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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민주 철학의 비평 원칙: 도입


민중민주 철학의 비평 원칙


한동백 | 집행위원

    도입
    1. 철학-과학-세계관
    2. 총명한 유물론
    3. 본질을 드러내는 내재적 비판, 그리고 변증법
    4. 진보의 문제
    5. 역사주의 원리
    6. 객관적인 것으로서 사회적 실재의 양식
    7. 마음과 언어
    8. 민중민주 당파 도덕


도입


 

민주주의가 세계적 규모에서, 전방위적으로 공격받는 현시대 아래에서 진보의 지향은 더 많은, 그리고 더 깊은 난관에 봉착해 있다. 그것은 오랜 시간 민중·민족적 민주주의 진영이 투쟁의 성과로써 쌓아 온, 우리가 당연시 민주주의적 경향 후퇴의 α. 세계관적 계기 β. 현실적 결과 속에서 점점 구체화하고 있다 세계관적 계기 현실적 결과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각계에서 일반민주주의 쟁취 과업을 축적하고 또 그 성과를 수호하고자 한다면, 이 흐름에 정치적 당위를 부여할 수 있는 사상 투쟁은 필수이다. 이 투쟁은 마주한 개별 현실을 감각되는 〈그대로〉가 아니라 현실 전체에 걸쳐 작용하는 최고 심급인 보편과 매개된 사유 내용에 근거하여 전유해야지만 진보의 지향에 조응하는 형태로 이끌어갈 수 있다. 그러나 현시대에서는 이 진보적 정신총체적 사유의 현실적 계기라고 할 대상의 범위가 질적·양적 수준에서 크게 확장하였다. 그것의 본질은 이 사유가 단지 (외적 실재로서) 억압의 현장이 아니라 〈억압의 정신적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 정립을 해야 하는 때가 사회주의 진영의 세계사적 후퇴촉발하였던 그 과거에 비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빈번해졌다는 데에 있다. 즉, 약 30년 전보다 억압의 사념(邪念)1​이 전 영역에 걸쳐 있으며, 또 그 외양상(그러므로 종국적으로는 거짓된) ‘학문적 깊이’가, 그것의 ‘세련됨’철학적 가림막이 더하는 그것, 즉 다수 근로대중이 자신의 이익을 최상의 조건에서 찾을 수 없도록 강제력을 가하는 기만성이 고도화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진보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에서 그 국면마다 형형색색인 이 가림막을 둘러싼 의식 형태는 현존하는 사회경제적 조건이 근본적으로 지양되지 않은 만큼이나 항상 동일한 본질을 가진다. 현시대 무수한 상이성 일반으로 서 있는 이 ‘철학적’ 사념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현실적 표현이다이 지배 이데올로기의 보편적 논리·윤리학적 특성은 현존하는 사회형태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사유 형태에 합치하며, 또 이 영원성에 저항하는 모든 사유 형태에 타격을 가하는 데 합치한다. 예컨대 이 사념은 특수한 논리·윤리학적 사유 매개를 거쳐, 자본주의에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인 극단적인 빈익빈 부익부에 현실적 당위를 부여하는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다. 심지어 최근래까지도 이러한 현실조차 감추는 데 그 무엇보다 ‘탁월’할 경제조사방법의 방법론에서 핵심 부품이 될 현대 신실증주의 아류의 갖가지 철학적 도구가 외양만 바꾸며 성행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러한 현실을 근본적으로 지양하는 데서 필수적인 논리 사유적 계기에 수반할 사회적 존재론·변증법·논리학·심리-철학적2​ 중간물과 이에 대한 고구(考究)는 이 사념에서 “형이상학적인 것”, “종잡을 수 없는 것”, “낡은 것”으로 규정되어 배격된다. 즉, 이들은 민중민주 당파의 정치-정신적 지도의 토양을 제거함으로써 역사 진보를 가로막고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전 과정에서 정립된 지배 이데올로기는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본질적 관계의 부분들을 자기 내에 그대로 보유하며 작동 여부는 그에 전적으로 종속된다: 1. 과학과 철학의 ‘상호 영역 존중’으로 선언되는 두 항의 절대 분리; 2. 세계의 물질적 통일성, 물질의 관념에 대한 존재론적 선차성을 거부한 채, 물질과 관념에 대한 제3항 또는 상호 ‘무경계’의 제출; 3. 모든 사물의 절대적 부정성에의 거부, 즉 (無)모순의 학문 정립이라는 미몽에의 강박적 의존; 4. 진보·상승·발전의 객관적 실재성의 부정; 5. 탐구대상의 구체성을 취함에서 그것의 역사성을 취함이 보편적 조건임을, 법칙 작용이 언제나 상대적 목적 규정과 통일되어 있음을 거부; 6. 사회의 자연에로의 또는 자연의 사회에로의 단순하고 환원적인 용해; 7. 객관적 총체성-언어-마음(주관적 총체성)의 연쇄적 작용반작용의 진리성을 부인함으로써 세계 인식의 불가지성 정당화; 8. 원자화된 개인의 추상성에 상응하는, 극도로 단순화한 논변으로 윤리학을 수립함으로써 피지배계급의 당파적 도덕 테제가 전 포괄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확정’하고 이로써 그것이 매 국면에서 정치적 규정력을 확립할 여지를 차단·봉쇄속류 철학가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 모든 특질은 현시대 민중의 유일한 세계관적 구축물인 마르크스 학설에 전적으로 적대적이다.

 

자본주의의 독점 단계가 전 세계적으로 재편된 이래 철학의 무용성은 바로 저 본질적 관계들의 구체 분화로 인해 심화하였는데, 이는 철학이 계속되는 과학 발전과 정치적 실천에 매개되지 않은 채 폐쇄적인 자립성에 가두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서 철학의 쓸모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수많은 지식상(知識商)이 “우리는 인문학 멸망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하며, 시대를 한탄하고 있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 이는 철학에 관한 실제 군중의 동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본질적 계기는 생활의 전 영역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의 자립체인 상품교환관계 및 그것의 자본주의적 화폐 증식을 매개로 한 발전과 공고화가 개개인의 인격적 관계까지 추상으로 정립함에 있다. 철학은 이러한 추상적으로 실재적인 인격적 관계 연장의 의지적 반영이다. 그러나 한편 이는 자본주의의 보편적인 사회경제적 작동 원리를 규정하면서 지식 소비재 생산 단계에서 철학의 속류화에 더 구체 분화된 규정성을 더한다. 위기는 계속 개별화되는 자본주의 모순 속에서 더 풍부해진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생산의 사회화가 전개되는 만큼 분업의 중요성이 날로 확대되는데, 이는 전일적 사고의 발양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지적 생산물의 사회적 사용가치를 소멸시키는 요인으로 된다. 자본주의 발전 경향에서 모든 지식의 성장은 분업의 제약성을 더욱 심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는 철학도 예외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은 그 학문의 근본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다른 영역보다 분업 효율화에의 기여에서 더 큰 제약을 지닐 수밖에 없다. 자본의 부문 간 경쟁에서 수반되는 제 법칙은 자본주의 국가와 개별 자본 전체가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에서 가장 적합한 노동력을 형성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도록 강제한다. 개별 자본가가 원하는 지식은 자연과 사회 발전의 합법칙성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 아니라, 생산 기술의 첨단화 및 자기 상품의 수요 증대를 보조할 수 있는 모든 학문적 수단이다. 그리하여 현시대 지배계급 철학은 그보다 제한된 영역을 중점으로 발전해 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소비의 한 부문인 유희 수단으로서의 그것이고, 하나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선전 수단으로서의 그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에서 산 노동의 특수한 결합 양식, 무정부적인 사회적 생산의 발전으로부터 끊임없이 야기되는 소외는 사회에서 철학의 쓸모가 제약되는 양상을 가속화하고 있다.

 

철학자들 스스로가, 철학이 실제로 우리 시대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상응하는 정도의 쓸모를 지니고 있음을 입증하는 일을 완전히 포기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데 열중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의 실제이다. 그들의 행동 양상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을 반영한다. 자기 자신과 타자 사이의 구체적 관계를 직접적 사물의 관계로 나타나는 물신화와 더불어, 주관적인 영역 내에서 소외의 주요한 양상개인을 구성하는 사회의 내적 관계와 개인이나 개체의 인격성 자체가 분리되어 있다는 소외된 의식의 보편적 양태는 지배계급 철학 특유의 경향성을 산출하였다. 철학이 응용 실증과학의 정교화에 어떠한 보조적인 역할도, 또 상대적으로는 주도적인 역할도 할 수 없도록 하는 그들 체계가 지배적인 것이 되었을 때부터 학문의 진보에 있어 철학의 무용성은 이미 입증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그것은 자본의 의도 위에서는 아직 일정한 유용성을 지니지만, 철학이 그러한 유용성을 지닐 수 있는 형태로 전화되었을 때는 이미 철학이 달리 전개할 수 있던, 또는 그럴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수많은 영역이 철학에서 잘려 나간 뒤였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사회에서 철학이 실질적으로나 공식적으로나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은 과거보다 명백히 축소되어 있다.

 

부르주아 철학자 하인리히 리케르트(Heinrich Rickert)는 자연과학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기존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과학적 개념 구성이나 서술의 본질은 우선 각각의 개별적 형상이 ‘사례’로 종속되는 보편적 개념을 구성하려는 데 있다. 이 경우, 사물이나 현상에서 본질적인 것은 사물과 현상이 동일한 개념에 속하는 객체와 공통으로 갖는 어떤 것이고, 순수하게 개성적인 모든 것은 ‘비본질적인 것’으로서 과학에 포함되지 않는다.”3 자연과학의 ‘한계’를 발견한 그는 자연과학과 달리 ‘개성적인 것’을 간취할 수 있는 ‘문화과학’의 토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확실히 문화 현상의 의의는 오직 문화 현상의 개성적 특성에 달려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적 문화과학에서 문화 현상의 보편적 ‘본성’을 밝혀내길 원할 수 없고, 개성화하는 방법을 취해야만 한다.”4 이 바덴 학파의 이론가가 제출한 ‘문화과학’에 어른거리는 과학으로부터 철학의 독립 열망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부르주아 철학자에 의해 매우 다양한 양태로서,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주관주의 철학체계로 재생산되어 왔다.

 

지배계급 철학 영역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이러한 ‘독자성’의 독은 철학의 쓸모를 매우 제한적인 틀에 가두고자 하는 그 반대급부의 편향과 함께 자라났다. 한스 라이헨바흐(Hans Reichenbach)는 철학의 ‘역할’과 관련하여 ‘낡은 철학’과 비교되는, ‘새로운 철학’을 주문하며 다음과 같이 적는다: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역사주의에서 벗어나서, 우리 시대의 과학이 보여준 성과들만큼 정확하고, 정교하고, 신뢰할 만한 결론들에 도달하려고 논리적 분석을 시도한다. … 새로운 철학은 절대적 진리를 찾아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 철학은 경험적 지식에서 절대적 진리가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5 과학과 철학이 상호 정립적이라는 것경험과학의 발전이 보편적이고 특수한 논리적 문제를 항상 야기하며, 논리적 문제가 철학적으로 다루어지고, 정리된 지식 체계가 조만간 과학 발전에 실제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전보다 더 광범위한 지식 영역에 적용되어 간다는 역사적 발전 경향, 그것이 진리의 한 축을 구성함이 그의 저서에서는 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경험적 지식에 객관적 실재의 본질적 관계가 함유되어 있으며, 외적인 경험이 사유로 전화되었을 때 그것 사유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변증법의 핵심과 그의 견해 사이에는 근본적인 적대가 놓여 있다. 발전과 지양의 경향성을 절대적으로 무시하는 귀결로 그의 주장은 케케묵은 철학적 불가지론의 전형을 또다시 제시하는 것을 넘지 못하였다: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물리 세계에 관한 어떤 지식도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이라 인정하지 않는다. 개별 사건은 물론이고 개별 사건들을 지배하는 법칙조차도 확실성을 갖고서 진술할 수 없다.”6 이미 엥겔스는 과학과 철학적 사유 사이의 관계를 정함에서 그것이 하나의 정해진 방향성만을 띤다는 견해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대부분 자연과학자는 아직도 낡은 형이상학적 범주들을 고수하며, 말하자면 자연에서 변증법을 증명하는 이러한 근래 사실들이 합리적으로 설명되고 그것들을 상호 간 연관하여야 할 때 어쩔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사유는 필수적으로 요구된다.”7

 

20세기 초에 들어 과학이 취급하는 대상의 수많은 연관 작용이 실제적인 만큼, 과학에 대한 철학의 관계도 실제적이며, 이것 역시 과학의 객관적 탐구 영역으로 될 수 있다는 관점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이 급속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모든 설명[사실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사라져야 하고, 기술(記述)만이 그 자리에 들어서야”8 한다는 주관주의적 소망과 결합하였다. 지배계급 철학의 이러한 퇴행적 경향동시에 자기 모순적인은 아주 정확히, 철학이 인간 지식 발전에 공헌할 수 있다고 할 때 합리적으로 제시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강화할 수 있게 하는 학문적 토양을 그것 발생의 기점보다 훨씬 근본적인 수준에서 제거하였다.

 

이러한 경향들은 또한 인식된 수다한 것을 구체적 보편으로 파악하기 위한 중요한 철학적 기반인 일원론적-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한 회의적 관점을 양산해 냈다. 수많은 부르주아 철학자가 사이비 ‘자유’ 관념을 퍼트렸다. 이 영역에서 그 누구보다 선두를 달린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결정론이라면 모두 그러하듯이 이러한 태도에서는 개인의 책임이라는 개념이 배제된다. 이론들이야 무어라고 하든지, 사람들이 어떤 사태에 대하여 만족하거나 우려하거나 열광하거나 두려워할 때, 그 일에 대한 책임이 누구 또는 무엇에게 있는지를 실천적인 이유에서 또는 지적 고찰을 위하여 묻게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만약 세계의 역사가 인간의 자유 의지와 자유로운 선택에 (이것들이 어떤 개별적 상황에서 실제로 발생했든지 않았든지) 별로 영향받지 않고 별도로 존재하는 힘의 작용 때문이라면, 세상사의 진행에 관한 설명은 그러한 힘의 전개에 입각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주체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거대한 힘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9

‘자유’에 관한 그의 여러 논문에서 드러나는, 철학사에 관한 극도의 몰이해와 무지는 다루지 않더라도, 그가 결정론을 비난하는 것만큼 “책임”이 어떠한 “실천적인 이유”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제공하는 논리적인 근거의 설 자리가 줄어든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대로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이유”가 없이 임의로 “자유의지”나 “자유로운 선택”이 나타난다고 하는 설명만큼이나 신비주의적이고 신학적인 잠꼬대는 없을 것이다. 대체로 일원론적-결정론적 세계관의 노골적인 비난자들은, 그 비난이 최소한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 데에 얼마나 많은 일원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성격의 해명이 필요한지 조금의 가늠도 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아주 단순한 수준에서 관찰을 구체적 사실로서 진술하기 위해 수많은 근거를 찾아내고, 근거를 통해 얻은 초기 수준의 범주 구조를 일관한 내용과 형식으로 체계화한다면, 그리고 그 결과물을 언뜻 보아 상이한 사태들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또한 불가피하게 일원론적-결정론적 체계 접근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토대를 허물려 한다면, 탐구란 애당초 필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 우리는 우리의 다양한, 동시에 제한적인 경험들에서 도출되는 각각의 견해가 둘 이상의 ‘새로운 시작’, 즉 근원 명제로서 규정으로서 ‘자기만의 근거’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원적이고 총체적인 관점의 무화(無化) 속에서는 예컨대, 지금 당장 지구가 원판의 입체 형태를 띠고 있다고 주장해도 이에 반박할 그 어떠한 해명을 가할 수 없다. 해명은 감각적으로 제출된 지적 구조물 사이에 공통항을 이어 특정 현상을 전체로서 매개적인 단일 원인으로 수렴케 하는 작업인데, 근원 명제로서 규정이 수다하다면 매개적인 단일 원인은 존재할 수 없고 오로지 서로 공통항이 전혀 없는 둘 이상의 ‘원인’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진리 정립의 방향도 둘 이상이어야 해서 종국에는 근원 명제로서 규정이 둘 이상이라는 것의 근거에 관한 통일적인 해명 원리조차 수립할 수 없다. 이제 원판의 평평한 지구와 구체의 지구는 공존하며, 정육면체의 지구 또한 가능한데, 허나 이 모든 것은 유효한 필연적 논증으로서 서 있지 않은 형식적 가능성일 뿐이다. 일찍이 피히테는 스피노자에 이어 다원적 체계의 가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간단히 말하여, 어째서 저 완성된 체계 이외에 하나 또는 여럿인 다른 체계들이 인간 정신 속에 존립할 수 없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 체계들은 저 첫 번째 체계와는 물론이고, 또한 자기들 사이에서도 최소한의 연관 내지 최소한의 공통점도 지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체계가 아니라 여러 체계를 이루어야 하므로 그리 되어야 마땅한 것으로서 그렇다. 따라서 그러한 새로운 발견들의 불가능성을 만족스럽게 증명하려면, 인간의 지식 안에는 오직 하나의 체계만이 존재할 수 있음이 입증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 즉 인간의 모든 지식이 자기 자신 속에서 연관되어 있는 단 하나의 유일한 지식을 형성한다고 하는 명제 자체가 인간 지식의 구성부분이어야만 하는 까닭에, 그것은 모든 인간 지식의 근거명제로서 세워진 명제 이외에 다른 어떤 것 위에도 근거지어질 수 없으며, 그 명제로부터가 아니라면 그 어느 곳으로부터도 증명될 수 없다.”10

 

다원론의 사상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일련의 자기 모순은 그러한 주장마저 그것대로 다른 체계와 완전히 차폐된 속에서 나름의 ‘사실성’을 보증한 무언가로 있을 수 있다는 논리를 개별 사유 주관에게 제공하기 때문에 필연적이다. 현대 지배계급 철학은 이 역설적인 내용이 자기의 체계 내에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을 조금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철학적 인식에서 총체성의 공백은 통속 철학과 이른바, ‘비합리주의’의 성장을 가속화하는 데 일조하였다. 물론 대중적으로, 철학을 소박한 인생철학, 속류 격언 모음집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지배적인 현상이 된 것은 결코 근래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생산력의 진보와 낡은 생산관계 사이의 격화되는 대립에서 지배의 정당성을 상실해 가는 지배계급의 사고 체계, 즉 지배 이데올로기의 주요한 경향이었다. 19세기 말에 부르주아 철학자들이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개척’한 이래 그것은 지배적인 현상이 되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통속 철학은 이러한 퇴행을 보여주는 내용의 집약체이다. 그들에게 더 이상 철학은 과학의 발전 경향과는 직접적으로 연관될 수 없는, 또 그래서는 안 되는 학문으로 취급되고 있다. 근거의 총체적인 부실 속에서 제출되는 테제의 정당화는 곧 근거 없이 행해지는, 더 정확히는 ‘직관’을 무기로 하여 수행되는 모든 편견의 정당화였다.

 

이 모든 경향이 정권에 대한 노동 군중의 비판적 사고 능력을 최대한 단순화하기 위한 지배계급 각고의 노력에 보조되어 발전해 왔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앞선 모든 기조가 각자 힘을 키워오면서 부르주아 국가의 정규적이고 지배적인 철학에는 어떠한 실제적인 연관 체계나 매개된 것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초월적인 ‘직관’의 강조, 연관된 것으로 설명되어야 할 대상의 내부에 포함될 연관의 자의적인 ‘넘어섬’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발전하였다. 이는 논리적 범주 체계의 연속성을 경시하거나, 그러한 것의 원천적인 부정을 정당화하는 경향을 짝으로 달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일반적으로, 구체적 논증을 매우 원시적인 수준의 유비(類推)로 대체한다. 그리고 이 모든 양태는 다시, 철학에 관한 현대의 더욱 노골적인 속류화의 예비 작업일 뿐이다.

 

철학의 속류화가 철학의 무용함의 원인이 아니라, 철학의 무용함, 즉 그것의 산업적 무용함이 철학의 속류화 원인이다. 철학의 속류화란 다름이 아니라 지배계급 철학의 속류화이며, 지배계급 철학의 속류화는 곧 지배계급 사유 체계의 특질이다. 전자본주의 시기 순수 철학자들신학자들이 누렷된 현실적 권위는 당대의 산업적 발달의 미비에 큰 빚을 지고 있었다. 즉, 여기서 지배계급 사고의 비과학성은 실제 경제적 생활을 구성하는 여러 기술적 측면에 있어서 은폐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의 발달한 자본주의적 생산력 앞에서 그것은 더이상 현실적인 경제적 생활에 조금도 호환될 수 없었고, 그 탓에 그것의 비과학성은 조금도 은폐될 수 없었다. 지배계급 이데올로기는 이제 자연사물의 운동과 특성에 대한 신성한 해석권을 박탈당했으며, 그들은 불가피하게 현대과학이 다루는 영역과 철학이 다루는 영역을 절대적으로 분리시킬 수밖에 없었다.

 

“인문학의 위기”란 두 방향에서 가속화된다: 하나는 지배계급 “인문학”의 내용적 퇴행에서 자연 추동되는 영역에서 전개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적인 또 하나는, “인문학”에 대한 산업적 수요를 감소시키고, 그것이 자본주의 경제 구조에서 하나의 출판 생산 부문으로서 존립할 공간이 더 이상 확장해 가지 못한다는 객관적 과정으로서 전개된다. 이 발전 방향은 기존 철학자들의 뇌리에 남아 있던 학문에 대한 최후의 구시대적 잔재를 파괴하는 데 공헌했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이 지배적인 운동의 저변에는 ‘인문적 지식에 대한 순수한 추구’가 존재하는 법이지만, 그러한 ‘추구’ 역시 적대적 생산관계의 사회적 분업에 빚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므로, 현대의 소부르주아 지식 상인의 현존은 오히려 다분히 자본주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 속에서 일반적으로 그러한 빚을 질 기회는 점차 협소화된다. 철학에 관한 시민사회의 경제적 동기는 (오늘날에도 쉬이 관찰할 수 있는) 자본주의 상부구조와 철학의 일반적인 상호작용을 만들어 내었다.

 

장기적인 이윤율의 저하 경향 속에서 전개되는 구체적인 변동 사항들, 다시 말해 그보다 단기적인, 또 개별적인 생산 부문에서 경제적 상황의 변화 본질인 각 부문의 변덕스러운 이윤율의 변동 속에서, 지적 소비재에 대한 자본가의 생산 여부도 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철학과 연관된 제 부문은 더 매력적이지 않은 선택지이다. 그러나 지식 상인들이 그 자신 노동력을 형성하는 데에는 많은 희생이 따랐다. 그러므로 일단 무계획적으로 양산된 노동력의 판매자, 즉 강단과 그 주변에서 최후의 자존심육체노동에 대한 오로지 계급 사회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천시를 항상 달고 재생산되는을 사수하고자 하는 소부르주아 지식 상인에게 “인문학의 위기”는 도저히 방치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는 자본의 부단한 이동에서 배제된 영역에서 활동하는 지식 상인들에게 정치적으로 일정 혁명적인 성격을 부여하였다.

 

현시대에서 지배적인 철학은 부르주아 관변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을 위한 최소한의 ‘교양’을 제공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소부르주아적 허세 속에서 재생산되는 지적 유희로서, 하나의 자극적인 지적 소비재의 생산을 위한 ‘교양’을 제공할 뿐이다. 그러므로 애당초 노동계급의 세계관이 현시대 철학의 주요한 양태를 재생산하기 위한 제 기관에서 그 어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없었다는 건 자본주의적 발전 도상에서 필연이었다. 철학의 주요한 경향은 노동계급의 의식화에 그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다.

 

현시대의 지배적인 철학은 노동계급 의식화의 반대 작용으로서의 특수한 학문적 체계이다. 노동계급의 철학과 계급 사회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점한 철학은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의 당파로서 철학의 쓸모를 말한다면 현대사회에서 주로 논해지는 기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에서 논구되어야 할 것이다.

 

철학적 사유의 역사적 전제조건, 즉 그것의 보편적인 발생적 계기가 물질적 생산관계를 둘러싼 계급투쟁인 것과 동일하게, 한 시대의 계급투쟁과 생산관계의 발전 양상은 그 시대 철학적 사유와 현실적으로 제출되는 개별 철학의 내용을 규정한다.11 엥겔스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보다 고차적인 이데올로기, 즉 물질적, 경제적 기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데올로기는 철학 및 종교의 형식을 취한다. 여기에서의 관념과 그것의 물질적인 존재 조건과의 연관은 더욱 복잡해지고 매개 고리들에 의하여 더욱 모호한 것으로 된다. 그러나 여하튼 연관은 존재한다.”12

 

이러한 연관은 특히 오늘날에 이르러 더 전면적인 현상으로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적 생산이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 국면 속에서 철학은, 각 계급을 둘러싸 실존하면서 각자의 계급적 지위를 강화하고 또 약화하는, 또 각 계급 간 대립의 성격을 규정하는 사회적 실재의 구체적 내용과 분리될 수 없다. 예컨대 수많은 식민지 모순이 격화한 단계에 이르러 있는 신식민지 국가에서 철학의 내용과 쓸모, 그리고 외양적 ‘주제’는 〈그 나라의 사회경제적 영역에 지배적으로 관여하는 제국주의 총자본〉과 〈제국주의적 지배가 관철되는 영역에서 삶을 영위하는 신식민지 민중〉 사이의 대립 내부에서 형성·발전한다. 마찬가지로 선진자본주의 나라에서 철학의 내용과 쓸모는 노동 착취의 강화, 노동계급에 대한 회유, 노동운동과 질적이고 양적인 성장과 쇠퇴 및 이에 대응하는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의 이해 내부에서 운동한다. 이는 생산양식의 발전 양상 속에서 마치 정치적인 대립, 사회경제적 모순과 ‘무관한 것’으로서 제출되는 개별 철학의 성격이 실제로는 궁극적으로 지극히 정치적이며, (주로 지배계급의) 사회경제적 이해와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파악함으로써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철학적 사유의 현실적 제출의 내부에 숨겨져 있는 계급모순은 향후 철학적 입장과 견해가 더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동시에 그 분화된 상이한 것으로서의 수다한 철학적 사유가 서로 부정적인 상호 연관을 맺게 하는 보편적 계기로 작용한다. 이는 철학적 대립의 전개 역시 불가피하게 계급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강조되어야 할 것은, 그 대립이 일반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계급의 경제적 이해를 반영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철학의 영역 내부에서 그 대립은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철학적 실천, 더 구체적으로는 철학적 수단들철학적 사유와 언어, 외적인 표현의 형태로 현상하고 발전한다는 것이다. 가령 “자기에 앞선 지배계급을 대신하는 모든 새로운 계급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이해를 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공동 이해로서 내세울 필요”13가 있는데, 여기에는 철학적 수단이라는 재료가 불가피하게 요구된다. 현존 사회형태와 관련하여 혁명적인 성격을 띠는 계급 역시 지배계급의 낡은 사상에 대응하기 위해 당대에 학문적 형태로 실현된 갖가지 과학적 진보를 통일적인 정신적 구조물혁명적-과학적 이데올로기의 형태로서 제출했어야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기반하여 “독일 노동운동은 독일 고전철학의 계승자14가 되었다.

 

이는 오늘날 철학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는 영역의 무용함이 사회형태의 자본주의적 재편과 결부된 형태로서본질적으로는 부르주아적 사고방식의 무능함에 있음을 더 높은 수준에서 해명할 수 있게 하는 고리이다: 산업 자본주의의 계속된 발전은 물질적 자연을 포괄하는 전체 세계의 해석에 관한 지배계급 철학의 권위를 파괴했다. 생산력의 폭발적 증대와 상호 작용하는 자연과학과 공학의 발전은 전통 형이상학을 제반 자연 존재에 대한 보편적 해명의 영역에서 축출하였다; 그러나 그 파괴의 잔해에서 지배계급의 사상은 다른 경향으로서 권위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철학의 노골적인 속류화를 정당화하면서 등장하였다. 이러한 저속화는 철학적 사유가 과학 탐구의 논리와 방법론 발전을 조금도 규율할 수 없음을 강변하는 방식으로써, 즉 철학적 사유의 ‘무능’을 강조하면서 과학에 대한 철학의 ‘독립’, 그리고 과학 역시 개진되는 철학에 대한 어떠한 ‘간섭’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세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부르주아 학문의 세계에서 이러한 ‘원칙’은 자연스레 노동계급 철학에 대한 그들의 일반적 취급 방식에도 적용되었는데, 이러한 적용은 매우 특징적인 것으로서, 총체성 및 세계의 물질적 통일성, 그리고 변증법적 논리를 적대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기조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기조는, 자본가계급이 바로 그것에 기반하여 자본주의 사회형태를 영구적인 것으로 각색해야 할 때 빈번히 방법론적이고 논리적인 결함을 가져오게 하고, 과학사적으로 관찰되는 학문의 보편적 발전 경향에 포괄되기 어려운 성격의 견해를 재생산하게 하였다; 그러자 이제 부르주아들은 자연과학의 성과 일부를 왜곡하여 그것을 제 주장의 자양분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이 측면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전개는 세 가지 국면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첫 번째로 19세기 중엽까지 그것이 역사적 진보에 관해 가지는 시민사회의 의식으로부터 계속 솟아오르는 진취적인 성격에 기반해 있는 국면이다. 이 단계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과학과 동맹을 맺어 신학의 낡은 세계관을 파괴한다; 두 번째 국면은 1870년대 말 독점자본주의가 발생, 자본주의의 부후성과 기생성이 심화해 가는 때로부터 한 세기에 이르기까지 ‘(자연)과학과의 독립’과학과의 적대를 선언하는 방식으로서의 국면이다. 이때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실증과학에게 〈각자의 영역을 존중해 줄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진보적 부르주아의 합리성을 폐기했다15​; 세 번째는 세계의 발전상과 자기 체계의 점증하는 모순 속에서 과학의 성과 일부를 ‘차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부득이하게 ‘차용 당한’ 과학자들에게 일정 수준의 반발을 샀으며, 결정적으로는 첫 번째 부정에서 점증해 갔던 모순을 여전히 보존한다. 결과적으로 이 국면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는 어떤 측면에서 과학 발전의 경향에 전면적으로 적대하면서, 또한 ‘차용’하며 진동하고 있는, 즉 단지 ‘무한한’ 부정적 통일을 거듭할 뿐으로 되어 있다. 두 번째 국면에서 이는 경향적으로만 내재해 있었지만, 세 번째 국면에 이르러 그것은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로써 둘째 경향과 셋째 경향은 모두 동일한 도피처철학적 불가지론을 택하는 것으로 나아갔으며, 현대 지배계급 철학에서 철학적 불가지론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요컨대, 그것에는“현실(성)을 제공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가 아니라, 사유될 수는 있지만 서술될 수는 없는 것에 대한 암시를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는 사실이 이제 분명해져야 한다”16는 식의 전통적인 형태가 있는가 하면, “객체를 구성하는 물질의 움직임이 근본적으로 비결정적”17이며, “그 최소 규모의 층위에서 물질, 또는 물리학자들이 더 정확히 ‘에너지’라고 일컬을 것은 ‘비결정적 요동’”18이라고 간주하는 ‘새로운’ 형태가 있다. 두 번째 형태에 속하는 류의 견해는 흔히 다음과 같은 입장으로 귀착한다: “내가 보기에 물질의 움직임은 더 상위의 인과적 설명도 없고 외부의 인과적 설명도 없거나, 또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실험적으로 검증된 것도 없고, 그에 대한 암시도 없다. … 기원전 1세기에 루크레티오스가 물질의 비결정적 클리나멘(clinamen)을 자기 철학의 핵심에 둔 후에 수 세기 동안 주해자들이 주저했지만, 이제는 이 관념이 강력히 귀환했다. 나는 이 전통을 되살리고자 한다.”19 그러나 ‘새로운’ 형태‘신유물론’, 더 세밀하게는 (‘신유물론자’들에 의하면 각각이 서로 다른 내용을 가진다는) ‘객체-지향 존재론’, ‘사변적 실재론’, ‘운동적 과정 객체론’ 등으로 불리는 것은 물리적 자연의 파악양자역학은 물론이고, 양자장론, 그리고 끈 이론과 그에 대한 모든 이론적 비판 모두에서 현대 물리학자들이 인과율과 그것의 위배에 관한 사항을 여전히 엄중하게 다루고 있음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우연성을 고립화하여 그것을 철학적 불가지론에 활용하고자 하는 시도의 최종적인 보루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악용하는 것에 있다. 그러나 이미 약 반세기 전 유물론 철학자 헤르베르트 회르츠(Herbert Hörz)는 당시 양자역학으로 대표되는 물리학의 진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파동은 회절을 통해 광속으로 무한히 전파될 수 있지만, 이러한 기본입자의 파동적 성질은 기본입자의 극미립자(Korpuskel) 성질의 존재로 인해 일정한 수준으로 제한된다. 반면 극미립자는 국소화되어 직선 방향으로 퍼져 나갈 수 있다. 기본입자의 극미립자적 및 파동적 성질의 존재는 에너지 교환 중, 윌슨의 안개상자(Nebelkammer) [내부에서], 그리고 판 너머의 종착 지점에서 명백히 관찰된다. 반대로, 회절과 간섭 효과가 존재한다. 기본입자는 그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지만, 무한히 퍼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직선으로만 움직일 뿐만이 아니라 파동적 성질에 따라서도 운동한다. 그것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운동하지만, 빛보다는 느리다. 운동에 대한 고전역학의 관점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 [양자역학의] 상보성 원리는 객관적 모순을 인식하기 위한 예비적 단계이나, 여전히 상호 의존적인 객관적 파동과 극미립자적 성질의 형이상학적 공존 수준에 머물러 있다. … 고전적인 공시점 도식(Raumpunkt-Zeitpunkt-Schema)으로는 기본입자의 운동을 기술하는 데 전적으로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도식은 벌써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통일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운동은 다시 정지 상태(고정 상태)의 합으로 기록될 뿐이다. 기본입자 물리학의 진보는 한편으로 운동의 객관적인 변증법적 모순을 과학적으로 포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입자와 그 구조 사이의 연결을 발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20

현대 물리학에서 기본입자의 운동은 특정 궤도 내에서 완전히 무작위적일 수 있지만, 이러한 무작위적 운동은 바로 그 특수한 궤도 내부를 한계로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의 운동은 우연적인 동시에 필연적이고, 이 통일로서의 개별 운동은 확률적 파동함수로써 기술된다. 이것은 여전히 물리학자들이 원인-결과 연관이라는 개념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로 된다.

 

과학사에 관한 왜곡으로 점철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쇠퇴 과정의 구체적 내용은 증대되는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객관적 모순, 심리적 공황으로 가득 찬 자본가계급의 의식적 측면, 계급투쟁 양상의 복잡한 관계가 규정한다.21 그것이 세상에 드러나는 주요한 형태는 다름이 아니라 무용한 담론 체계의 끊임없는 과잉을 보여주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그 역사적 축적으로서 실사구시적 특질의 거세 및 파산 과정이다. 그러나 파산 과정이 곧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생활 영역 곳곳에 자리 잡은 공식적인 영역에서 물러났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가 여전히 폭압적인 방식으로 그 지배력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경제적으로 쇠퇴하고 있다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그저 쇠퇴해 가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될 뿐이다. 핵심이란, 이데올로기의 그 과학성과 대중성은 총체성의 사유를 담지한 계급적 주체의 역량이 확보되지 않는 한 유리돼 있다는 것이다. 쇠퇴의 속성에서 핵심적인 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과학탐구에 대한 규제적 사유를 재생산하는 데서 완전히 실패했다는 데에 있다. 한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파산이 곧 노동계급 철학의 전면적 보급의 필연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는 한 나라, 또는 세계에서 자본주의 경제의 붕괴가 자동적으로 사회주의 승리를 뜻함이 아닌 것과 같다. 언급한 바와 같이 계급투쟁 양상은 쇠퇴 과정의 구체적 내용을 규정하는데, 시기마다 비율적 차이가 존재한다. 현시대에서 파산의 징후는 노동계급 철학이 아직 관여하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파산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일반적으로 노동계급의 투쟁과 무관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의 지속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에게 낡은 부르주아적 담론의 잔해를 또다른 기만적 형태로서 ‘재건’할 기회를 끝없이 제공하고 있다.

 

근래에 들어 허위의식의 거대한 부위는 “급진성”의 외피를 입은 주관주의적‘정신분석학’·‘실존주의’·‘생철학(生哲學)’·‘사회비판이론’·‘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생명정치이론’의 “좌익적” 변종형태로 발현하는데, 이는 민중의 지적 보고이자 유산인 마르크스주의 학설을 왜곡하면서 “철학의 쇄신”을 끊임없이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에 이 “과학 없는 사유: 반합리주의의 좌익적 변종”22에 대해 소련 철학가 L. G. 니키티나(Nikitina)는 그것이 “주관적 관념론적 경향과 회의주의의 만연화를 부추기며, 반합리주의, 주의주의, 숙명론, 사회적 염세주의, 모방주의(표면적 신규성으로 포장된)로의 기울음을 강화”23하는 것만큼, 단지 구세계를 위한 “철학의 쇄신”에 불과함을 폭로한 바 있으며, 단지 그것들은 부르주아 신문, 텔레비전, 라디오 등의 대중 매체 수단으로 특정 사상적 흐름과 인물들을 홍보함으로써 허위적 권위를 조장해 왔다고 평하였다.24 “좌익적” 주관주의는 철학과 과학의 상호작용에서 두 항의 변증법적 통일성·단초적이고 아직은 빈약한 감각지(感覺識)의 상승 잠재력, 즉 사고의 상승과 하강의 일원성·안정적 동일성의 객관적 확보, 무엇보다 객관적 실재의 인식 가능성을 적대한 대가로 정치학적 개념에의 혼란에도 영향을 끼쳤다. 예컨대 “〈새로운 철학자들〉의 극도로 혼란스러운 권력 개념에서 권력은 극한의 (‘공허한’) 추상화로 다루어진다. 그들에게 권력은 단지 ‘모든 것’이며, 언제나 절대적인 ‘악’일 뿐이라고 하면서, 이를 구체적-역사적, 사회학적, 정치학적, 나아가 이성적-논리적 분석 자체가 불가능한 것으로 묘사한다. … 실지 사회관계, 경제, 정치는 뒤틀리고 신비화된 형태로 제시된다.”25 비록 “급진성”의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시도는 정신적 구조물의 본질적인 철학적 특성으로 인해, 제국주의 타파 제국주의의 부정인 참된 민주주의 고양이 아니라 “기존 제국주의 문화 내에서 또다른 ‘대안’ 문화를 내세우는 것”26​으로 귀결될 뿐이다.

 

모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군중의 상식을 지배하고 있고, 상식과 상식에 대해 규정적인 계급적-철학적 의지가 일반민주주의 쟁취의 투쟁 전선에서 에게 그 정신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권리 형태의 오랜 양대 전제인 자유’와 평등’은 (고전적 개념으로든, 현대적 개념으로든) 추상적인 표상물로서의 ‘가치’인 탓에 항상 이를 둘러싼 철학적 사유의 정치적 점취가 문제가 되었다. (이 ‘가치’에 근본적으로 친화적일)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줄기가 정치적 점취를 이루었을 때면 두 가치는 모든 반동적인, 근본적으로는 사적 소유 옹위 의도의 ‘방종’, 모든 부르주아-정책적 요인으로부터 생겨나는 과도한 법률적 형식주의 및 경제적 부담의 기계적이고도 형식적인 ‘평균화예컨대 간접세율의 증가 합리화, 사교육 확대 준거, 반민주주의 개악·폭거의 ‘명분’으로 활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상식과 이 상식의 사유 지반에 균열을 내어 매개 목표를 취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혁명하는 수단은 철학적 비평이다. 이때 비평 ‘가치’의 위선성그것들이 자본주의 지양에 적합한 모든 개념에 적대적이며 치명적인 모순의 집적이라는 점만이 아니라 ‘가치’의 과도적 취급 모두를 취해야 한다. 

 

*   *   *

 

실상 민중민주 당파의 철학적 투쟁은 ‘인문학의 위기’를 위기 전의 상태로 ‘회복’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위기를 새로운 인문적 토양으로의 지양발판으로 삼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이미 내적으로 과학성의 파산을 안고 있는 지배계급 철학의 한계가 단지 관념 속, 극단적 배타성을 띠는 지식인 무리 속에서가 아니라 군중의 생활 전반에서 노정(露呈)돼 있음을 뜻할 뿐이며, 이는 민중민주 당파에게 새로운 기회의 터전을 제공한다.

 

나는 사회주의 진영이 세계사적으로 크게 후퇴한 후 수십 년째 이어져 오는 반동기의 현 실정에서도, 지난한 정신사(精神史)에서 투쟁의 근원에 철학의 근본 문제가 있음을 꿰뚫고, 사물·(물적 및 정신적) 현상·경험의 발생-발전-사멸 사이클의 구성 요소를 내재적인 방법으로 추적하고 쌓는정연한 철학적 사유를 도구로 현시대의 사념들을 정구(精究)하고 비평한다면 이 사념들이 걸친 ‘세련됨’의 위장막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로써 우리는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예부터 쉴 새 없이 반복 제출되어 온, 가짜 자족감으로의 도피의 표현 및 출로 없는 자기 배반적 구상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철학적 투쟁은 단지 위장막을 거두는 데에 그 종국 목적이 있지 않으며, 실지 그 효과도 위장막을 거두는 데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투쟁은 한편으로 민중민주 당파의 철학의 정교화를 동반하고, 현실에서 정치문제에 관한 강력한 대응 능력과 그 세포인 원리·양식들을 낳는다. 이러한 전개로 대표되는 인식 상승의 철학적 비평으로의 발동은 수다한 일반민주주의 쟁취 투쟁에서 우리의 요구에 강력한 당위를 불어넣을 수 있는 주체 역량의 확보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의 이론의 전체적인 가치는 그의 이론이 ‘본질적으로 비판적이며, 혁명적’이라는 사실에 있다고 생각했다.”27 비평 세계관의 변혁을 이끌어낸다면, 이는 그람시가 전한 양식(良識)의 창출이다. 실지 그는 “실천철학은 출발점에서부터 기존의 사고 방식과 구체적 사상을(기존의 문화계)를 전복하는 논쟁적, 비판적 외양을 띠지 않을 수 없다”28 하였다. 이 연장선에서 비평 “체계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하고, 또 실제 현실 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체계적인 방식으로 대할 수 있게”29 만든다. 그것은 “‘순진한’ 군중의 진정한 열정을 드러내 주고, 높은 문화 수준과 더 고차적인 세계관을 얻고자 하는 단호한 결심을 이끌어 내[는]”30 것이다. 그러나 비평철학적 전제원리 “‘독창적’인 ‘철학적’ 사건”29이라고 비평은, “작은 지식인 집단의 전유물이 되고 마는  ‘천재적’ 철학자들에 의해”18 창조 및 갱신〔즉, 원리의 존립 양식에 있어 그것의 정세에 부응하는 내용으로의 부단한 보존적 재조직화33​〕되지 않는다. 오직 진보적 정치투쟁을 자기 발전의 계기로 삼는 선진계급의 유기적 지식인만이 원리 계속적으로 정교화  있다.

 

그러므로 수단으로서 근본적 비평 원칙은 오로지 정치 투쟁에서 제기된 치열한 고민 속에서 도출된 문젯거리 전반에 대한 그 범용성을 목적 규정을 지니며, 또 범용적이어야 한다. 이 범용성은 수다한 고민의 가상태에 잠재된 본질, 즉 구체적 보편성을 드러내는 형태를 취해야만 한다. 이 형태는 여덟 가지의 주요한 변증법으로 수립된다.

 

2025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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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념이란 엄밀하게는 부르주아적 사념으로, 그것은 존재론적·논리철학적·방법론적 영역에서 현시대 지배계급의 근본 사고의 양상에 대한 역사적 소외 의식으로서만 규정될 수 있다. 이는 가장 발전된 형태로서는 언제나 정치적인 전선의 문제, 강령적 요구와 접맥된 인간 행위, 인격이론 및 사회적 동기, 보편도덕에 관한 견해로 제출된다. 예컨대, I. V. Buchko는 부르주아 사회학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 과정은 다소 비범한 방식으로 외부에 표현된다. 객관적 진실의 요소들을 상실하고 반동적 구축물로 전환되는 것은 ‘과학에 접근한다’는 허위의 깃발 아래에서 일어난다. 어쨌든, 부르주아 사회학자들은 대중을 향해 그러한 주장을 펼치려 애쓴다. 부르주아 사회학 내 대부분의 관점을 지지하는 이들은 방대한 양의 경험적 자료를 토대로 결론을 도출하려고 시도하는데, 이러한 자료는 완전히 현대적인 사회학적 조사 기법과 수학적 장치, 컴퓨터 기술의 광범위한 활용을 통해 처리(및 수집)된 것이다. … 부르주아 사회학을 비판하는 문헌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운동 형태를 심리학적·인류학적·생물학적·지리학적 요소로 환원하려는 시도에서 드러나는 기계론적 성격에 주목한다. 사실 그러한 소위 이론들의 창시자들 자신은 고차원적인 것을 저차원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데 특별한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단순히 ‘고차원적’이며 독자적으로 사회적인 것의 실체를 의심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환원’을 사회학을 진정한 과학으로 만드는 수단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견해대로, 이미 ‘엄밀한’(혹은 ‘정밀한’) 과학으로 확립된 학문들의 원리와 방법이 사회학에 침투하는 것은 사회학자들로 하여금 사회 생활의 ‘혼돈스러운’ 자료들을 ‘통일적이고 엄밀한 체계’ 속으로 통합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는 마치 수학적 방법이 물리학과 화학에 적용되면서 그들을 진정한 과학으로 변모시킨 것과 같은 이치다.” (I. V. Bychko, “The Reactionary Essence of Bourgeois Sociological Concepts of Personality”, Soviet Studies in Philosophy, 15 (1), 1976, 83-4.) 이는 사회과학 연구에서조차 상위 체계로서 탐구대상의 그 하위 체계, 부분들의 집합으로의 환원, 질적 규정과 양적 규정, 구체적 도량의 통일성 등에 관한 철학적-방법론적 입장이 문제로 될 수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 예컨대 의지에 초월적 자율성을 부여하는 모든 ‘자유의지론’적 견해는 심리-철학에서 고대부터 현재까지 강력한 논의 대상인데, 이 역시 사회혁명을 위한 투쟁에서 전 수준을 걸친 강령적 요구의 충족과 결부된 연유로 마르크스 학설 발전의 계기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였다. 마르크스주의자 G. V. 플레하노프는 일찍이 20세기 초에 이 분야에서 인민주의자들과 논쟁하며, N. G. 체르니셰프스키의 결정론을 심도있게 다루었다. (G. V. Plekhanov, “N. G. Chernyshevsky”, Selected Philosophical Works, Vol. 4, Moskva: Progress Publishers, 1980, 226-9.)텍스트로 돌아가기
  3. H. J. Rickert, 『문화과학과 자연과학』, 이상엽 역, 서울: 책세상, 2004, 87.텍스트로 돌아가기
  4. 위의 책, 152.텍스트로 돌아가기
  5. H. Reichenbach, 『자연과학과 철학』, 김회빈 역, 서울: 중원문화, 1994, 359.텍스트로 돌아가기
  6. 위의 책, 337.텍스트로 돌아가기
  7. MEW, Bd. 20, Berlin: Dietz-Verlag, 1975, 475.텍스트로 돌아가기
  8. L. J. J. Wittgenstein, 『철학적 탐구』, 이승종 역, 파주: 아카넷, 2016, 제109절.텍스트로 돌아가기
  9. I. Berlin, 「자유에 관한 다섯 편의 논문」,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 박동천 역, 서울: 아카넷, 2006, 258.텍스트로 돌아가기
  10. J. G. Fichte, „Ueber den Begriff der Wissenschaftslehre überhaupt“, Fichtes Werke I: Zur theoretischen Philosophie I, Berlin: Walter de Gruyter & Co., 1971, 60.텍스트로 돌아가기
  11. MEW, Bd. 3, Berlin: Dietz-Verlag, 1978, 46-47.;『독일 이데올로기』, 제1권, 이병창 역, 서울: 먼빛으로, 2019, 100-4.텍스트로 돌아가기
  12. F. Engel,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양재혁 역, 서울: 돌베개, 1987, 78.텍스트로 돌아가기
  13. MEW, Bd. 3, 47.; 『독일 이데올로기』, 2019, 103.텍스트로 돌아가기
  14.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2019, 86.텍스트로 돌아가기
  15. Otrechenie ot progressa, istorii, poznaniya i istiny, eds. M. Buhr & R. Steigerwald, Moskva: Mysl, 1984, 17-8.텍스트로 돌아가기
  16. J. -F. Lyotard,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이해』, 이진우 편, 서울: 서광사, 1993, 79-80.텍스트로 돌아가기
  17. T. Nail, 『객체란 무엇인가』, 김효진 역, 서울: 갈무리, 2024, 31.텍스트로 돌아가기
  18.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19. 위의 책, 32.텍스트로 돌아가기
  20. H. Hörz, „Die philosophische Bedeutung der Heisenbergschen Unbestimmtheitsrelationen“,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8 (6), 1960: 706-7.텍스트로 돌아가기
  21. D. Bergner, „Philosophie als imperialistischer Ungeist: Zur marxistischen Auseinandersetzung mit der bürgerlichen Philosophie“,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13 (4), 1965: 419.텍스트로 돌아가기
  22. L. G. Nikitina, «Novaya filosofiya» dlya starogo mira, Moskva: Mysl, 1987, 61.텍스트로 돌아가기
  23. Ibid., 8.텍스트로 돌아가기
  24. Loc. cit.텍스트로 돌아가기
  25. Ibid., 67.텍스트로 돌아가기
  26. Otrechenie ot progressa, istorii, poznaniya i istiny, 1984, 4.텍스트로 돌아가기
  27. V. I. Lenin, 『인민의 벗이란 무엇인가』, 김우현 역, 서울: 벼리, 1988, 200.텍스트로 돌아가기
  28. A. F. Gramsci, 『그람시의 옥중수고 2: 철학·역사·문화편』, 서울: 거름, 1999, 170.텍스트로 돌아가기
  29. 위의 책, 164.텍스트로 돌아가기
  30. 위의 책, 169.텍스트로 돌아가기
  31. 위의 책, 164.텍스트로 돌아가기
  32.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33. 재편이란 추상적 경로로는 이론을 실천으로써 검증하여 이론의 현상 영역 포괄 범위를 넓혀가는 수순으로 전개된다. 이때 초기 이론은 실천에서 제기된 더 폭넓은 모순을 자체 내에 긍정적으로 통일시킬 수 있는 이론으로 복귀한다. 이론적 내용의 논리적 탑으로서의 보편층(普遍層)은 대상의 기본 질에 광범위한 비약이 관철되지 않는 한 실천적 지양 속에서 보존될 뿐, 소멸하지 않는다. 예컨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경제 분석의 적용 대상이 자본주의 경제인 한 그가 추려낸 자본주의 경제의 일반 법칙은 이 대상의 보편적 자기 재생산 체계와 일치를 이루므로 유효한 도구가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기본 질이 지양된 사회(낮은 단계의 공산제, 높은 단계의 공산제)에서 더는 자본주의 경제의 일반 법칙이 전체적 연관으로서 작동하지 않으므로 그것과 질적으로 완전히 구별되는 사회주의 경제학의 별도 수립이 요구된다. 이론은 그 보편층이 보존되는 한 일종의 문제 해결에서 도구적 매개물의 기능을 한다. G. 크뢰버(Kröber)는 과학 이론의 해명 수준을 보편과 개별로 나누며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객관적 실재나 사고의 특정 영역에 대한 체계적으로 정렬된 진술들의 집합인 과학적 이론은 일반적으로 개별 사태와 관련된 진술과 (닫힌 또는 열린) 사태들의 범주와 관련된 진술을 모두 포함한다. 열린 사태 범주와 관련되면서 해당 범주의 요소들 사이의 보편적이고 본질적이며 불변적인 연관성을 반영하는 진술은 우리가 법칙 진술(Gesetzesaussage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반면 개별 사태에 대한 진술은 만약 그것이 일반적인 법칙 진술로부터 유도된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관찰, 실험 등을 통해 획득된 것이라면, 우리는 이를 경험적 진술(empirische Aussagen)이라고 명명할 것이다. 과학적 이론은 반드시 다음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자신이 재현하는 경험적 사태와 법칙적 연관관계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둘째, 자신의 연구 대상 영역 내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는 예상 사태에 대한 예측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예측은 한편으로는 인간 행동의 지향점 역할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론 자체의 진리 함량(含量)에 대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G. Kröber, „Prognose, Hypothese, Gesetz: Logisch-methodologische Bemerkungen“,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15 (7), 1967: 774.) 이론에 보존된 (초기의) 법칙 진술은 “직접적인 관찰, 실험”으로 대표되는 실천을 통해 경험적 진술이 지정하는 개별 사태(E)까지의 일반적 논리 경로(B)를 내함함으로써 구체성을 확보한다. 이 논리 경로는 법칙 진술(G)이 지정한 초기 보편의 총체성에 자리 잡은 보편의 구성물이라서 더 많은 논리 경로를 발견할수록 우리는 일반 법칙에 대한 더 심오한 이해를 가질 수 있다. 이처럼 두 진술은 서로 내적으로 통일되어 있다─그러므로 이는 “특정 질서의 본질(법칙 진술로 표현된)에서 보다 상위 질서의 본질(최대한 보편성을 가진 법칙 진술로 표현된)로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Ibid., 775.) 즉, 이때에도 이론의 초기 단계에 간취된 보편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결코 쿤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나 실증주의적 반증에 토대를 둔 식의, 이론적 형태의 악무한적 자기 부정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초기 이론 또는 매개 단계로서 이론의 보편 설정에 명백한 오류가 존재하여 외부 객관성의 기본 질의 전복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이론이 폐기되어야 하는 경우 또한 존재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