그러다가 점심밥 먹으로 집에가고...
그러던 어느날 라디오에서 우연히 안치환이 부른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들었다.
가사가 너무 좋아서 덜컥 안치환의 테이프를 샀다.
그 앨범에는 생각지도 못한 낯선 노래들이 있었다.
그 노래들 중 몇 곡에 김남주의 이름이 있었다.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은 아니야' '한다' '희망이 있다(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아이고! I Go!(날마다 날마다)'... 그 노래 가사들을 보고나서 서점으로가서 창비에서 나온
김남주의 2권짜리 옥중시선집 저 창살에 햇살이 를 샀다.
김남주의 시는 나에게 커다란 충격이었고 환희였다.
나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시를 썼다는 그의 말에 녹아들었고
나도 그처럼 시를 무기삼아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 여러번, 사는게 버겁고 힘들때면 더더욱 김남주의 시를 읽게 되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김남주의 '전사'에 가슴이 뛰었었고, '돌멩이 하나'를 읽으며
꿎꿎하게 걸어가자 친구와 다짐을 했었다. 해마다 518이 되면 '학살'을 떠올렸었다.
농활갔던 마을 개울가에 발을 담그며 '물따라 나도 가면서'를 노래했다. 정주영이 즉었을 때, 그를 기리는 일군의 학생운동세력을 보면서 마음에 안들어서 '겨레의 어쩌고 저쩌고 하는 백두산이여(시 제목이 기억이 안난다ㅠㅠ)'를 읊조렸다.
전용철 홍덕표 농민이 경찰에게 맞아 죽었을 때는 '날마다 날마다'를 생각하며
속으로 울었고, 대추리에 쳐진 철조망에서는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은 아니야'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조용한 가을 한적한 시골마을을 지날 때는 '옛마을을 지나며'를 떠올리며 홍시가 먹고 싶어졌었다. 재작년 친구들과 해남 땅끝마을을 가다가
우연히 김남주 생각를 발견하고 들렸던 일이 있었다. 붉은 남도의 흙. 흙보다 더 검붉게 그을렸을 농민들. 농민들의 마음들. 김남주의 시가 왜 그렇게 붉은지, 붉으면서도 생기있꼬 아름답고 슬픈지, 붉은 흙을 보니 알 것만도 같았다. 징역사는 동안에는 '저 창살에 햇살이' '이 가을에 나는' 과 같은 시들에 몸과 마음이 온통 몰입해있었다.
김남주가 시에서 '나가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순간 내 마음은 크게 요동치고 너무나 슬퍼서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시를 던져버리기도 했었다.
이제 나는 시가 무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시를 무기로 삼을 생각이 없다. 그래도 가끔씩 김남주가 보고 싶다. 그의 시를 읽을때면 언제나 사뭇치는 감정들이 나에게 소중하다. 내 보물과도 같은 김남주의 시집, 이제 완전히 누리끼리해져만 가는 내가 처음으로 샀던 시집을 다시 한 번 꺼내본다.
나와 함께 모든 모래가 사라진다면
내가 심고 가꾼 꽃나무는
아무리 아쉬워도
나 없이 그 어느 겨울을
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의 꽃은 해마다
제각기 모두 제철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늘 찾은 별은
혹 그 언제인가
먼 은하계에서 영영 사라져
더는 누구도 찾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오늘밤처럼
서로 속삭일 것이다.
언제나 별이
내가 내켜 부른 노래는
어느 한 가슴에도
메아리의 먼 여운조차
남기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노래가
왜 멎어야 하겠는가
이 세상에서……
무상이 있는 곳에
영원도 있어
희망이 있다.
나와 함께 모든 별이 꺼지고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내가 어찌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가.
이 가을에 나는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오라에 묶여 손목이 사슬에 묶여
또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번에는
전주옥일까 대전옥일까 아니면 대구옥일까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거리 산과 강을 끼고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숫돌에 낫을 갈아 벼를 베고 있는 아버지의 논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염소에게 뿔싸움을 시키고 있는 아이들의 방죽가로 가고 싶다
가서 그들과 함게 나도 일하고 놀고 싶다
이 허리 이 손목에서 오라 풀고 사슬 풀고
발목이 시도록 들길 한번 나도 걷고 싶다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논둑길 밭둑길을 내달리고 싶다
가다가 숨이 차면 아픈 다리 쉬었다 가고
가다가 목이 마르면 샘물에 갈증을 적시고
가다가 가다가 배라고 고프면
하늘로 웃자란 하얀 무를 뽑아 먹고
날 저물어 지치면 귀소의 새를 따라 나도 가고 싶다 나의 집으로
그러나 나를 태운 압송차는 멈춰주지를 않는다
내를 끼고 강을 건너 땅거미가 내리는 산기슭을 돈다
저 건너 마을에서는 저녁밥을 짓고 있는가 연기가 피어오르고
이 가을에 나는 푸른옷의 수인이다
이 가을에 나는 푸른옷의 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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