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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5학년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보다 결손(?)가정의 자녀로 보이는 것이 더 싫었던 어린 시절, 어머니의 그 빈자리를 메워 준 사람은 할머니와 큰언니였다. 할머니는 늘 큰 손자가 제일 귀했지만, 에미 잃은 손주들이 못내 안타까워서 90이 다되서 돌아가실 때까지 하루도 등을 방바닥에 대고 편히 주무시지를 못하셨다. 늘 옆으로 웅크리고 주무시고, 더딘 걸음으로 시장까지 가시어 아껴두신 쌈짓돈으로 손주들 주시겠다고 고기를 사오시곤 하셨다. 그래도 어릴땐 내가 할머니를 돌봐드린다고 힘들어 했는데, 철들며 보고싶어하실 때 더 찾아뵙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기만 하고...
대학을 갓 졸업하면서 6남매의 첫째로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해야 했던 큰언니는 결혼을 하고서도 우리 집을 그리 멀리 떠나 살지 못하였다. 큰언니가 자기 아이들을 키우면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에 다소 배신감도 느꼈지만, 성장과정의 중요한 귀로에서 언제나 나는 큰언니의 조언과 지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늘 동생들에 대한 부담감을 거침없이 표현했기에 언젠가 그녀의 보호로부터 벗어나리라 다짐한 적도 많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기 자식보다 동생들을 더 의지하는 언니를 보며 세월을 실감하게 된다.
결혼 초 시어머님은 남편의 어머니로 그저 어렵기만 했다. 경상도 분이라 사루리를 큰소리로 말씀하실 때는 화가 나신 것 같아 부엌에서 일하다가 방에 들어와 남편에게 ‘어머니가 왜 화가 나셨나?’고 묻기도 했다. 어머님도 서울말씨를 쓰는 내 이야기를 알아듣기 어려워하시곤 했다. 게다가 모시고 살지 않으니 일년에 네차례 뵙고, 가끔씩 전화드리는 정도. 자연히 형식적인 대화에 늘 그쳤다. ‘별일 없으세요?, 별일 없냐?’ 묻고 답하면 전부다.
속에 있는 생각을 말씀하신 것이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지도 모른다. 내가 박사과정 들어가던 해에 아버님이 신경과에 입원하시고, 진단을 위해 검사를 받으러 들어가셨을 때 대기실에 기다리시면서 ‘만일, 저 양반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우리는 큰 아이를 의지할 수 밖에 없다. 니가 힘들더라도 같이 살 수 있겠니?’하고 물으셨던 일(그 전날 인턴이 사전동의서 받으면서 엄청 겁을 주었기 때문). 아이를 못 낳는 며느리 데리고 용하다는 한의원 가시면서 ‘니가 젊어 모르겠지만 내가 나이 들어 보니, 늙어 자식 없으면 그나마 너무 외롭더라...’ 당신 욕심보다 우리들의 노후가 걱정되신다던 말씀. 나 혼자서 이사하는 것이 걱정되신다며 올라오셨던 날, 어머님과 단 둘이 TV를 보는데 ‘요즘, 여자들 살기 좋은 세월이다..’ 한마디 던지시며 당신 어릴 때 외할아버지가 공부하지 말고 집안일 거들라고만 하셨다고, 당신이 큰아들을 낳으셨을 때 외할머니가 젖먹이 막내 동생을 키우셨다며 살아오신 험난한 세월을 들려주시던 말씀. 성격이 까다로우신 아버님과 사시면서 쌓인 불만을 언뜻 언뜻 비추시면서 ‘남편한테 너무 잘 하려고만 하지 말아라’하신 충고, 동서들에 대해 못 마땅하신 속내를 드러내며 딸 없는 외로움에 대한 표현들....
이런 말씀들은 오랜 세월을 거쳐 어머님에 대한 나의 애정과 믿음이 커지게 하였고, ‘남편의 어머니’가 아닌 ‘어머니’로 내 성장과정의 ‘결손’을 채워주고 계시다. 특히,
오늘 조카를 통해 마흔 다섯이 된 내 생일을 축하해주시니, 살아오는 동안 나를 ‘있게’하신 어머니들을 생각하며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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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si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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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 샘.. 오늘 생신이세요? 이를 어쩌나... 축하인사도 못 드렸네... 오늘이 가기 전에... "생신 축하드려요" *^^* 근데, 포스트 보니까 저도 엄마 생각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