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드라마를 몇 편 보다 보니
문득 <아일랜드>가 떠올랐다. OST를 구해 듣고 있는데,
그 때의 행복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노희경과 더불어 이른바 '마니아 드라마'계를 양분하는 인정옥이 극본을 쓴데다
무려, 이나영, 현빈, 김민정, 김민준, 이 네 명(!)이 주인공이었으니
(모르긴 해도, 이 넷이 한 극에 출현하는 건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정말이지 방영 전부터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기억이 닿는 한에서 최고의 드라마였지만,
뭐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가 대개 그렇듯이 흥행엔 참패했다.
OST 중 <그대로 있어 주면 돼>는, 특히 장필순의 목소리를 거칠 땐,
마이너한 이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쓸쓸하면서 따뜻한 위로였다.
"버리고 싶은 건 네가 아니었어 버려지는 건 내가 되어 줄게"
가진 게 없으므로, '버려지는 것'을 선물했던 그/녀들.
<아일랜드>가 앞으로도 쉽게 잊히지 않을 이유는
이 극이 비와 연결된 이미지를 내게 남겨 줬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마지막 장면,
중아와 재복이 빗속으로 손을 뻗으며
어디엔가 있을 서로의 손을 찾고, 또 비를 매개로 부딪치는 장면이 그것이다.
당시 오규원 시인의 시를 조금씩 읽고 있었으므로
그 장면은 <오후의 아이들>이라는 아래의 시와 자연히 얽히게 됐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을 파며 걷고 있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을 열며 걷고 있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에서 눈을 번쩍 뜨고 있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에서 우뚝 멈추어 서고 있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에서 문득 돌아서고 있다"
공기와 비,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 사이를 가득 메우고 있는,
따라서 멀리 떨어져 만날 수 없고, 어쩌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사람들의 손끝을 맞닿게 해 주는 매개물.
중아와 재복을 이어주는 붉은 실.
갑자기 <아일랜드>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진다.
Posted by 아포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