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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문 운동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을 위한 시론: 제4장 (3)

한동백 | 집행위원

 


β. 생태


 

자본주의의 과잉생산은 그간 인류가 경험하지 못하였던 극단적인 수준의 환경 오염을 만들어냈다. 자본주의의 생태 파괴는 이미 부르주아 학계 내에서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자본주의 확대 재생산 진행되면 될수록 생산에서 생산수단투입계수가 상대적으로 증가시키는데, 왜냐하면, 개별 기업은 생산된 가치의 전화 형태로서의 (개별적) 총가격을 낮춰야 시장에서 초과이윤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쟁이 거듭될수록 가치 총량에서 가변자본 가치의 비중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게 되고, 그만큼 노동생산성과 상품의 재고량도 증가한다. 자본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해당 부문에서 과잉생산을 전제하고 생산을 전개한다. 이윤을 확보하기 위한 자본의 경쟁으로 인해 과잉생산된 상품은 자본주의 사회의 고유한 생산관계로 인하여, 개개의 효용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되지 못하며, 종국에는 폐기처분된다. 이렇게 하여 자본은 낭비를 가속화한다. 그 결과 토지의 황폐화, 수질 오염(바다 및 지하수 오염 등), 자원낭비, 온실 기체의 과도한 유출 등의 심각한 환경 오염을 유발한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사문·분석을 유의할 수 있다:

“급변하는 유행에 맞춰 저가의 의류를 빠르게 생산·유통하고 소비하는 소위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을 추구하는 패션업계가 과잉생산에 따른 재고 줄이기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패스트 패션이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과잉생산에 따른 재고들이 쌓이면서 환경 오염에 미치는 영향이 더 커지면서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업체의 경영적 생존은 물론 인류의 생존을 위해 패션업계의 재고 줄이기가 화두로 제기되고 있다고 LA 타임스가 3일 보도했다. LA 타임스는 패스트 패션업계의 환경 문제는 제작과정과 과잉생산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버려지는 패스트 패션 옷들로 인한 환경 오염 문제도 심각하다. 패스트 패션 의류는 가격이 저렴한 대신 품질이 낮아 오랜 기간 입을 수 없을뿐더러 유행이 지나면 몇 번 입지 않았더라도 버려지기 일쑤이다. 이 때문에 자원낭비, 쓰레기 문제와 더불어 폐기된 의류의 소각 처리시 이산화탄소와 다이옥신 등 각종 유해물질을 발생시켜 지구온난화를 유발한다는 비판을 받고있는 것도 사실이다. 유엔에 따르면 패션업계는 지구 온실효과를 가속화하는 데 10%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항공 및 선박업계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수치다. 하지만 문제는 과잉생산 관행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는 데 있다. 패스트 패션 대표 주자격인 ‘H&M’의 경우 지난해 재고 규모가 무려 43억 달러에 이른다. 할인시장으로 재고 소진을 해 보지만 또 다른 유행을 지향하는 제품의 과잉생산이 이어지면서 재고의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1

이름마저 ‘친환경적’인 ‘에코백’조차 자본주의적 생산에 들어서는 순간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야기한다:

“최근 일회용 비닐봉지로 인한 환경 오염을 줄이기 위한 솔루션으로 손꼽히던 면 토트백, 에코백이 과잉생산으로 인해 생각만큼 환경친화적이지 않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미국과 영국, 덴마크에서 발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면 소재의 에코백은 131회, 텀블러는 재질에 따라 최소 15회에서 39회 이상 재사용해야만 환경 보호 효과가 발생한다. 한 사람이 여러 종류의 에코백을 가지고 있다거나, 구입 후 사용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오히려 비닐봉지보다도 더 해롭다는 것이다. 실제 섬유 재활용 및 지속가능성 전문가들은 에코백을 재활용하더라도, 가방에 인쇄된 로고와 메시지 등으로 인해 재활용 면적이 줄어든다고 강조한다. 이런 부분은 천에서 잘라내야 하고, 결국 재활용을 위해서는 10~15%의 낭비 부분이 생기게 된다.”2

지하수 오염원에서는 원자력 발전소보다 훨씬 높으며, 90%에 달하고 있는데, 이는 세계 수질 오염에서 축산업이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축산업의 과잉생산은 단순히 수질 오염만이 아니라 지구온난화에도 영향을 준다. FAO에 따르면, 2019년 기준으로 지구온난화에서 축산업의 비중은 약 18%에 하는데, R. Goodland, J. Anhang (2009)는 이보다 훨씬 높은 51%를 차지한다고 분석하고 있다.3 바다 오염도 세계 플라스틱 산업에서의 과잉생산이 그 주된 원인으로 된다. 생산되는 플라스틱의 91%는 그대로 버려지며(오로지 생산된 것의 9%만 재활용된다, 2017년 기준), 버려진 플라스틱의 최종 정착지는 바다이다.4

이외 수많은 환경 오염에서 과잉생산이 그 근원으로 되고 있다는 보도와 분석은 차고 넘치며, 이를 모두 인용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이다.

 

자본주의는 그 사멸에 가까워질수록 인간과 자연 간의 모순을 더더욱 격화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발전이란 자본의 자기 정립 활동이 확립하는 모든 생산적 요인이 가져오는 환경적 요인의 부단한 축적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축적을 구성하는 속성 중 하나가 생태 파괴, 오염의 축적이기 때문이다. 생태 파괴가 축적된다는 것은, 파괴된 생태, 환경의 오염이 사회적 수준에서 제어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음을, 즉 ‘사회적 자정 가능 수준’을 넘어섰음을 의미한다.

 

인간과 자연 간의 모순이 격화한다는 것은, 둘의 관계가 대립·비적대적 모순을 넘어서 적대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적대란 인간의 고유한 활동이 더 이상 자연과 조화될 수 없다는 것, 또는 그러한 상태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은 항상 외적 자연의 토대 위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따라서, 실은 인간과 자연의 적대로 나아가고 있음은 곧 인간종의 멸종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언급한 인간과 자연 간 물질대사의 균열(Riss im Stoffwechsel zwischen Mensch und Natur)이 뜻하는 바이다.

 

생태운동의 기원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생태 오염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기에 대한 인식이 먼저 필요하다. 왜냐하면, 특정한 사회모순이 없으면, 특정한 사회운동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세기 초중반부터 본격적으로 기계제 대공업이 발달하면서 인류는 대기권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기체 이상의 물질을 방출하였다. 이 시기 인간의 생산 활동은 화석연료 연소, 금속 제련, 폐기물 소각 등 다양한 독성물질을 방출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인간의 건강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쳤다.5

아래의 표는 전 세계적인 대기권 금속류 방출량을 보여준다:6

 

연평균 방출량 (톤)

기간

카드뮴

구리

니켈

아연

1850~1900

380

1,800

22,000

240

17,000

1901~1910

900

5,300

47,000

800

39,000

1911~1920

1,100

8,000

49,000

2,100

49,000

1921~1930

1,400

9,600

110,000

2,100

62,000

1931~1940

1,700

12,000

170,000

4,900

75,000

1941~1950

2,200

17,000

170,000

8,000

96,000

1951~1960

3,400

23,000

270,000

14,000

150,000

1961~1970

5,400

44,000

370,000

26,000

240,000

1971~1980

7,400

59,000

430,000

42,000

330,000

1981~1990

5,900

47,000

340,000

33,000

260,000

 

삼림 파괴 역시 기계제 대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19세기 무렵에 이르러서 극심해졌다. 삼림 파괴의 주요 원인은 광산 채굴, 대규모 목장 건설, 땔감 채취, 철도 건설이었다. 일례로 1860년 이전 북아메리카에서는 농지와 목장을 조성하기 위해 약 90%의 삼림이 파괴되었다.7

 

생태운동은 이와 같은, 환경 오염의 발전 속에서 타당한 당위를 지니고 성장한 측면이 있다.

 

생태운동의 본격적인 생성 시기에 관해서는 그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산업혁명 후 생태 파괴, 특히 대기 오염과 삼림 파괴가 두드러짐에 따라 그에 조응하는 만큼 생태운동이 성장하였다는 것은, 생태운동의 역사를 되짚을 때 발견되는 보편적 사실이다. 일례로, 산업혁명 시기에 활동하였던 낭만주의 시인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는 윈더미어(Windermere) 해안 보니스(Bowness)의 1마일 떨어진 호수 지역(Lake District)의 내부로 철도가 건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실상 단독으로 공개 반대 운동을 전개한 적도 있다.8 이때문에 그를 생태운동의 기반이 되는 행동양식을 남겼다고 평가하는 견해 또한 존재한다.9 이후 환경 오염이 지속적으로 증대하면서 수많은 생태운동 조직이 설립되었다. 1889년 영국에는 대대적인 모피 산업과 삼림 파괴에 의한 생물종의 다양성 감소를 막기 위한 일환으로서 깃털 연맹(The Plumage League)10이 설립되었다.11 또한 1898년, 대기 오염 방지를 위한 환경 조직인 석탄연기저감협회(Coal Smoke Abatement Society)12가 설립되었다. 이 단체는 1926년 연기감소법과 1956년 청정대기법 제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3 일국적 차원에서 자연환경 일반 보존 운동으로서의 생태운동은 1895년,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를 통해서 확산되었다.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 한국지부의 소개문에 따르면,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은 “당시 영국은 무분별한 개발과 자연환경 파괴 그리고 자연·문화유산의 독점적 소유에 의한 각종 사회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탄생하였다.

 

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생태운동은 자본주의의 전개가 몰고 온 생태 파괴의 발전과 함께 성장하였다. 특히 그중에서도 생태운동 조직의 성립이 가장 잦았던 나라는 당시 자본주의의 발전 정도가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던 영국에 집중되어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 들어서는 자국의 생태 모순을 식민지에 전가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며, 제국주의 침략 행위를 통해 그 지역의 생태를 재생 불가능 수준으로 파괴한 역사 또한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과 오키나와 등에 존재하는 미군 기지가 방출하는 오염원불법적 독극물 처리, 무단 석유 방류 등이 대기·토양·지하수·하천을 오염시킨 사례가 숱하게 존재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은 베트남 전역에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 에이전트 화이트(Agent White), 에이전트 블루(Agent Blue)와 같은 독성이 매우 강한 제초제를 살포했는데, 이때문에 생겨난 삼림 파괴는 오늘날까지 베트남 생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제국주의 전개 양상에 따라 인간과 자연 간의 모순이 격화하면서, 20세기에 들어서 생태운동은 더욱 성장·확산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부르주아는 어떻게든 각국에서 격화하는 생태 모순을 ‘해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는데, 생태 모순이 각국 계급투쟁에 정치적 상승효과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이는 제국주의 부르주아에게 매우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하여 생태 문제를 향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전형적인 틀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클라우스-디터 섀퍼(Klause-Dieter Schäfer)는 생태 모순에 관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경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전지구적 생태 위기(globalen ökologischen Krise)”라는 테제의 제시; 경제 성장 제한의 요구; 2.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뛰어넘은” 생태 지향적인 사회 성립에 대한 요구; 3. 생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보다 우월하다는 견해; 4. 기존 사회경제적 질서의 틀 내에서 가치 변화를 통한 생태 문제 해결 가능성에 대한 환상; 5. 생태학적 문제는 인간의 6. “불변하는 본성(unveränderlichen Wesen)”에서 야기된다는 견해; 7. 한쪽에서 계급투쟁을 반대하면서 생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견해.14

생태 모순에 관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이 모든 경향을 세세하게 다룰 필요는 없다. 일반적으로 인간과 자연, 또는 생태 간 관계를 다루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일곱 가지 성격을 압축적으로 가지고 있다. 일곱 가지 특성은 모두 “우리 시대의 성격, 사회발전에 있어서 객관적 법칙의 존재, 생산양식의 규정적인 역할, 그리고 그로부터 나타나는 사회발전의 물질적 원동력을 부정하는 것이 포함”15되며, “이러한 모든 [이데올로기적] 반영은 그 다양한 변형태로써 다소 뚜렷한 반공주의를 특징으로 지닌다.”15

생태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국제회의인 ‘로마클럽(Club di Roma)’이 있다. 로마클럽은 1968년, 이탈리아 자본가인 아우렐리오 페체이(Aurelio Peccei) 주도로 열린 회의로, 생태운동에 신맬서스주의를 확산시킨 일대 계기였다. 이 회의는 1972년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라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이 보고서는 인간의 누릴 수 있는 경제적 성장에는 한계가 있으며, 이것은 지구상의 유한한 자원이 절대적으로 규정짓는 필연임을 강변하고 있다. 또한 생태 파괴의 원인을 인구의 증가에 놓는다.

 

이 보고서는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보고서에서 전개된 내용의 핵심은 맬서스의 ‘인구법칙’과 다를 바 없었다. 또한 이 보고서의 내용은, 이미 보고서가 나오기 전인 1968년, 폴 랄프 애얼릭(Paul Ralph Ehrlich)이 저술한 『인구폭탄』이 함축한 내용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이 보고서는 생태운동이 신맬서스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이른바 ‘성장 없는 사회’, ‘제로 성장 사회’를 주장하는 데에 힘을 보탠 것으로 되었다. 놀랍게도 오늘날까지 국제적 규모의 다양한 생태운동 조류생태 파괴의 본질을 사회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자체의 문제라고 간주하는 모든 이데올로기는 대부분 본질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공존에 관한 이러한 입장을 승인하는 데서 절대적인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아니라면, 자연을 의인화하여 인류를 지배하는 절대적 주체로 상정하는 식의 신비주의·영성주의를 따르는 경우이다. 종국에는 이러한 주장 역시 신맬서스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호르스트 파우케는 이러한 견해의 허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로마클럽”은 “성장 한계”를 세세한 부분까지 계산했지만, 오늘날 10억 명이 넘는 인구가 내일 어떻게 살아나갈지 모르는 상태이고, 아무런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을 때 미래 세계에서는 현재 15억 명의 인구가 이미 처해 있는 빈궁하고 타락한 상태보다 더한 빈궁함이 도래할 것이라는 컴퓨터 예측을 간과하고 있다. 이미 자본주의 세계 여러 지역의 현재적 상황을 부분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이러한 종말론적 관점은 정치적, 사회경제적 근원을 지니는 것이며, 이러한 상황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당시에 이미 파악하고 해명했듯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전체의 근본적인 변혁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17

 

신맬서스주의의 제국주의적 반동성은 빈곤국·개발도상국에 대한 관점에서 극렬히 드러난다. 일례로, L. 마주르, I. 앵거스 사이에서 벌어진 이른바 빈곤 인구의 ‘인구감축 논쟁’은 이 반동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18 신맬서스주의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이른바, ‘맬서스 트랩(Malthusian Trap)’, 사회체제 내부의 구체적 운동법칙이 고려되지 않은 채 그 ‘자체’로서 규정된 ‘성장의 한계’ 등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생태운동의 이념적 경향19은 노동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인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여러 계급적 운동을 이른바 ‘인간중심주의’, ‘기술지상주의’, ‘성장에 대한 무근거한 낙관주의’로 비난하는 근원으로도 된다. 물론 생태주의에 근거한 생태운동 역시 일반적으로 생태 파괴의 원인에 자본주의가 있음을 일정 인식하고 있다. 이는 멀리 갈 것도 없다: 2022년에 열린 9·24 기후정의행진의 구호, 그리고 그 후 머지않아 전개된 4·14 기후정의파업에서 표출된 구호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선언적으로는 거론하되, 생태 파괴라는 결과를 자본주의 경제의 일반 법칙이 어떠한 매개 범주를 거쳐서 불러오는지, 그리고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는 어떠한 사회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일절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즉 우리가 자본주의를 생태 파괴의 근본으로 놓는다면, 우리는 그 전개 양상에 대한 구체적 해명과 자본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청사진을 군중에게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국내 생태운동은 이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 하였다.

 

자본주의 발전법칙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경제적 발전법칙이 전개되는 사회를 구상하지 않고 행해지는 ‘자본주의 비판’은 엄밀히 따진다면 자본주의 비판이라고 할 수 없다. 막연한 인식은 노동계급의 이해에 반하는 요구를 하게 만드는 원인으로도 된다. 일례로, 생태주의에 근거한 생태운동에서 일반적으로 요구하는 ‘정의로운 전환’이 노동계급의 이해와 전면적으로 배치된다는 것은 새삼 다룰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생태주의에 근거한 생태운동은 일반적으로 ‘생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체제의 전면적 변혁이 아니라, 체제 내에서 이른바, 소비자 ‘네트워크’ 방식으로 행해지는 ‘자율적 공동체’를 구상한다. 그러나 수많은 부르주아 전문가가 이제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생태 파괴의 근원은 과잉생산에 있다. 과잉생산이란 계획적으로 조절되지 않는 생산, 즉 무정부적 생산의 필연적 결과이다. 생산과 소비가 전일적으로 계획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또한 환경 오염을 막을 수 있는 첨단 기술의 전면적이고 신속한, 체계적인 적용이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인류가 생태 난제를 해결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에서 인간이 자연을 얼마나 인간의 이해에 맞게 개변할 수 있는가의 싸움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자연에 대한 인간의 투쟁”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 고유한 생산관계로 인해 이러한 싸움에서 ‘대자연의 복수’를 그대로 허용하고 있다.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집단적이고 합리적인 통제의 정도, 즉 자연의 의식적인 전유는 오직 새롭게 형성되어 나가는 공산주의적 경제 관리 조직에 의해서만 작동될 수 있다. 자연에의 전유의 전면적이고 계획적인 형태는 그러한 형태에 적합한 의식의 재생산이 유효한 사회일 때만 성장하고 유지될 수 있다. 경제의 계획적 도구를 활용함으로써만 비로소 가능해지고 높은 수준에서 수행될 수 있는 집단적인 인간-자기 통제는 자연 전유의 사회주의적 형태는 기업과 지역 사회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규모로서 통일된 생태 경제 시스템을 구축할 것이다.20

 

생태운동과 사회체제의 근본변혁을 목적하는 변혁적 계급운동 사이의 대립은 매우 자주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표출되며 그것도 아주 적대적인 방식으로 발현된다. 특히 생태운동은 일반적으로 20세기 사회주의권에서 벌어졌던 생태 파괴의 몇 가지 사례에 대해 일정 수준에서 학습된 경우가 많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전통적인 의미의 사회주의’는 ‘대안 사회’로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사회주의의 성과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 노동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의 기본 전제를 공격하는 것에서 극렬히 드러난다. 노동계급 역시 이에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일환으로서 대응한다. 문제점은, 일차적인 운동 동기가 인간과 자연 간의 모순, 즉 생태 모순인 경우에 속하는 활동가가 (계급적 운동에 대립되는) 생태운동에 지속적으로 인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는 역시 노동운동에 인입된다. 이러한 전개 양상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노동운동과 생태운동 사이에 모순을 격화하는 요인으로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변혁적 노동운동은 생태운동이 다루는 대부분의 의제를 공개적·구체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질문에는 구체적인 해명이 필요한 법이다. 다양한 환경 오염의 사례를 추출하여 이것이 어떻게 자본주의·제국주의의 내적 모순의 개별적 전개 양상으로 될 수 있는가를 과학적으로 설명해야 하며, 또한 자본주의에서는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과잉생산으로 인해 생태 파괴가 필연임을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 그리고 20세기 사회주의에서 환경 오염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였으며, 실제로 20세기 사회주의에서 생태 파괴가 심각한 수준이었는지 역사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실천 외에도, 거리에 나와 생태운동과 적극적으로 접촉하면서, 어떻게 하여 생태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적 해법에 대해 회의하며, 마르크스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지, 그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 파우케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그들[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간에 의해 통제되지 않고 계획되지 않은 생산력 발전이 인간과 자연에 가져오는 위험을 지적했을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인간 발전에 다가오는 위험을 역사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방향과 방법 또한 보여주었다. … 과학으로서의 생태학은 지난 세기에 막 출현하였으므로, 두 인물 모두 “생태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사용할 수도 없었지만, 그들의 생각은 가장 넓은 의미로서의 오늘날 일반 생태학이 파악한 것으로 알려진 내용과 일치했다.”21​ 그러나 생태 문제에 대한 생태주의적 접근 방식과 마르크스주의적 접근 방식은 그 심원에서부터 서로 근본적 대립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대립은 표층적으로 드러난 몇 가지 문제를 다루는 것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물질대사의 균열 정도가 날이 갈수록 심화함에 따라 적지 않은 지역에서 인간과 자연 간의 모순이 주요모순으로 현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자본주의가 지양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인간과 자연 간 모순을 격화할 것이며, 그만큼 생태 문제가 지니는 위상은 날로 커질 것이다. 인간과 자연 간의 모순은 노동계급의 주체적 역량에 따라 노자 대립으로 전화할 수 있다. 생태 문제에 있어 노동계급의 일반적 과제란, 인간과 자연 간의 대립·모순을 지양하여 그것을 자체 내에 보존한 대립·모순으로서 더욱 구체적 의미를 지니는 노자 대립·모순으로 전화시키는 것에 있다.

 

2024년 11월 11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 남상욱, “옷 재고 줄여야 기업도 살고 환경도 산다”, 한국일보, 2019월 11월 5일.텍스트로 돌아가기
  2. 김민정, “과잉 생산되는 에코백, 환경에 오히려 독... 유기농 면가방 7천번 사용해야”, ESG경제, 2021월 8월 31일.텍스트로 돌아가기
  3. K. Dopelt, P. Radon & N. Davidovitch, “Environmental Effects of the Livestock Industry: The Relationship between Knowledge, Attitudes, and Behavior among Students in Israel”, Int J Environ Res Public Health, 16 (8), 2019: 2-3.텍스트로 돌아가기
  4. D. Selby, “Plastic Production Will Increase by 40% Over the Next Decade”, Global Citizen, Dec 27, 2017.텍스트로 돌아가기
  5. J. R. McNeill, 『20세기 환경의 역사』, 홍욱회 역, 서울: 에코리브르, 2008, 123.텍스트로 돌아가기
  6. Nriagu, 1994.; 위의 책, 124.텍스트로 돌아가기
  7. 위의 책, 368.텍스트로 돌아가기
  8. S. Hess, William Wordsworth and the Ecology of Authorship: The Roots of Environmentalism in Nineteenth-Century Culture, Virginia: University of Virginia Press, 2012, 116-7.텍스트로 돌아가기
  9. 주혁규, 「워즈워스의 탈체화된 시각 주체와 미학적 자연」, 『영어영문학』, 65 (4), 643.텍스트로 돌아가기
  10. 현 왕립조류보호협회(Royal Society for the Protection of Birds).텍스트로 돌아가기
  11. A. N. Penna, Nature's Bounty: Historical and Modern Environmental Perspectives, New York: M. E. Sharpe, 1999, 99.텍스트로 돌아가기
  12. 현 환경보호 영국(Environmental Protection UK).텍스트로 돌아가기
  13. M. L. Bell, D. L. Davis & T. Fletcher, “A retrospective assessment of mortality from the London smog episode of 1952: the role of influenza and pollution”, Environ Health Perspect, 112 (1), 2004: 6-8.텍스트로 돌아가기
  14. K. -D, Schäfer, „Dominierende Standpunkte bürgerlicher Ideologen zu ökologischen Problemen der Gegenwart“,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27 (5), 1979: 611.텍스트로 돌아가기
  15. Loc. cit.텍스트로 돌아가기
  16. Loc. cit.텍스트로 돌아가기
  17. H. Paucke, „Marx, Engels und die Ökologie“,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33 (3), 1985: 209.텍스트로 돌아가기
  18. 「여성의 권리, 인구 그리고 기후변화 논쟁 3」,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2010월 4월 16일.텍스트로 돌아가기
  19. 이러한 점에서 상당히 복잡한 문제가 파생된다. 대부분의 생태주의자는 스스로 “신맬서스주의를 지향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들 주장의 종국적 귀결은 신맬서스주의의 ‘처방’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경제적 사회구성체, 사회체제와 무관한 ‘생산력의 한계’에 얽매여 있는 이상, 생태 문제를 ‘해결’하는 ‘고리’는 필연적으로 신맬서스주의로 수렴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해의 기초 위에서 바라보는 ‘생태 문제’란, (사회체제와 무관하게) ‘자연에 필연적으로 내재한 생산력의 한계’로부터 산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영속화’된 존재 양식은 지구의 생산력과 공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이 ‘변화할 수 없는 존재 양식’을 지닌 인간이 생태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인간의 일정량 ‘소멸’로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더 이상의 ‘욕심’을 추동하지 않는, 이른바 ‘제로성장’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어느쪽이든 맬서스가 『인구론』에서 최종적으로 제시한 ‘해결법’과 같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0. A. Bauer, „Probleme der Naturaneignung“,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30 (11), 1331.텍스트로 돌아가기
  21. „Marx, Engels und die Ökologie“,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33 (3), 1985: 207.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