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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흐주의·아베나리우스주의의 변종들에 대하여」 『총명한 유물론』 제1집 겨울호
한동백 |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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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철학사에서 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대표적 ‘공헌’은 기존 분석철학의 ‘이상(理想)’─오로지 기호로써 무모순의 형식논리가 확립될 수 있다는 믿음, 단일한 통사론의 확립으로써 철학적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헛된 것임을, 특히 부르주아 논리학에서 금과옥조로 여기는 대상언어-메타언어 이중 체계의 내재적 모순을 폭로1하였다는 데 있다. 그가 폭로한 모순을 지녔던 입장은 그가 『논리철학논고』를 냈을 때만 하더라도 그가 고수하던 것─수리적-기호적 수단으로써 완전한 논리를 구상해낼 수 있다는 환상, 전기 분석철학의 ‘이상’─이었다.2 그러나 그는 전기 분석철학의 한계를 파악한 귀결로써 ‘확립’된 그 자신의 ‘이론’─중기 철학부터 주요한 주제로 된 ‘언어놀이(Sprachspiel)’─을 통해 일관된 체계를 내적으로 보증하는, 또는 보증해 가는 것으로의 학(學), 인식의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그에게 있어 전기 분석철학의 ‘이상’이든, 개별적 지식을 수미일관한 체계로 통일해 나가는 학의 성립을 희구하는 입장이든, 이러한 것은 “질서와 이상[『철학적 탐구』(이하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이 항시 부질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 인용자]을 우리의 실제 언어에서 발견해야 한다고”3 믿는 한 경향에 불과하다. 이러한 점에서 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은 양극단을 달리는 체계이기도 한데, 그것은 논리학을 서술함에서 그 모든 부분을 고정불변의 추상적 범주로 다루는 것이 필연적으로 근본적 모순에 도달할 수밖에 없음을 간파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이 모순에서 도출되는 절대적 이율배반의 늪에서 헤겔적 의미로서 〈오성적 인식의 한계〉에 머물러 유아론의 늪으로 진입한다. 과학적 방법론의 차원에서 그의 초기 견해는 당대 분석철학에서 분자 명제로의 환원주의와 그에 뒤따라 나올 불가지론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데 환원주의와 불가지론의 막다른 길로서, 종국에 “신비주의 가능성이 생겨”4나고, “이는 비트겐슈타인에 공공연히 승인되기도 한다.”5 결국 “모든 합리적 논증은 실패하므로, 유일한 선택지는 감정의 비합리성으로 도피하는 것”5만이 차려진다. “비트겐슈타인은 말년에 정확한 언어, 즉 과학적 언어를 창조한다는 이상을 포기했다.”7
우리는 개별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대상을 취급함에서, 다루어지는 대상의 특수성을 반영한 범주로서의 논리적 범주 형성을 매우 중요한 작업으로 여긴다. 이러한 논리적 범주를 기초로 하여 우리는 대상에 관한 추상적인 파악으로부터 구체적인 파악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대상에 관한 더 많은 연관 방식을 관찰할 수 있게 되고, 이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논리적 범주 체계의 고도화를 야기한다. 이로써 논리적 범주 역시 추상적인 인식을 반영한, 동시에 그 추상적인 인식의 조건이 되는 추상적인 범주로서 점차적으로 구체적인 범주, 즉 (구체적) 개념으로 나아가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구체적인 것은 그보다 더 구체적인 연관 방식과의 대립에서는 추상적인 것으로 전화하게 된다. 예를 들어 물이 아래로 흐른다는 것을 만유인력의 법칙을 통해 설명하는 것은, 그저 물이 원래 아래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물의 본성’ 운운하는 것보다는 더욱 구체적인 인식이며, 이때 만유인력의 법칙을 통해 물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구체적인 것으로 된다. 그러나 이는 상대성이론으로써 지구 내 물의 흐름을 파악하려는 시도와 대립해 있을 때는 추상적인 것으로 전화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의 전개는 한편으로 이 과정, 이 매개를 지양(집약)한 것으로서의 직접적인 것을 정립해내게 된다. 이러한 것 중에서 언어적인 규정을 받는 것이 과학사의 발전을 통해 형성된 여러 낱말, 문장, (통사적 구조까지 포괄한) 기타 문법 등이다. 논리적 범주는 이렇게 변화·발전한다. 논리학은 이러한 인간의 역사적 실천으로써 불가피하게 개별적으로 규정된 (응용)논리학으로서 발전해 간다. 이것이 대상에 관한 일반적인 취급으로서 다양한 학문이다. 개별적 논리학, 즉 다양한 응용논리학은 이제 특수한 대상의 객관적인 존재 양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그것이 다루는 대상의 제 특성에 따라 우리가 흔히 자연현상에 관해 연구하는 수많은 방법론을 포섭해 낼 수 있는 체계로 성장해 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논리학의 이러한 발전양식은 숱하게 등장한 세계 과학사에 관한 문헌을 통해서 아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교통이 발달하기 전, 즉 동서양 간 소통─간단한 경제적 교류부터 학문적 교류까지 포괄하여─이 가능해지기 전부터 각자 인류는 자연의 여러 대상에 대한 일반적인 논리적 범주를 정립해 왔으며, 그것 내용의 서로 간 동일성이 여러 측면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역사를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인식주관이 자연적 또는 경제적 활동을 해 가는 과정에서 형성해낸 주관적 범주가 객관적인 것의 제 범주의 모든 연관 방식과 일정한 필연적 연쇄를 이루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논리학이라는 것이 인간의 사고작용과도 분리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때 논리학을 구성하는 세포들은 필연적으로 외적 대상을 반영한 특수한 사유 형태로 정립되어 있는 것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예발트 일리옌코프(Evald Il'enkov)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변증법적 논리학은 우리의 의지나 의식에 전혀 의존하지 않으면서 필연적인 운동과 계기로 진행되는 과학적 사고작용의 발전과정을 그 목표로 삼는다. 우리의 의식과 의지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반영하고 개념으로 재생산(대상의 정신적 재현)하는 것, 다시 말해 나중에 사실로(실험이나 실천으로) 재창출할 수 있도록 먼저 대상을 개념의 운동 논리로 재현하는 것이 바로 논리학이라면, 논리학은 응당 사고가 어떻게 전개되고 발전되는가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이렇게 볼 때, 논리학은 사고작용에 관한 이론적 표상 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 변증법적 논리학은 자연을 창조적으로 변형시키는 주관적 활동의 보편적 체계일 뿐만이 아니라, 항상 객관적 요구와의 연관 하에서 주관적 활동이 수행되는 장(場)인 자연적 혹은 사회역사적 물질의 변화과정에 관한 보편적 체계이기도 하다.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바로 이러한 점이 변증법, 현대의 과학적(유물론적) 세계관의 인식론 그리고 논리학의 동일성(단지 ‘통일’이 아니라 명백한 동일성, 완전한 일치)에 관한 레닌 테제의 실질적인 요점이다.”8
논리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정의는 이와 정반대이다. 그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논리학은 어떤 의미에서 고상한 것인가? 왜냐하면 논리학은 특별한 깊이─보편적 중요성─가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논리학은 모든 학문의 토대에 놓여 있는 듯이 보였다.─논리적 고찰은 모든 사물의 본질을 연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물들을 그 토대에서 보려고 하며, 실제 이런저런 방식으로 일어나는 일에는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그것은 자연현상의 사실에 대한 흥미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고, 인과적 연관을 파악하기 위한 필요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경험적인 모든 것의 토대나 본질을 이해하려는 열망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우리가 이 목적을 위해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야 한다는 말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그것으로 새로운 어떤 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탐구에서 본질적인 사항이다. 우리는 이미 눈앞에 있는 명백한 어떤 것을 이해하고자 한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9
“논리적 고찰은 모든 사물의 본질을 연구”하지만, 그것은 “자연현상의 사실에 대한 흥미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며, “인과적 연관을 파악하기 위한 필요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논리적 고찰이 목표로 하는 “모든 사물의 본질을 연구”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경험적인 모든 것의 토대나 본질을 이해하려는” 것이 어떻게 자연현상의 사실, 그 인과적 연관의 밖에서 개진될 수 있을까? 여러 항의 인과적 질서를 (비록 조잡하긴 하나) 전제하거나 ‘철학적 기술’에서 그에 크게 할애하는 묘사를 나는 『탐구』의 군데군데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개별 응용논리학의 발전은 대상에 관한 논리적 범주의 발전을 그 자신의 조건으로 가지면서도 그것을 근거하는 상보적 관계에 있다. 그런데 어째서 논리학으로써 “새로운 어떤 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성립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과 특수 대상─언어, 논리─의 연관 방식을 규명하는 것 간의 완전히 분리를 염두에 두었음은 명백하다. 이렇게 논리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규정은 전체적 연관 속에서 살펴볼 때 정합성이 극도로 떨어지는데, 이는 그간 그가 비판하였던 분석철학자들의 논리학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취급 방식과 하등의 차이도 없다.
그는 이어서 과학의 체계적 발전에 완전히 독립해 있는 ‘철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고찰이 과학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우리의 선입견과는 반대로 이러저러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느낌은—그것이 무엇을 뜻하든지—우리의 관심사 밖이다. (생각함을 정령(精靈)으로 간주하는 견해.) 그리고 우리는 어떤 종류의 이론도 내놓을 수 없다. 우리의 고찰에는 어떤 가설적인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설명[사실에 대한 과학적 설명; 역자]은 사라져야 하고, 기술(記述)만이 그 자리에 들어서야 한다.”10
그는 철학은 이른바, ‘기술(記述)’이라는 것만을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철학적 문제라는 것은 ‘기술’─그것도 다름이 아니라 ‘일상언어’에 대한 것─의 문제이다. 철학은 설명이 아니라 언어의 ‘실천적 사용’에서의 ‘경련(Krampf)’을 ‘치유’하는 것이다. 이를 그는 “치유로서의 철학(Philosophie als Therapie)”라 한다.11 이 ‘치유철학’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체계상에 ‘언어놀이’를 뜻한다. 그에 따르면 “‘언어놀이’라는 낱말은 언어를 말하는 일이 어떤 활동의 일부, 또는 삶의 형식(Lebensform)의 일부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12하는 것이다.
‘삶의 형식’이 인간이 사회적 활동을 함에서 얻는 관계항의 총체, 또는 그것의 제 형식을 뜻하는 것이라면 제반 과학 실천과 그 지식은 삶의 형식에 어떻게든 연관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는 『탐구』에서 ‘삶의 형식’이 과학적 실천의 개념적 판단, 여러 과학적 견지에 요구되는 지식학과 독립될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해 일절 다루지 않는다.13
나는 이 주제에 대해서 조금더 언급해야만 하겠다─먼저 ‘삶의 형식’이 인간적 관계항의 총체라는 견지를 그대로 가지고 간다면, 과학 실천과 그 성과가 가져오는 여러 (인류) 삶의 내용이 ‘삶의 형식’의 범주 내에 있다는 결론에 당도한다. 과학─인류사에서 생산력의 진보를 추동하며, 동시에 생산력의 진보를 통해 촉진되는─이 우리의 삶의 형식을 구성한다는 명백한 현실에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를 도입한다면 그가 빚는 구상의 정합성이 크게 흔들리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과학의 영적 기초에 관한 일반학인 지식학을 그의 언어철학으로 정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 탐구는 언어의 ‘사용’보다 더 심오한 층의 문제이다. 이 층은 언어만이 아니라 인식의 문제까지 해명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추종자들은 ‘삶의 형식’에서 과학적 실천, 제반 과학의 성과와 관련된 모든 지식학적 문제를 배격하려 할 것이다. 만약 ‘삶의 형식’이 개개인이 겪는 직접적-감각적 확실성의 군집일 뿐이고, 그 군집에서 진리로의 점근적 상승의 영적 기초에의 침투가 봉쇄되어 있다면 ‘언어놀이’의 ‘규칙’은 자기 내에서 사물의 본질과 가상을 정련해 낼 그 어떠한 지적 토대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세공되지 않은 경험지(經驗知)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오류를 야기하였는지 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에서 도대체 과학적 사실과 완전히 독립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라도 할 수는 있긴 한가? 과학과 관련된 내용이 ‘삶의 형식’의 내적 계기가 있음을 부정할 수 있는 수단은 인류사와 과학사의 강력한 연관성의 역사적 증언 아래에서 존재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부정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제시한 바 없다. 그리고 그렇다고 한다면, 제반 과학 분야 역시 ‘언어놀이’의 일종이라고 간주하기에 이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예를 들어, 생물학은 ‘생물학의 언어놀이’이며, 경제학은 ‘경제학의 언어놀이’이고, 사회학은 ‘사회학의 언어놀이’이다.
이제 ‘언어놀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것들, 다시 말해 다양한 ‘언어놀이’는 서로의 ‘언어놀이’의 ‘규칙’에 그 어떠한 제약성도 부여하지 않는, 서로에 대해 절대적으로 무관심적인 것으로서 다루어져야만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그의 언급에서 유추할 수 있다:
“우리의 명료하고 단순한 언어놀이들은 미래에 언어를 규제하기 위한 예비 연구들─이를테면 마찰과 공기 저항을 무시한 최초의 근사치들─이 아니다. 오히려 언어놀이는 유사성과 비유사성을 통해 우리 언어의 연관 관계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비교의 대상(Vergleichsobjekte)으로서 존재한다. 요컨대 우리는 범례를 있는 그대로, 즉 비교의 대상으로─현실이 그에 대응해야 하는 선입견이 아니라, 일종의 척도로서─설정할 때만 우리 진술들의 부당함이나 공허함을 피할 수 있다.”14
서로 각이한 “명료하고 단순한 언어놀이들”이 미래에 있을 언어의 규정적인 한계, 즉 그것의 내적인 한계성을 규정짓는다면 그것은 자연히 미래에 있을 언어─그것이 뜻하는바 내용과 형식을 모두 포괄한─를 규제하는 것으로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로에 관해 맺는 연관이라는 시야에서 이것을 바라본다면, 이는 ‘마찰과 공기 저항을 고려한 최초의 근사치’(특수)에 대한 “마찰과 공기 저항을 무시한 최초의 근사치”(보편)의 관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로써 ‘언어놀이’들이 서로를 제약하는, 상호 연관적인 것이라는 진실에 다다를 수 있다. 반면 그 반대─비트겐슈타인이 ‘언어놀이’에 대해 의도하고 있는 그것으로서─의 편에서는 서로는 분절된 것, 즉 “비교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서로에 대한 절대적인 반대세계로서의 무언가이다. 그가 공언하는 ‘언어놀이’에서의 그 절대적 무관심성은 철학의 근본문제에서 세계 인식의 가능성에 비추었을 때 철학적 불가지론(그 끝이 유아론임이 항상적인)의 전형이며, 다원론적 세계관으로 전락할 인식론적 기초를 제공한다.
오늘날까지의 과학 발전사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개별과학이 단순한 것에서 고도로 복잡한 체계로 나아가면 갈수록 그것의 발전에서, 그것과 상이한 분야의 과학적 지식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면서, 이러한 상이한 분야와의 통일이 전개된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각 분야의 논리적 범주─낱말, 문장, 특정한 구문 체계로 표현되는 것 등을 포괄한 것으로서─는 불가분 연관을 이루는 제 분야의 이론적 제약성을 규정하며 또 그걸 비약적으로 지양할 씨앗을 품는다. 반대로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그것들은 그저 서로에 관해 ‘비교의 대상’으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놀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가족 유사성(Familienähnlichkeit)’과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Übereinstimmung)’라는 개념을 고안하였다. ’가족 유사성‘은 ‘언어놀이’들 또는 ‘언어놀이’를 촉발한 과정들 각각이 서로에 대해 공유하는 동일성이 있다는 구상을 겨냥해 있다. 예를 들어 ‘생물학’, ‘경제학’, ‘사회학’ 간의 ‘공통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것이 다루는 대상이 생명체와 관련된 활동과 연관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 외에도 더 많은 (아직은 추상적인) 공통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부정한다: “만약 당신이 그 놀이들을 본다면, 그 모두에 공통된 어떤 것이 아니라 유사성들, 연관성들 그리고 이것들의 전체적인 연속을 보게 될 것이다.”15 여기서 말하는 ‘유사성’, ‘연관성’, ‘전체적인 연속’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모든 놀이 또는 일부 놀이가 전일적 보편성을 공유할 수 없고, 그저 한 놀이가 다른 한 놀이와의 직접적 관계 속에서 형성하는 ‘공통성’만이 있으며, 이 ‘공통성’이 각자에 걸린 사슬이라는 공간에 엮여 있는 동시에, 하나의 사슬이 다음의 사슬로 넘어가면 이전의 사슬이 지녔던 그 ‘공통성’은 소멸되고, ‘다음의 사슬’에 속하는 새로운 ‘공통성’만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16 이 ‘전체적인 연속’─또는 ‘가족 유사성’─은 모든 놀이 또는 일부 놀이가 공유하는 참된 보편성으로 고양될 수 없다. 보편성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거부는 그의 중기 철학에서도 매우 직접적으로 표출되었다. 그는 『청색 책』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일반성에 대한 우리의 열망은 과학의 방법에 대한 우리의 편애라는 또다른 주된 원천을 가지고 있다. 내가 뜻하는 것은, 자연현상의 설명을 가능한 가장 작은 수의 기본적 자연법칙들로 환원하는 방법이다. … 철학자들은 끊임없이 과학의 방법을 안중에 두고 있으며, 과학이 하는 방식으로 물음들을 묻고 대답하려는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을 받는다. 이러한 경향이 형이상학의 진정한 원천이다. 그리고 철학자를 완전한 어둠 속으로 이끈다.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환원하거나 어떤 것을 설명하는 것은 결코 우리의 일일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철학은 정말로 ‘순전히 기술적(記述的)’이다. … ‘일반성에 대한 열망’ 대신에 나는 [그러한 태도에 대해; 인용자] ‘특수한 경우에 대한 경멸적 태도’라고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17
과학에서 다루는 일반성(보편성)에 대해 그는 크게 오해하고 있다. 과학적 방법의 목적은 단순히 “자연현상의 설명을 가능한 가장 작은 수의 기본적 자연법칙들로 환원하는” 것에 있지 않다. 과학의 제반 방법론은 그러한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다. 보편성에 대한 그의 해석은 오늘날까지 과학 발전사에 관한 몰이해에 기초해 있다.
예를 들어, 공유결합의 구체적 과정·실제적 전개는 공유결합을 이루는 모든 화합물 또는 분자가 지니는 화학적 결합의 보편성을 표현한다. 공유결합의 이같은 보편성을 인정한다고 하여 실제로 공유결합에 속하는 다양한 개별적 화합물, 분자의 전체적 연관 방식, 본질이 단순히 ‘공유결합 그 자체’라는 직접적인 규정으로 환원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러한 환원은 공유결합의 구체적 내용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 공유결합에는 극성 공유결합과 비극성 공유결합이 있다는 것, 공유결합을 이루는 화합물 또는 분자를 그렇지 않은 물질과 비교했을 때, 그것이 다른 화학적 작용력이 가해질 때 어떻게 반응─특히 원자 궤도의 안정성, 결합 엔탈피와 관련하여 발생하는 현상들─하느냐(그리고 그것이 이온결합 및 수소결합과 어떠한 차이를 지니는가에 대해서도)에 관한 개별적 연구까지 포괄해 가면서 비로소 공유결합이라는 보편적인 것의 구체적인 내용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이해된 공유결합은 구체적 보편 개념으로 상승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는 이미 대상의 특수성을 보편성과 통일시켜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특수한 경우에 대한 경멸적 태도”와도 거리가 멀다.
고트프리트 슈틸러(Gottfried Stiehler)는 초기 범주로서 추상적 보편이 과학적 실천과 상호 연관함으로써 완만하게 자기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발현되는 이러한 발전 과정, 즉 주어진 전(前)-개념적 진술과 현실의 끊임없는 상호 대립을 통해 이전의 범주 체계에서 사상되었던 그 체계 내부에서 잠재적으로만 있었던 차이의 항들이 전체에 적합하게 배치되어 가는 변증법적 과정이 과학에서 차지하는 학문적 지위를 강조하였다.18 이때의 보편성은 단지 진행의 특정 계기로 남아 있는 것으로서가 아닌, 탐구 대상의 보편적 연관─어떠한 공통 지표로서의 낱말이나 정적인 표상, 암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는 순환 운동 구조─의 형태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예를 들어, 화학의 발전사에서 현재까지도 쓰이고 있는 수많은 법칙 정립이 초기에는 얼마나 많은 ‘예외’ 속에서 추가적인 해명을 요했는지, 해명 과정에서 해당 법칙적 개념이 더 정교화하였으며, 이 구조물이 더 많은 화학적 현상을 예측하는 데 얼마나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는지를 보면 이는 명백하다.
이로부터 다루어지는 대상을 “가장 작은 수의 기본적 자연법칙들로 환원”하는 것만으로 과학적 방법을 설명할 수 없음이 밝혀진다. 우리가 여기서 승인해야 하는 사실은, 어떻든 구체적인 것을 얻기 위해서는 대상을 추상적 보편으로 가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반적인 상향 과정─추상화와 구체화를 위한 모든 실천을 포괄하는 것─에 수반되는 것이 변증법적-과학적 방법이다. 마르크스가 추상적 보편으로서 상정한 상품 범주를 분석하여 자본의 구체적인 자기 전개 과정, 자본주의 경제의 일반적 운동 법칙에까지 접근한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추상적인 상품 범주가 구체적인 것으로서의 상품 개념─노동의 이중성, 사용가치와 가치, 가치형태, 화폐, 자본의 형태변환 등 계기를 자체 내에 포함하며 대자적으로 존립하는─으로 정립된 그 과정도 이러한 논리의 전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적으로, 이러저러한 필수 속성의 집합체로서 있는 보편자로 정의된 특수자가, 항상적으로는 그에 덮어씌워진 보편자의 필수 속성을 공유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낱말 또는 이름을 “고정된 의미 없이 사용한다”19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이는 “N”이라는 이름에 대해 언어 사용자가 가지는 의미의 필요조건으로서 원소들, 예컨대 “1. 내가 이러이러한 장소에서 보았으며; 2. 이러이러하게 생겼고(그림들); 3. 이러이러한 일들을 했으며; 4. 사회에서 “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사람이 살았[음]”20 등에서 “만일 그중 어느 하나가 거짓으로 드러난다면”20 보편자로서 “N”의 의미는 ‘변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 ‘변경’은 ‘규칙’의 유동성을 불러온다.22
이같은 유동성은 결코 언어가 실재의 보편성을 내함하지 않음을, 그리고 보편성을 표현할 수 없음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변경’은 언어와 독립적으로 운동하는 것의 객관적 구체성에 의해 야기된다. 즉, ‘변경’은 개개 인식주관의 지성이 구현한 구조물의 오류를 실천상에서 검증했을 때 발생하는데, 그 기초는 객관적 실재에 있다. 검증에는 특수 분야의 과학 연구만이 아니라 그것의 생산 활동으로의 응용까지 포괄하는 재현이 필연적으로 매개되어 있는데, 이는 보편적인 것이며, 이 또한 언어적으로 집약된다. 그리고 그리 집약될 수 있기에 그보다 상승된 재현을 위한 현실적 규정력 또한 일반적으로 언어로써 공급되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보편자에는 모순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는 변증법적으로 보편적인 것이 참된 보편이기 위한 객관적 요건이다. 언어적 구조물은 그 규정력을 특수한 역사적 테두리에서 규정된 타자의 실천 경향을 이끌어내는 낱말, 문법, 말과 글의 형태와 문장 구조(단문, 복문, 겹문)의 조합이다. 그 조합의 각 요소에는 비록 추상성이 잔존하며, 그때문에 외양상 동일한 문장이 완전히 다른 뜻을, 또 상이한 문장이 동일한 뜻을 내포할지라도, 이 추상성은 발문자 및 발화자와 그 타자의 연관을 대상화한 속에서 그 법칙적 연관을 반영한 압축물로서 실존한다. 그것은 또다른 장(場)에서 보편성의 재현하는 것인데, 이는 순수 구문론-의미론적이 아닌, 그것과 외적 실재로서 실천의 결합 형태로서만 현상한다. 그래서 언어 조합의 구체란 문장과 문장의 연결, 문장이 기입된 매체(단행집, 논문, 신문 등)의 특질, 조합에 부착된 외적 실재의 속성─몸짓, 말투, 발음─의 역사적이고 논리적인 순서를 이해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언어는 그를 둘러싼 정립적인 사회적 존재에 피규정적이므로 그 존재의 보편성을 머금을 수 있다. 그 보편성은 언어의 조각이 아니라 언어의 총체성의 형태로 형상전이하므로, 보편적인 것은 언어가 지역적인 속성으로 온전히 표현될 수 없다.
보편의 실재성에 관해 일리옌코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이 헤겔의 논리학(변증법)의 성과를 근본적이고 유물론적으로 재정립한 것은 보편이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주장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이때 보편의 객관적 실재란 플라톤이나 헤겔의 사상의 맥과는 달리 물질적 현상의 합법칙적 연관, 즉 자기 발전하는 총체성 내에서 물질적 현상이 결합되어 전체를 구성하는 법칙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전체의 모든 구성 요소는 [그것이; 인용자] 하나의 동일한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상호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발생 기원의 통일성 때문에 상호연관되어 있다. 요컨대 전체의 모든 구성 요소는 하나의 동일한 공동 조상을 지님으로써,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물질적(즉 사고나 낱말과는 독립적인) 성격을 갖는 동일한 실체의 다양한 변형으로 생기(生起)함으로써 상호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공통적인 현상들은 동일한 부류라 간주되기 위한 유일한 근거로서 ‘가족 유사성’과 같은 것을 반드시 지닐 필요가 없는 것이다.”23
비트겐슈타인은 이어서 ‘일치’에 대해 말한다. ‘일치’란 언어 사용자들이 (이후 형성될) 놀이의 대상에 관해 사용하는 개념상에서의 친화성, 더 정확히는 그들 간 교차하는 정의(定義)와 판단상에서의 친화성을 뜻한다. 그런데 이는 ‘규칙’의 조건인가? 아니면 파생물인가? “우리가 실제로 계산하듯이 (모두가 일치하면서 등등) 그렇게 계산하면서도, 여전히 매 단계마다 마치 마술의 안내를 받듯 규칙들의 안내를 받는다는 느낌이 들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일치한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말이다”24 그는 “이는 다만 우리가 일상적 삶에서 “규칙 따르기”라고 부르는 것의 모양새를 보여준다”25고 한다. 그런데 계산은 실천적이며 그 자체로 (그가 말하는) ‘삶의 형식’ 아닌가?
“‘수’라는 낱말을 분명하게 경계 지어진 개념을 지시하는 데 사용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개념의 범위가 어떤 경계에 의해 닫히지 않도록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놀이’라는 낱말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놀이의 개념은 어떻게 닫혀 있는가? 여전히 놀이로 간주되는 것은 무엇이며 더이상 놀이로 간주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그 경계들이 어디에 있는지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당신은 어떤 경계들을 그을 수는 있다. 아직은 아무런 경계도 그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당신이 ‘놀이’라는 낱말을 사용했을 때 당신을 괴롭혔던 문제는 전혀 아니다.) … 그것은 어디에서나 규칙에 의해 경계 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테니스에서 공을 얼마나 높이, 또는 얼마나 세게 쳐도 되는지에 관한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테니스는 여전히 하나의 놀이이며 규칙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놀이가 무엇인지를 어떻게 설명할까? 나는 우리가 그에게 놀이에 대해 기술하고서 이렇게 덧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을 ‘놀이’라고 부른다.””26
‘수’나 ‘테니스’의 예와 같은 원리로 작용하는 ‘유사한 것’이 ‘일치’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정의에 있어서의 일치뿐 아니라 (아주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판단에 있어서의 일치도 필요하다.”27 이로써 비로소 화자들은 어떠한 것으로서 규정된 ‘언어놀이’에 접속하는 것으로 되며, 개별적 ‘언어놀이’는 다른 상이한 개별적 ‘언어놀이’와 그 어떠한 유기적 연관도 이루지 않는 것으로 취급된다. 다만 직접적으로 감각될 여러 인상이 지시하는 유사성─‘일치’─에 의해 느슨하게 묶여지거나 또 흩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에서─본성상 총체적인 객관적 실재 및 전-포괄적인 지식으로 정향하는 언어, 그것의 계통적 건설은 자연스레 부정된다.
그의 학설에서 ‘삶의 형식’, ‘일치’, ‘가족 유사성’의 상호 연관은 극도로 모호하게 묘사되어 있다: ‘삶의 형식’은 ‘규칙’에 의해 생산되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며, 원초적인 것으로 신비화된 채 남아 있기도 하다. ‘일치’의 논리적 규준도 해명되어 있지 않다. 언어 조합의 일반법칙, 존재에 대한 언어 조합의 피규정성 그리고 언어의 진리 취득성에 관한 고찰의 동토(凍土)에서는 가령, ‘삶의 형식’이 ‘일치’를 보증하면서도, (비트겐슈타인의 학설대로) ‘놀이’가 실천적 양태로서 발현된다면 ‘가족 유사성’ 또한 삶에 스며들어가 ‘일치’를 보증한다. ‘일치’는 또한 ‘규칙’의 형태를 띠는가 하면, ‘가족 유사성’의 여부를 규정한다. 『탐구』에서 이 요소들의 논리적 순서와 발전 순환, 그리고 인식의 발전 법칙과의 그것들의 상호작용은 미지수로 처리된다.
나는 그가 과학에 적대적인 이데올로그라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언급된 그의 견해 우리에게 그것이 전제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준다: 먼저 ‘가족 유사성’이 타당한 것으로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식 밖에 존재하는 잡다가, ‘언어놀이’의 당사자가 서로의 관계를 통해 우연히 ‘일치’을 형성하기 전까지는 서로에 대해 그 어떠한 보편적인 특성을 공유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가족 유사성’은 이미 규정되어 있는 것으로서 즉자대자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의 보편적인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거나, 그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한 도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수다한 객체가 그 본질상 보편적인 것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은 과학적 연구에 의해 밝혀지고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원자력 발전에서 우라늄이 연료로 쓰일 수 있음을 알고 있으며, 원자력 발전이라는 목적에서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있을 경우 언제나 그것은 원자력 발전의 연료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심지어 U-235와 U-238 간 물리적-화학적 특성의 차이를 알고 있으며, 이 차이는 어떠한 조건을 충족한 어느 원자력 발전소에서나 동일하게 현상한다는 것도 안다.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러한 현상에 관한 이론적 내용, 이 현상에 대한 모든 개념적 취급을 ‘일치’로부터 나왔다고 할 수 있는가? 다른 예로, 전문의는 그가 전공한 것에 따라 그 종류가 천차만별이다. 각각의 전문의는 자신 전문 분야의 범위에 들어가 있는 환자를 진찰하고 필요할 경우 수술에 들어가기도 한다. 이때 진찰과 수술에 필요한 지식, 개념은 ‘일치’를 근거로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의학의 학적 대상의 실재적 필연성을 근거로 한 것인가? 신경외과와 정형외과는 서로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 연관성과 관련된 지식을 동원한 의료행위는 대부분 환자에 있어 일정 예측된 결과를 가져온다. 그렇다면 이는 신경, 척추 등에 대한 내재적인 필연성에 근거한 체계인가? 아니면 경계 지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자의적 ‘경계 짓기’로써 우연히 ‘유사한 것’을 획득하게 된 것에 근거하는 것인가?
그의 견해는 또한 특수한 명제에 대한 막연한 신비화에 매여있다. 이는 그가 확실성(Gewissheit)을 규정할 때에 자루 속 송곳처럼 삐져나온다. 그는 “의심하는 놀이 자체도 이미 확실성을 전제”28함을 뿌리로 회의주의를 공격한다. 회의주의는 “의심하는 놀이 자체”이고, ‘놀이’는 ‘확실성’을 요한다. “축-명제(hinge propositions)”란 이 ‘확실성’의 지반이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며, 회의의 시발점이지만, 진리치 판정에 귀속되지 않는다.(“어떤 명제들이 의심으로부터 제외되어 있으며 말하자면 그 물음들과 의심들의 운동 축이라는 점에 의거하고 있다.”29) 그러나 그는 어떠한 것이 “축-명제”인지, 그게 아니면 ‘규칙’에 당위를 부여하는 것인지를 분간할 기초를 마련하지 못했다. 두 항의 구별이 정립돼 있지 않다면, 그 종막은 필경 극단적일 것이며, “축-명제”가 분석에 대해 피정립적이지 않다는 그의 견해는 순전히 자의이다.
어떠한 한 ‘언어놀이’는 그의 타자로서 ‘언어놀이’와 총체성을 이룰 수 없는 성질─그 지역성(Lokalität)에 묶여 있다. 이 원리는 모든 “과학적 명제”에 일괄 도입된다. 즉, 여타의 명제는 이 ‘언어놀이’에 의해 근거 지어지는데, 그 ‘언어놀이’는 ‘삶의 형식’에 따른, 인간의 구상적인 공간을 가질 뿐이다. 그러한 귀결로서 비트겐슈타인은 예컨대 “지구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는 것이 참이 아니라고 가정”30했을 때, “만일 아무런 증거도 신뢰할 수 없다면─지금 이 앞에 있는 증거의 경우도 신뢰할 수가 없다면,─“아마도 우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31고 한다. 그는 또한 “예컨대 우리가 언제나 잘못 계산해 왔고 12×12는 144가 아니라면, 왜 우리가 그 어떤 다른 계산을 신뢰해야 할까? 그리고 그것은 물론 잘못 표현되어 있다”32고 하면서, “그러나 나는 또한 이 곱셈 공식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언젠가 나중에 나는 내가 지금 혼동하고 있었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오류를 범했다고 말하지 않을 것”33이라고 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명제는 단지 그가 일컫는 ‘실천적 사실’과는 다른, 낱말의 차원으로서 조합이며, 수다한 ‘언어놀이’의 ‘규칙’으로서, 단지 그의 타자로서의 ‘규칙’에 대해 부질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곱셈에 대한 어떠한 한 명제가 ‘언어놀이’의 ‘규칙’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는데, 누군가가 그 ‘규칙’을 어겼다면, 우리는 그가 단지 ‘규칙’에 대해 혼동했을지언정, 논리적 진리치에 대해 오류라고 할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 E. 알브레히트(Albrecht)가 비평한 그대로, “비트겐슈타인에게 단어의 의미는 객관적 실재에 대한 인지 과정에서의 그 기능에 의해 규정되는 게 아니라, 그 단어가 참여하는 언어놀이에 의해 규정된다. 학습자의 과제는 단지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뿐이다. 단어는 계산되고, 조작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저런 상(Bild)로 변형된다. 그러므로 의미에는 객관적인 내용이 부여되지 않는다.”34 ‘규칙’을 보증하는 ‘삶의 형식’이 대상적 진리가 아닌, 놀이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어떠한 ‘규약’ 속에서 규정된다면, 우리는 현 시대에서나, 역사적으로나 진리와 ‘규칙’ 사이에 존재하는 어마어마한 간극을 보게 될 것이다.
그에게 있어 언어는 대상 사물을 담는 그릇의 지위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으로 현존한다. 그때문에 언어 실천에서 구축되는 의미론적 시스템은 진리로 상승하는 도정의 그릇─의지적인 것, 지성적인 것의 대상적 진리에로의 역능, 역규정력으로서 고찰되지 않으며, 외려 이에 적대적이다. 명제 형태의 판단 및 추론문이 객관적 실재와 직접적으로 동일하지 않음을 이해함은 유별난 이성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 실천 및 그 사유 형식의 특수 규정은 활동적인 지성과 객관적 실재의 교량이다. 언어 실천의 특수 규정은 그 자체로 또다른 탐구 대상이고, 그에 고유한 구체적 연관 및 사물이다. 우리는 수많은 과학자들이 탐구의 시작점으로서 현상이 아닌, 언어적으로 이론적 시스템을 이루는 쟁론의 산물로서 현상까지 탐구의 영역에 옮기고 있음을 쉴 새 없이 목도한다. 이 경로에서 시작점으로서 현상의 전모가 차차 드러나기에 이른다. 비트겐슈타인이 “물!”, 저리 가!”, “아아!”, “도와줘!”, “멋진데!” 그리고 “안 돼!”35라는 “외침”을 명시하고 “당신은 아직도 이 낱말들을 “대상의 이름”이라고 부르고 싶은가?”20라고 되물으며, “[이것들]에는 어떤 것의 이름을 묻는 그런 일은 없었다”20고 했을 때 그는 문장 또는 발화의 언어적 특수 조합의 직접적 가상태만 응시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규정들은 오로지 어떠한 관계나 사물에 대한 대상화를 자기 계기로 지님으로써만 현존하며, 그게 없다면 있을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구두언어든 문자언어든) “저리 가!”는 발화자로부터 일정 간격 떨어진 장소를 포괄하는 어떠한 공간에서 움직일 수 있는 타자, 발화자의 입장에서 타자가 위치를 옮겨야만 하는 이유의 물적 조건 및 정신적인 상태, 그리고 그것들의 특수한 관계를 대상화함으로써만 발현될 수 있는 언어적 실천이다. 비록 외양상 동일한 그 낱말과 문장 조합이 피규정자의 수용-반응에서 각이한 사태를 불러오더라도 이 차이성은 동일한 자연력(自然力)에 기초한 상이 없이는 추리될 수 없다. 우리는 이를 심리언어학적 메커니즘으로 재현할 수 있다. 이는 문장의 쓰임 및 발화의 언어적 특수 조합과 재현되는 메커니즘 사이의 연속성을 증명한다.
그는 또한 ‘둘’이라는 수(數)의 “지칭적 정의”가 난점에 봉착하는 사례─어떠한 것을 지칭하여 “저것이 ‘둘’이다”라고 할 때 그 ‘어떤 것’에서의 지칭체일 ‘둘’의 속성이 지시되는 게 아닌, 그 “두 개의 사물 전체”가 ‘둘’과 동격으로 오해되는─를 들며 “지칭적 정의는 어떤 경우든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38고 한다. 그에 의하면 ‘둘’이 일반적으로 지칭되는 것은 “주어진 상황”과 그 “정의를 제공하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다르다.39 물론 이해의 속도와 정도에서 두 요소의 규정력은 존재하나, 정수(精髓)는 개별자로 지칭되는 것에서 ‘둘’의 원형적 쌍을 지성적으로 추상해 냄에 있다. ‘둘’이라는 낱말의 일반적 지칭체는 이 낱말의 필수 조건이며, 그것은 ‘상황’에 의해서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상황’에 대해 독립적이다. 두 개의 동일한 사물에서 ‘둘’은 객관적으로 하나의 일자존재로서 어떠한 것이 그와 같은 또 하나의 일자존재와 쌍을 이루었을 때 실존하는 관계들이자 그것의 원인이다. 그것은 또한 객관적으로 그 물의 양에 대한 동일량의 복제에 상응한다. 예컨대, 생물체가 복제하여 동일 질의 DNA C-value가 하나 더 만들어졌을 때 두 질적 규정성의 관계는 ‘둘’을 필연적으로 내포한다. 이러한 ‘둘’의 양태는 그 자체만으로도 고유의 질적 규정력─질량 변화, 온도에 대한 자기 보존성, 식생 등─을 가져오고, 이 질적 규정력의 원인 테이블은 ‘하나’와 ‘둘’의 차이를 해명해 준다. 즉, ‘둘’이라는 낱말은 ‘놀이’에 따른, 실용주의적으로 규정되는 산물이 아니라, 물과 물 사이의 이 객관적인 관계들과 원인의 그리고 그 효력의 결합에 상응하는 객관적 실재이다. 낱말로서 ‘둘’은 이 ‘둘’의 언어적 반영이며, 그것은 자연사적 인과율로 끈끈하게 연계되어 있다. ‘둘’의 낱말을 이해시킬 수 있는 언어적인 인적 관계 및 구문론·문법적 구조의 잡다도 이 인과율의 가능성 영역 궤도 안에서만 운동한다. ‘둘’이라는 낱말의 사전적 정의는 단지 이 결합의 추상적 보편화이다. 일반적으로 낱말은 그 구체적 이해에서 사전적 정의의 학습을 요한다기보다는, 그 (객관적) 결합의 과학적 재현 수준에서의 신체적이고 지성적인 활동을 요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 학설에서 내적인 것─정신현상, 지성 원리, 마음의 작용─과 언어의 연속성에 관한 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적인 것이 언어(및 그 실천과 이해력)와 내밀한 상보성을 띰은 좌뇌 전전두피질(PFC)에서 브로카 영역 및 좌뇌 측두엽에서 베르니케 영역의 발견, fMRI로 관찰된 뇌 신경세포의 활성화 패턴과 언어(언어센터)의 상호작용 등 현대과학의 성과가 증명하는 바이므로 언어 연구자는 여러 실증적이고 도구적인 매개로써 내적인 것의 구체를 획득해야 할 것이다. 정신 연구에서는 또한 정신이 자연사적 과정(naturgeschichtlichen Prozeß)의 속성으로서 취급되므로, 이를 종합할 때 〈자연사적 과정-내적인 것-언어〉의 변증법적-발생학적 삼중성은 언어 연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나는 방금 ‘생물학’, ‘경제학’, ‘사회학’ 간의 ‘공통적인 것’을 〈그것이 다루는 대상이 생명체와 관련된 활동과 연관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물론 추상적인 보편성에 불과하다.40 실제로 그것은 어떠한 규정된 상태로서의 보편적인 것, 즉 특수한 것으로서 존재한다. 예를 들어 ‘경제학’에서의 이 보편성은 인간의 생산과 소비와 관련된 제반 활동, 생산적 요인과 관계하는 모든 역사적 방식이라는 규정성을 부착한, 규정된 것으로서의 〈그것이 다루는 대상이 생명체와 관련된 활동과 연관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경제학의 규정성은 생산과 소비와 관련된 제반 활동, 그리고 생산적 요인과 관계하는 모든 역사적 방식 하에서 생명체와 관련된 활동과 연관을 이루고 있는 개별적 규정성이다. 여기서 경제학이라는 개별적 규정성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통일을 통해 비로소 개별적인 것으로 되었는데, 특수성은 개별성 속에서 보편성과 불가분의 연관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특수한 것은 필연적으로 그보다 추상적인 것으로서의 보편성이 존재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로써 그 대상의 ‘공통성’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보편과 특수의 통일로서 개별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개별로 전개하는 것으로서의 보편적인 것, 즉 구체적인 보편자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비트겐슈타인도 역시 동일하게 자신이 설명하는 대상에 대해 표명하는 것 아닌가? 그가 말하는 ‘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말한 ‘일치’를 지닌 개체 간 관계의 한 측면이다. 그렇다면 모든 ‘언어놀이’는 〈‘일치’를 지닌 개체 간 관계의 한 측면〉이라는 추상적 보편성을 지니는 셈이다. 물론 그것은 한 측면이 아니라 전부일 수도 있지만, 전부라고 하더라도 결과는 같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의 추종자들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직은 아무런 경계도 그어져 있지 않은 것이지만 동시에 나는 그것에 대해 어떤 경계들을 그을 수는 있다.” 하지만 나는 다음과 같이 곧바로 나의 의견을 지양할 수 있다: “‘놀이’는 아직은 아무런 경계도 그어져 있지 않은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어떤 경계로 그어질 수 있음을 계기를 지닌 것으로서의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일치’를 지닌 개체 간 관계의 한 측면 또는 전부〉이다.” 사실 여기까지 나갈 필요도 없다. 이미 『탐구』 제23절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놀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어 (2)를 실제로 사용할 때 한쪽은 낱말을 외치고 다른 쪽은 그에 따라 행위한다. 하지만 이 언어를 가르칠 때는 다음과 같은 과장이 일어날 것이다: 학습자는 대상의 이름을 말한다. 즉 선생이 석재를 가리킬 때 학습자는 그에 해당하는 낱말을 말한다. … 나는 이러한 놀이들을 ‘언어놀이’라고 부를 것이며, 때로는 원초적 언어(primitiven Sprache)를 언어놀이라고 말할 것이다. … 나는 또한 언어와 그 언어가 얽혀 있는 활동들로 구성된 전체도 ‘언어놀이’라고 부를 것이다.”41
(2)는 제2절에서 말하고자 하였던 바를 의미한다:
“의미라는 저 철학적 개념은 언어가 기능하는 방식에 대한 원초적 관념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언어보다 더 원초적인 언어의 관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기술(記述)에 들어맞는 하나의 언어를 상상해보자: 이 언어는 건축 기사 A와 조수 B 사이의 의사소통에 사용된다. A는 벽돌, 기둥, 석판, 들보 등 건축 석재들로 집을 짓고 있다. B는 A에게 필요한 순서대로 건축 석재를 건네야 한다. 그들은 이 목적을 위해 ‘벽돌’, ‘기둥’, ‘석판’, ‘들보’라는 낱말로 구성된 언어를 사용한다. A가 낱말들을 외치면, B는 이러이러한 외침을 들을 때 가져오라고 지시받은 석재를 날라온다.─이것을 하나의 완전한 원초적 언어라고 이해하라.”42
여기서 말하는 ‘완전한 원초적 언어’는 앞서 언급된 것─‘놀이’는 아직은 아무런 경계도 그어져 있지 않은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어떤 경계로 그어질 수 있음을 계기를 지닌 것으로서의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일치’를 지닌 개체 간 관계의 한 측면 또는 전부〉─과 다른 것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 역시 여지없이 ‘언어놀이’에 대한 술어로서의 추상적 보편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말대꾸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초연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는 애당초 철학 체계를 형성함에서 그것이 과학과 긴밀한 연관성 갖는 것으로 서술하는 모든 시도를 적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탐구』에서 그것이 과학의 성과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야 함을 수많은 실없는 예시를 동원하며 쉴 새 없이 강조한다. 우리는 적어도 그의 철학 체계 전개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그가 인간 인식의 문제를 다룸에서 한갓 소여된 것만을 다룰 수 있다는 견해43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언어놀이’의 ‘규칙’에 대한 준수가 어떻게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리는지를 결정”44하냐는 질문에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리는가 하는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일치하는 것은 그들의 언어 속에서다. 이것은 의견에서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이다.”20
여기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란 ‘언어놀이’의 ‘규칙’을 준수하는 참여자의 언어적 활동을 뜻한다. 즉, 옳고 그른 것은 이러한 언어적 활동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식에서 옳고 그른 것, 언어적 활동의 전개에서 그것─언어적 활동을 구성하는 모든 의미론적, 통사론적 요소들─의 내적 일관성을 보증하는 것은, 그것이 언어적 활동과 결부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단순히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동격으로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무엇에 대해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기준은 이미 우리의 의식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 구체적인 것을 한쪽의 척도, 그러나 동시에 본질적인 척도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위로 가다”, “위가 허술하다”, “위를 책임지다”는 서로 뜻이 다르고 표현도 다른데 이는 어떠한 구체적인 조건 속에서만 성립되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규정된 표현도, 그리고 그것의 규정된 의미도 어떠한 규정된 것으로서의 구체적인 조건을 자신의 산실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적 연관의 일측면으로서 ‘위’라는 규정은 그 연관 속에서 규정된 한계를 지니면서 자신의 대립항과 관계하기에 ‘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한계는 여러 요인에 의해 규정된다. 예를 들어, 지도를 펴놓고 우리는 북쪽을 위라고, 남쪽을 아래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때의 ‘위’는 지도라는 평면상에서 북쪽(주로 12시 방향)을 가리키며, 이 평면상에서 북쪽이 곧 ‘위’를 뜻하는 사태도 역시 규정된 시간적 계기들─나침반의 바늘 위치, 나침반으로써 방향을 확인함에서 바늘 위치 선정의 중요성, 항해에서 북극성 관찰의 지니는 중요성, 북극성 관찰로써 항해하던 북반구 문명이 일반적으로 남반구 문명보다 생산력이 빠르게 발전하였다는 점 등─에 의해 성립된 사태라는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이제 남쪽이 ‘위’이고 북쪽이 ‘아래’인 경우는 어떠한가? 북반구에서는 남쪽으로 갈수록 온도가 높아지고, 북쪽의 경우는 그 반대이다. 높음은 ‘위’라는 의미와 유사성을 지닌다. 남쪽을 ‘위’라고 가리킨다면 그것을 ‘위’라고 규정할 만한 객관적 작용력이 분명히 존재한다.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왜 ‘높음’이 ‘위’와 유사한 뜻으로 쓰이게 되었는지, 언어사적인 궤적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의 과정으로 인해, 어떠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는 각자 표현이 다르더라도 서로 의미는 같을 수 있다. 낱말, 문장, 문법 구사의 다양한 양태의 본질을 고찰함에서 ‘언어놀이’라는 ‘구상’ 따위는 불필요하다. ‘언어놀이’를 위시로 하는 인식론적 상대주의의 반과학성─이는 인간 활동을 둘러싸며 또 그 활동 자체를 합법칙적으로 근거하는 지반에의 지적 구명의 기초를 상실케한다는 데에 있다. 물리학자 A. D. 소칼(Sokal)은 이러한 유형의 주관주의에 대한 본질을 옳게 비평하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모든 것이 수사(修辭)와 ‘언어놀이’라면 내적-논리적 일관성 또한 불필요하다. … 이해 불가능성은 미덕이 되고, 암시, 은유, 말장난이 증거와 논리를 대체한다.”46
객관적이고도 구체적인 조건은 어떠한 자의와 연관을 이룰 수는 있더라도 그러한 연관이 언어 활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면 필시 그것은 이미 구체적인 조건으로 된 것일 수밖에 없다. 옳고 그른 것을 단순히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동일시한다면 그것은 아베나리우스의 원리적 동격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된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이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탐구』의 제2부라고도 불리는 「심리철학 – 단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만일 개념 형성이 자연의 사실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면, 우리는 문법보다는 자연에서 그것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개념들 사이의 대응, 그리고 자연의 일반적 사실들(그 일반성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하는 사실들) 사이의 대응은 물론 우리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이 이제 개념 형성에 관한 이런 가능한 원인들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연과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사(自然史)를 하는 것도 아니다.─왜냐하면 우리는 실로 우리의 목적들47을 위해 자연사적인 것을 지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만일 누군가 어떤 개념들이 완전히 올바른 개념들이라고 믿고, 그와 다른 개념들을 갖는 것은 마치 우리가 이해하는 어떤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믿는다면─나는 매우 일반적인 어떤 자연의 사실들이 우리에게 익숙한 것과는 다르다고 상상해보라고 그에게 권하고 싶다.”48
철학은 인류사에서 언어사적인 개별적 맥락을 과학적(자연사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분야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 언어 활동의 배후를 연구할 수단을 찾는 데 필요한 논리적 구조물을 제공할 수 있다. 바로 이 영역 속에서 각이한 세계상의 내적인 정합성을 가늠할 토대가 생기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난잡한 ‘기술’을 그가 사실상 제반 과학을 ‘언어놀이’의 일종으로 끌어내린 것과 연계해서 총괄하였을 때 다음과 같은 결론만이 도출될 뿐이다: α. 과학의 ‘언어놀이’는 ‘사실’에 대한 ‘언어놀이’이다; β. 여기서 말하는 ‘사실’은 ‘언어놀이’의 전제인 ‘일치’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서의 ‘사실’이고 ‘일치’는 소여된 감각 요소이다; γ. 이러한 ‘일치’로 구성된 ‘사실’, 즉 ‘언어놀이’의 전제적 제반 내용〔=이는 또한 ‘규칙’의 산물이기도 하다!〕은 우리가 맞닥뜨리는 그 ‘사실들’이다; δ. 이 ‘사실들’은 “어떤 개념의 의의(意義)”49를 뒷받침하는 “극히 일반적인 자연의 사실들(außerordentlich allgemeine Naturtatsachen)”20을 이루거나 그 자체이다. 언어, 논리, 인식에 관한 이러한 세계상을 집요(輯要)하기 위한 가장 좋은 문구로서 나는 그의 저작에 쓰인 이 한 글귀를 꾸어 올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유아론자라고 부르는, 그리고 오직 자기 자신의 경험들만이 실재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로써 그 어떤 실천적 사실 문제에 관해서도 우리와 불일치하지 않는다.”51 『청색 책』에서 그는 순전히 〈소여된 감각계의 직접성-즉-‘사실’〉이라는 고 버클리 주교의 오래된 교조(그리고 『논리철학논고』에서 더 명료히 표현된) 하에서, 유아론자에 유아론자로서 투쟁했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매우 일반적인 어떤 자연의 사실들”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기술’은 주관적 관념론자 마흐에 대한 레닌의 비평이 폭로한 바, 즉 〈쓸데없는 공연한 일이라고 선언한 바로 그 "핵심과 핵심 간 상호작용"의 ‘가정’〉52을 재탕한 것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모순은 언제나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존재하지만 동시에 그 모순은 해소된다. 모순의 해소는 현존재의 특수 단면에 대한 객관과 주관의 일치를 보증한다. 여기서 다시 모순이 발생하는데, 즉 우리는 새로운 단면(대상적 진리에 더 가까워진 시스템)의 객관적 모순과 이를 반영한 사유 모순에 직면한다. 그리고 발생한 모순은 다시 해소된다.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형식주의의 모순을 직감하였으며, 낱말과 문장이 단순한 기호의 집합이 아니라 (지성 원리에의 통찰 없이, 아주 즉물적이고 경험적인 수준에서지만) 모순적으로 교호 작용하는 특수한 〈인간의 ‘살아있는’ 실천〉의 관계 규정들, 복합적 진행체(進行體)라는 것까지 이해하였다. 하지만, 그 모순을 거쳐 실재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즉 그 모순이 사실적인 반영의 필연적 계기로 된다는 것까지 파악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 말로로서 그는 모순의 지양, 긍정적 통일이 아닌 방치를 새로이 ‘요청’(≒‘치유로서의 철학’)했다.
『탐구』 번역가이자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대가인 이승종 교수는 이 문헌의 해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의 『철학적 탐구』는 “진보란 대체로 그 실제보다 훨씬 위대해 보이는 법이다”라는 네스트로이의 경구를 책의 첫머리로 삼음으로써 이 작품이 반시대적 고찰임을 아주 선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사람들이 진보를 목격하고 칭송했던 과학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인간 정신의 퇴보를 목격했고 실망했다. 그렇다면 과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절망, 거기서 그가 강렬하게 느낀 가공할 퇴보의 실체는 무엇인가? 과학이 조장하는 진보에 대한 신앙은 일상인들의 생활세계와 경험과 언어를 위협한다. 집합론의 옹호자들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뒤흔들고,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옹호자들은 각각 시공간과 인식에 대한 우리의 상식이 크게 잘못된 것처럼 꾸짖는다. 과학은 이처럼 생활세계와 거기에 뿌리내린 일상적 경험을 부정하고 그 위에 새로운 권위로서 군림하려 한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그로부터 어떠한 정신적 가치나 의미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유물론자(혹은 물리주의)의 도그마와 그것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허무주의(니힐리즘)의 창궐을 보았다. 경배의 대상이었던 신이 그 존재를 증명받아야 할 수상스러운 가정(假定)으로 변모하고, 윤리적 언명이 ‘자연주의적 오류’로 지적되는 것도 이러한 경향과 궤를 같이한다.”53
우리는 이러한 내용의 해제를 통해서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전모를 더더욱 낱낱이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통념에 대한 무반성적 수용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에서 통념은 예컨대 “지구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존재해 왔는지”54에 관한 “정상적인” 답변, 즉 “지구는 내가 태어난 이후에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랫동안,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고 대답”20하는 것이 ‘규칙’의 당위를 어디서 끌어올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나는 나에게 선조들이 있으며, 또 모든 사람에게 각각 선조들이 있다고 믿는다. 나는 여러 도시들이 있음을, 요컨대 지리학과 역사학의 주요 사실들을 믿는다. 나는 지구가 하나의 물체이며, 그 표면 위에서 우리가 움직인다는 것, 그리고 지구가 이 책상, 이 집, 이 나무 등 그 어떤 다른 고체들과 마찬가지로, 갑자기 사라져 버리거나 하는 그와 같은 일은 하지 않음을 믿는다.”56 그러나 질문이 보다 구체적이고 이론적인 지성을 요한다면, 그래서 직관적-경험적 ‘믿음’으로써 그 당위가 부여될 수 없다면, 또는 그 ‘믿음’의 준거가 조직적인 왜곡 속에서 굳어진 게 아니라는 안전벨트가 없다면 어쩔 텐가? 역사적으로 통념은 매우 빈번하게, 아니 일반적으로 조금의 의구심도 품을 수 없는 ‘삶의 형식’의 가상을 띠며 힘을 얻었다. 이 해제가 극단적인 주관적 관념론자이자 파시즘의 맹아인 니체와 독일의 파시스트 이데올로기 관료였던 하이데거를 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데, 비트겐슈타인의 반합리주의는 그 내용이 반동적인 실존주의와 매우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던 일상언어학파의 일원들은 반동적인 실존주의자들(종교적 ‘통념’을 ‘존재의 본질’가 “존재 사태(Ereignis) 속에서 순간적으로 출현”한 것으로 간주하여 그것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던, 『철학에의 기여(Beiträge zur Philosophie, 1936-8)』에서 하이데거의 견해를 상기하자!)과 서로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었다. “비트겐슈타인 철학은─그로부터 출현한 모든 신실증주의와 마찬가지로─20세기 부르주아적 위기 의식의 발현이다. 자본주의의 전반적인 위기에 대한 지적 반영으로서의 이러한 부르주아적 위기 의식은 부르주아 철학자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은폐되거나 체념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부르주아 철학자 헤르만 바인(Hermann Wein)은 비트겐슈타인을 니체에 비유하기도 하며, 그를 우리가 처한 대세 순응 시대(konformistischen Zeitalters)의 가장 훌륭한 아웃사이더에 속하는 철학자, 니체 이후의 가장 순수하고 비극적인 철학자라고 부르기도 했다.”57
통념은 지배적인 경제적 관계를 반영한다. 오늘날 그것은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를 반영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생산력의 발전을 계기로 이제 대상에 대한 가상적 인식에 정체되어 있는 것이며, 과학성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만이 보증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오늘날 부르주아의 사고는 극단적으로 반동화─반과학과 반합리주의─되어있다.
통념이 인류사회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왔는가를 안다면 결코 그것을 과학의 위에 두거나, 또는 과학과 동급으로 놓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역사적인 한 사례를 놓고 생각해 보자: 미생물학이 발달하여 미생물과 질병이 직접적인 연관을 이룬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지기 전인 18세기 이전에는 질병에 관한 온갖 ‘통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러한 통념은 질병 예방에 도움이 되었기는커녕 오히려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오늘날에도 통념은 일반적으로 사회를 좀먹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것은 대개 구습이며, 사회경제적 조건의 근본변혁으로써 사회가 더욱 합리적으로 재구성된다면 대부분 어느새 사라져버릴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는 어디까지나 부르주아 이데올로그가 혐오에 마지않는 ‘유물론’의 언어이다. 그들이 말하는 ‘유물론’의 본질은 통념의 유지와 과학의 진보 사이에서 후자를 ‘무비판적’으로 ‘찬양’한다는 것에 있다. 그렇다─프롤레타리아 당파는 과학의 진보를 ‘무비판적’으로 ‘찬양’한다. 반대로 부르주아 당파는 통념의 유지를 ‘무비판적’으로 택하고 그것을 ‘찬양’한다. 생산력이 진보하는 것만큼, 과학이 진보하는 것만큼 통념은 그 지배적 지위를 순탄히 유지할 수 없다.
또다른 부르주아 철학자인 엄정식은 비트겐슈타인 철학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첫째,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은 철저하게 비(非)과학주의적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철학은 경험과학의 일종이 아니므로 세계에 관한 이론적 체계이어서는 안 된다. 둘째, 바로 그렇기에 철학은 과학처럼, 혹은 전통적인 철학관과 달리 현상에 대해서 소극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언어의 오해에서 야기된 철학적 문제들을 해소하는 일이다. 셋째, 철학적 문제의 해소는 질병의 치유라는 성격을 지닌다. 즉, 영원한 진리를 발견하거나 세계를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원인을 규명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전통적인 서양철학의 부정을 의미하며 동시에 이론적 체계로서의 철학이 불가능함을 역설하는 것이다.”58
“영원한 진리를 발견하거나 세계를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염두에 두던 의미에서) “질병의 치유”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철저하게 비과학주의적”이다. 무엇에 대한 원인을 규명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이론적 체계”도 아니고, 과학과는 관련도 없는 “비과학주의적”인 것이다. 여기서도 〈쓸데없는 공연한 일이라고 선언한 바로 그 "핵심과 핵심 간 상호작용"의 ‘가정’〉이 반복된다. 부르주아 학자들은 어떠한 것의 기계적, 화학적, 목적적 연관을 조금이라도 규명하려는 즉시 그것이 과학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음을 계속 망각하고 있다. 당연히 단순히 이 연관 방식과 관련된 ‘원인’을 규명한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 그것을 과학이라고 규정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오늘날 “‘무엇’에 대한 원인을 규명”한다면서 공공연하게 비과학을 설파하는 부르주아 학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학문을 대하는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태도는 과학을 자칭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일반적인 태도와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2024년 12월 13일
-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 분석철학자는 아직도 이 이중 언어 체계에 의존하고 있다.
- 그의 전기 철학에 대한 비판은 H. Horstmann, „Lebensphilosophisches Denken im Positivismus“,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33 (5), 1985: 436 ff.를 참조하라.
- L. J. J. Wittgenstein, 『철학적 탐구』, 이승종 역, 파주: 아카넷, 2016, 제105절.
- E. Albrecht, „Zur Kritik der Auffassungen Ludwig Wittgensteins über das Verhältnis von Sprache, Logik und Erkenntnistheorie“,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16 (7), 1968: 824.
- Ibid.
- Ibid.
- Ibid., 827.
- E. V. Il'enkov,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 우기동 & 이병수 역, 서울: 연구사, 1990, 12-3.
- 『철학적 탐구』, 2016, 제89절.
- 같은 책, 제109절.
- 같은 책, 제133절.
- 같은 책, 제23절.
- ‘삶의 형식’은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개념으로 거론되기는 하지만, 이 개념은 그의 저서에서 자주 쓰이지 않았을뿐더러, 제대로된 개념 정의를 끌어낼 만한 내용 또한 그의 저서에서 보이지 않는다.
- 같은 책, 제130-1절.
- 같은 책, 제66절.
- 이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예는 다음과 같다: “가령 다양한 연관성을 지닌 보드게임을 보라. 이제 카드 게임으로 넘어가라. 여기서 당신은 첫 번째 부류에 해당하는 많은 것들을 발견하지만, 다수의 공통된 특징들은 사라지고 다른 특질들이 나타난다. 다음으로 구기 게임으로 넘어가면 많은 공통점은 그대로 있지만 또 많은 것이 사라진다.” (같은 책.)
- L. J. J. Wittgenstein, 『청색 책·갈색 책』, 이영철 역, 서울: 책세상, 2006, 42.
- G. Stiehler, „Die Anwendung der Marxschen Dialektik beim Aufbau des Kategoriensystems des historischen Materialismus“,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32 (11), 1984: 974.
- 『철학적 탐구』, 2015, 제79절.
- 같은 책.
- 같은 책.
- 같은 책, 제83-6절.
-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 1990, 267.
- 『철학적 탐구』, 2016, 제234절.
- 같은 책, 제235절.
- 같은 책, 제68-9절.
- 같은 책, 제242절.
- L. J. J. Wittgenstein, 『확실성에 관하여』, 이영철 역, 서울: 책세상, 2006, 제115절.
- 같은 책, 제341절.
- 같은 책, 제301절.
- 같은 책, 제302절.
- 같은 책, 제303절.
- 같은 책, 제304절.
- „Zur Kritik der Auffassungen Ludwig Wittgensteins über das Verhältnis von Sprache, Logik und Erkenntnistheorie“, 1968: 826.
- 『철학적 탐구』, 2016, 제27절.
- 같은 책.
- 같은 책.
- 같은 책, 제28절.
- 같은 책, 제29절.
- 물론 이 세 가지 학문이 〈모든 ‘놀이’〉인 것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의도 속에서 ‘놀이’는 오만 가지 특수 형태를 띨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까지 포괄하는 추상적 보편성을 우리는 인식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그것 모두가 〈‘일치’를 지닌 개체 간 관계의 한 측면〉이라는 것이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탐구』 제66절에서 든 예시에 등장하는 ‘공통성’과 본질적으로 하등 다르지 않다.)
- 같은 책, 제7절.
- 같은 책, 제2절.
- 그는 인식의 자연사적인 과정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애당초 그것은 그가 상정한 철학적 주제와 절대적으로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소여된 감각, 즉 감각 인상을 매우 자주 언급한다. 이에 대해서는 『철학적 탐구』 제354절, 제355절, 제486절, 그리고 「심리철학 - 단편」의 제59절, 제269절을 참고하라.
- 같은 책, 제241절.
- 같은 책.
- A. D. Sokal, “A Physicist Experiments With Cultural Studies”, NYU, Jun 5, 1996.
- G. E. M. 앤스컴(Anscombe), H. 나이만(Nyman)과 G. H. 폰 리히트(Wright)가 『심리철학적 소견들(Bemerkungen uber die Philosophie der Psychologie)』이라는 제목으로 엮은 타자 원고 TSS 229 판본에는 이 ‘목적들’에 관한 그의 주관주의적 견해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우리는 자연과학을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의 목표는 어떤 현상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또 우리의 목표는 개념의 형성 과정에 대한 자연사를 쓰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사적 사실들을 언급할 때, 우리가 그것들을 고안해내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L. J. J. Wittgenstein, 『심리철학적 소견들』, 제1권, 이기흥 역, 서울: 아카넷, 2013, 제46절.) 그러나 『철학적 탐구』에서 ‘언어놀이’도 (비록 조잡하나) 명백히 어떠한 현상으로서 고찰되고 있으며, 그는 법칙적 진술로써 그것을 언어 실천의 일반적 양태화하고 있다. 즉, ‘언어놀이’에 대한 그의 견해는 언어의 문법적 속성이 어떠한 원인에 의해 규정됨을 함유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가 인식했든, 하지 않았든, 그 ‘참된’ 의도와 무관하게) 현상 기술적- 및 예측적 요소를 가진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그의 견해에 학문적 당위를 결코 부여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언어 쓰임의 기술적 내용은 언어 이해력, 구사 능력 등과 상호작용하며, 그것은 뇌 신경학 및 기타 사회과학의 객관적 규정력에 의해 정립된다. 그러므로 자연사적 사실과 언어 쓰임의 기술적 내용을 절대적으로 대립시키는 것은 자의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철학적 탐구』, 2016, xii, 제365-6절.
- 같은 책, 제142절.
- 같은 책.
- 『청색 책·갈색 책』, 2006, 106.
-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상)』, 1992, 72.
- 『철학적 탐구』, 2016, 693-4.
- 『확실성에 관하여』, 2006, 제233절.
- 같은 책.
- 같은 책, 제234절.
- „Zur Kritik der Auffassungen Ludwig Wittgensteins über das Verhältnis von Sprache, Logik und Erkenntnistheorie“, 1968: 829.
- 엄정식, 『비트겐슈타인의 사상: 의미와 가치』, 서울: 서강대학교 출판부, 2003,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