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트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제주, ‘가장자리’에서

 

 

제주, ‘가장자리’에서

 

박성인/가장자리 농원지기

<질라라비>2020.10월호

 

사용자 삽입 이미지

 

뿌리! 더 아래로, 더 왼쪽으로!

 

땅속 깊이 내리는 것은

그만큼 줄기를 위로 솟게 하기 위해서다.

칠흙 같은 어둠 속을 헤매는 것은

잎이 햇빛을 마주하게 하기 위해서다.

왼쪽으로 뻗는 것은

꼭 그만큼 가지를 오른쪽으로 뻗게 하기 위해서다.

주근이 굵어야

잔뿌리가 많아지고,

그 가는만큼 흙속 무기물을

생명으로 바꾸어낸다.

뿌리!

살아서 땅속 길을 내고,

죽어서 땅속 거름이 된다.

 

시인은 꽃을 보지만,

농부는 뿌리를 본다.

시인은 꽃을 통해 뿌리에 다다라야 하고,

농부는 뿌리를 통해 꽃을 기다려야 한다.

 

8년차 초보농부다. 8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데도 여전히 한심하고 어설픈 ‘초보’ 농부다. ‘농사(農事)’라기보다 차라리 ‘농도(農道)’에 가깝다. 생태순환적인 자연농업으로 30~40가지 밭작물을 재배한다고 하지만, 하는 것마다 변변치 못하다. 8년간 겪어보고, 이것저것 주어들은 것도 있고, 책도 보고 해서 머리로는 자연농업을 조금 안다고 하지만, 무엇보다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나이도 있고, 농사짓는 평수(2,500여평)도 혼자 감당하기에 벅차지만, 역시 농사는 ‘몸’이 짓는 것이다. 체력뿐 아니라 몸의 리듬까지 농사를 짓게 몸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 몸에서 농부다운 ‘농심(農心)’이 생긴다. 그래서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집안에서 농사를 했었더라면, 귀향해서 농사를 짓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자연 농업’을! 몰랐다. 농사가 이렇게 힘들고 진입 장벽이 높은 줄은. 농사를 짓기 시작할 무렵에 우연히 후배로부터 ‘자연농업’에 대해 소개받아 괴산에서 교육받고, 자연농업을 한답시고 지금까지 버텨왔다. 흔히 오해하듯이 자연농업은 ‘방치’가 아니다. 자연의 생태적인 순환을 이해하고, 그 자연의 흐름에 맞춰 그 땅에 맞는 자신만의 농법을 하나씩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자연의 생태적인 순환을 이해하려면, 흙과 미생물, 농작물과 종자, 농작물의 영양 관리, 검질(잡초) 관리, 병해충 관리, 기후 변화 등을 알아야 한다. 알아야 할뿐 아니라, 필요한 조치를 ‘제때’ 해야 한다. 밭 만들기와 파종에서 수확과 보관까지 4계절의 변화에 맞춰 제때 해야 한다. 제때! 변화무쌍한 자연의 변화와 흐름 속에서 제때를 알아내는 것! 안다고 하다라도 제때 필요한 조치를 하는 것! 자연재배 농사 10년 안에 이걸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이제 2~3년 남았는데. 그래서 여전히 ‘초보 농부’다.

 

검은 보리

 

검은 보리, 알이 여물어간다.
제 머리 무게를 감당하기에 벅찬,
가는 보리대는
흔들려야 버틴다.
흔들리면서 버틴다....

검은 보리가 흔들리면서
바람이 인다.
바람이 봄을 조금씩 밀어낸다.
초여름 볕이 따갑다.
검은 보리가 영글어간다.

흔들리며 영글어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래도 ‘8년차’다! 검질(잡초)과 버렝이(벌레)에게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는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밀리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멋모르고 허무하게 밀리지는 않는다. 작지만 큰 깨달음도 얻었다. 자연 농업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다 먼저 최소한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무엇을 하지 말기 위해서는 자연의 생태적 순환을 자연 자체로부터 배워야 한다. 자연 자체의 자생적인 복원력을 신뢰해야 한다. 그 바탕에서 농사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을 자연으로부터 얻어내는 것! 그것이 자연농업에서 농사 실력이다. 무엇을 하기는 쉬워도 무엇을 하지 않기는 어렵다. 자연에 대한 ‘신뢰’와 자연에 대한 ‘실력’이 없으면 힘들다.

문제는 ‘과잉’이다. 21c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문제의 근원이 과잉생산과 과잉소비이듯, 지금 농업에서도 ‘과잉’이 문제다. 제초제, 화학농약, 화학비료의 과다 사용을 통한 농작물의 과잉생산이 흙과 바다를 오염시키고, 인간의 건강을 헤치며, 결국 자연의 생태적인 순환을 파괴해 버리고 있다. 이런 농업의 현실에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농업에서의 자그마한 대안적 시도가 자연 농업이다. 그래서 버티고 있다. 자연 농업이 현실에서 지속가능한지를 직접 확인해보려고.

 

'생태화장실'이 부른다!

 

오라!

마려운 자는

큰거든

작은거든

가리지 말고

 

버리고

뒤도 안돌아 보는 것!

버리지 않으면

살 수 없어

살기 위해

매일 버리는 것!

 

모으고 모아

썩히고 썩혀

땅심으로,

다시 생명으로

되살려 낼테니

 

주저말고 와라

가장자리 농원으로!

생태화장실로!

 

자급자족을 위한 텃밭농사가 아니라면, 농사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작물을 수확하고, 가공하거나 보관하고, 판매하는 것이다. 특히 자연재배를 하는 소농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점은 힘겹게 재배한 농작물을 판매할 통로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자연 농업은 농사 자체도 힘들지만, 판매는 더 힘들다. 그래서 지속가능하지 않다. 많은 경우 몇 년 힘겹게 시도하다가 농사를 포기하거나 관행농업(석유화학농업)으로 방향을 바꾼다. 당분간 자연 재배 소농을 위한 농업 정책도 기대하기 힘들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기에 스스로 해결 방안을 찾아나가야 했다.

그래서 지난 2018년 10월에 자연재배를 하는 5개 농민단체들이 모여, 3무(무제초제, 무화학비료, 무화학농약)+Non GMO 농작물을 판매하는 주말(매주 토요일) 직거래장터인 ‘자연그대로 농민장터’를 열었다. 생산자인 ‘농민’이 직접 나서서 연 소규모 농민장터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버텨온 결과, 다음 주에 100회 장터를 연다. ‘100번의 고집! 100번의 소통!

 

자연그대로농민장터 ‘시농제’ 축문(2019.3.24.) 가운데서

 

이 ‘자연그대로 농민장터’를 통해,

생산자인 농민이 소비자를 살리고, 소비자인 시민이 농민을 살려 생산과 소비가 다시 하나로 이어질 수 있도록!

농민이 제주의 흙과 자연을 살리고, 그 흙과 자연이 다시 농민과 시민을 되살려 자연과 인간이 다시 하나로 이어질 수 있도록!

농촌이 도시를 살리고, 도시가 농촌을 살려, 농촌과 도시가 하나로 되살아날 수 있도록!

‘농민장터’가 그 씨앗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노동의 가치’, ‘농업의 가치’, ‘생태적 가치’, 그 가치를 공유하는 농민들끼리 만나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만나고, 또 소비자와 소비자가 만나 그 가치와 문화를 공유하고 확산해나가는 ‘농민장터’가 되도록!

그래서 농민의 건강한 삶과 노동이 건강하고 안전한 먹거리를 원하는 소비자의 바램과 충돌하지 않고, 이런 생산자와 소비자의 만남이 청정제주의 흙과 자연을 지켜나갈 수 있게 하는 ‘농민장터’가 될 수 있도록!

포기하지 않고 끝내 함께 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검질이 안심하고 자라는 농원, 버렝이가 안심하고 먹는 농작물’을 모토로 내걸었다. 8년째 그 검질과 버렝이 때문에 속타고 허덕이는 한심한 농부다. ‘가장자리’에서. 근데 농사를 지을수록 몸이 땅에 뿌리를 조금씩 내려 발목을 잡는다. 사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이게 내가 할 일인가? 내가 해야 할 일인가?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인가? 검질을 메고 버렝이를 잡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가장자리 농원’! 사실 한반도와 동북아의 가장자리인 제주도에서, 도시와 농촌의 경계에 놓인 가장자리 땅에서, 자연 농업을 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 보겠다고, 역동적이고 다양한 변화에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찾아보겠다고, 그 의지와 바람을 ‘가장자리 농원’으로 표현했다. 8년차 초보농부!, ‘가장자리’에 발 딛고 서서 다가 올 태풍을 어떻게 맞을까?

 

태풍과 소나무

 

기회다

솟구쳐 날아오를!

내 뿌리가 발목을

잡지만 않는다면

 

꺾이지 않고

엎드려 휘지 않고

스스로 태풍이 되어

태풍이 되어

다시 솟구쳐 오를!

 

뿌리에 발목잡혀

끝내 발목잡혀

아우성을 치는

소나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연세대 사회학과 78동기들! 너희는 아직도 내게 설레임으로 남아있다

사회학과 78동기들! 너희는 아직도 내게 설레임으로 남아있다
- 연세대 사회학과 40주년에 부쳐, 2012년

 

박성인/사회학과 78

 

어떻게 할까 망설여진다.
쓸까? 말까?
그냥 써야 하니까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연세대 사회학과에 대해 할 말이 있을까?
고작 78년에 1년 정도를 다녔는데. 17년 만에 간신히 졸업장을 받기는 했지만.
자꾸 뭔가 ‘학벌’을 중심으로 엮이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데.
‘사회학’ 자체에 대해 배운 것도 별로 없지만, 사회학이 이 시대의 절박한 사회문제들에 대해 어떤 질문과 답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미덥지 않다고 생각해 왔는데.

 

근데 내 삶에서 연세대 사회학과란 무엇인가?
--- ‘진정’ 무엇인가?
아~ 이 한마디는 해야겠구나.
이 말만은 꼭 해야겠구나.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 애기를 할 수 있는가?
내게 연세대 사회학과는 ‘78년에 함께 입학한 30여명의 동기들’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몰랐지만 그 후 살아가면서 언제나 보고 싶었고, 매번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렜고, 몇 년을 못 보더라도 늘 옆에 있을 거라는 아련한 느낌을 주는 동기들이었다.

 

왜 그럴까?
친한 듯하면서도 거리감이 느껴지고, 멀리 있는 듯하면서도 늘 곁에 있다고 느껴지는---.
이건 뭘까?
‘아쉬움’?
20대 초반의 그 젊은 시절을 4년간 온전히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

 

벌써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뚜렷이 기억한다.
제주도 시골 촌놈이 처음 서울로 상경해서 사회학과 동기들에게서 느꼈던 그 ‘문화적 충격’들을.
서울 표준말에 익숙하지 못해 늘 가슴이 답답했는데, 모두가 자신들의 갖는 생각이 또렷하고 말을 잘한다는데 놀랐고, 78년 3월 말인가 신입생 환영식에서 여학생들이 술을 잘 마신다는 거를 보고 놀랐고, 서로가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거를 보고 놀랐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놀랄 일인가라고 헛웃음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 땐 그랬다.

 

대학 입학 후 1년간 나는 겉돌았다.
대학에 대한 기대는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깨졌다.
지긋지긋한 고등학교를 벗어나 대학만 가면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으라는 기대는.
70년대 말이라는 시대 자체가 그랬는지, 아니면 대학이라는 곳이 오늘날이나 옛날이나 여전히 그러한 건지 ---.
종철이와 기독교와 신에 대해서 토론도 해보고, 영철이와 ‘인간걱정반’에서 <광장>을 읽으며 시대에 대해 토론도 해봤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내 스스로에게 숱한 질문도 해 보고, 학교 후문 하숙집에서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을 붙들고 밤새 술을 먹어대기도 했다.
그 때는 왜 산다는 것이 그렇게 공허하고 시시하게 느껴졌을까?
왜 ‘대학’이라는 곳이 내가 기대했던 것을 이룰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건방진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대학’이라는 게 참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었는데 ---- 대학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없겠구나는 생각만이 온통 나를 짓눌렀다.

 

그래서 1학년을 마치자 그냥 ‘대학’을 미련없이 내려놨다.
뒤도 안돌아보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979년 11월 초에, 박정희가 죽은 뒤 며칠 안되서 군대로 갔다.
휴학 처리는 부친께서 하셨다.
덕택(?)에 군 제대 후 1983년에 다시 복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내 삶의 방향과 목표가 달라져 있었다.
80년대 많은 대학생들이 그랬듯이, ‘대학생’이라는 기득권을 버리고 노동 현장으로 향했다.
80년대라는 시대가 우리들에게 요구했던 ‘역사적 사명(?)’에 따라, 나는 사회학 학문은 하지 않지만, ‘사회학’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스스로 위안했다.

 

그리고 그 후 30여 년이 흘렀다.
그 사이 성수, 성남, 구로, 안산, 울산 등 노동현장을 돌고, 두 차례 징역을 살았다.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노동관련 연구소를 만들어 10여 년간 노동이론과 정책에 대해 연구하고, 지금은 출판사에서 인문사회과학 책을 만들고 있다.
그렇게 30여 년의 세월은 흘렀다.

 

그 30여 년의 긴 세월동안, 78동기들과 멀리 떨어져 살았지만, 그들을 한 시도 잊은 적이 없다.
아직도 아련하게 기억한다.
80년대 중반 첫 징역을 살 때, 홀로 창살에 갇혀 있을 때, 그 때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이 78동기들이었다. 사무치게 보고 싶어 했다.
왜 그랬을까? 지금도 궁금하다.
내가 가지 못했던 길을 내 동기들이 가고 있는 것에 대한 그 어떤 부러움 때문이었을까?
젊은 날, 세상과 삶에 대해 동기들과 고민을 같이 나누고 함께 부대끼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외롭고 힘들 때마다, 78동기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간혹 영덕이나 성득이한테서 전화 와서 안부를 묻는다.
전화기를 받는 순간, 마음은 30여 전으로 되돌아간다.
78동기 모임에 자주는 못나가지만, 이멜로 동기들의 소식들을 들을 때마다 지금도 여전히 마음이 설렌다.

 

그리고 너무 궁금하다.
동기들 하나하나 살아왔던 30여 년의 세월이.
동노도 궁금하고, 유경이도 궁금하고, 홍균이도 궁금하고, 경환이도 궁금하고, 용우도 궁금하고, 현옥이도 궁금하고 ---.
그 세월 속에서 동기들이 겪었을 어려움이나 기쁨이나,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가 너무 궁금하다.
언젠가 양말까지 벗어 앉아서 밤새는 줄 모르게 그들의 얘기를 듣고 싶고, 내 얘기를 하고 싶다.
어쨌든 한 시대를 함께 살아왔는데---
근데 어떻게 1년 정도 맺은 인연뿐인데 이렇게까지 되지?

 

사회학과 78동기들!
니들과 35년을 함께 해서 너무 좋았다.
너희는 내가 가지 않은 길이다.
그래서 너희들은 내 마음에 아직도 설레게 남아있다.
남은 세월도 그럴 거라 기대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살아서, 살아서 여여(如如)했어야지(양동주 추모집 서문)

살아서, 살아서 여여(如如)했어야지


참 힘듭니다.
이 글을 쓰기가 힘듭니다.
이런 ‘추모집’에 글을 쓰기가 너무 힘들고 싫습니다.
동주가 지금 있어야 할 곳은 이 ‘추모집’이 아닙니다.
고향땅 함덕 서우봉 밑 바닷가 모래해변, 때만 되면 고사리, 버섯, 곰취를 찾아다니던 제주의 오름과 곶자왈, 그가 농막이라도 지어 농사를 지으려고 했던 동백동산 곁 이 천 평 밭에,
촌놈 동주는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지금!

 

정녕 동주가 지금 있어야 할 곳은 그가 사랑했던 가족과 벗들과 지인들의 ‘마음’속이 아닙니다.
생계를 위해 서툴게 농사짓던 감귤밭 검질(잡초) 작업을 위해 예초기를 들고 있어야 합니다.
벗들과 밤 세워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열띈 정치토론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이 사회와 정치의 민주주의를 위해 열린 촛불 광장에 다시 발 딛고 서 있어야 합니다.
지금, 동주가 있어야 할 곳은.

 

벌써 일 년이 훌쩍 지나가버렸습니다.
동주가 없는 일 년이 무심코 흘러가버렸습니다.
동주는 지금 여기에 없고, 왕방울처럼 꿈뻑이던 두 눈과 티 없이 맑은 미소도 없고, 쩌렁하던 목소리도 없고---
그가 남긴 글과 사진들만 블러그와 페북에 외롭게 남아있습니다.

 

동주는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블러그와 페북에 버섯에 대해, 농사에 대해, 이 사회와 정치의 민주화에 대해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 올리는 것을 즐겨했습니다.
근데 동주가 진짜 원하고 그리워했던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눈을 마주치고 소통하고 토론하고---
그가 블러그와 페북을 통해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린 것은 사람이 그리워서입니다.
숨길 것 없이 자신의 온 몸과 온 느낌과 온 판단을 드러내고, 거칠 것 없이 사람들과 만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남긴 글과 사진은 그가 그토록 만나고자 원했던 사람들에 보내는 절절한 손짓입니다.
그렇게 사람을 그리워했습니다. 동주는!

 

동주가 떠나고 나서야, 그가 남긴 글과 사진을 모두 묶으면서 비로소, 그가 살아왔던 삶과 그의 바람을 조금은 온전하게 알 수 있게 됐습니다.
그와 함께 했던 벗들과 지인들의 추모글을 통해서 동주가 어떻게 살았고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제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됐습니다.
근데 지금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금 여기 동주가 없는데---
지금도 안타깝습니다. 이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라면 미문화원 점거든 울산 노동현장이든 촛불항쟁이든 타산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던 동주가 자신의 병 치유를 위해, 자신의 몸을 위해 모든 것을 걸지 않은 것이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고향에 귀향한 내게 동주가 제안했던 여러 일들을.
제주의 할머니들이 힘겹게 지은 농작물을 모아 팔 수 있는 온라인 유통망을 만들었으면 했습니다.
분열된 진보진영이 하나의 현실적인 정치세력으로 결집해 나가는 방안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제주도를 좀 더 민주적이고 생태적인 지역으로 만들기 위해 도지사 선거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며 직접 제안문을 쓰고 사람을 불러 모으기도 했습니다.
이제 동주의 제안과 바람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됐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을 떠납니다. 언제 떠날 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특히 동주는! 지금은 아니었습니다.
살아서, 살아서 여여(如如)했어야 합니다.
뜻 그대로 “있는 그대로” 여여하게 살려면, 살아있었어야 합니다.
여래(如來)는 “오는 것과 가는 것이 같은 사람”, 즉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지만, 동주는 살아서 여여(如如)했어야 합니다.
살아야 여여(如如)할 수 있습니다.

 

‘여여(如如)하게 살아보자’던 동주는 떠났습니다.
그가 떠난 세월이 일 년이 됐지만, 동주는 지금 혼으로라도 되돌아와 무릎 꿇고 잘못을 빌어야 합니다.
그가 사랑했고, 그리워했던 가족들과 벗들과 지인 분들께.
먼저 떠나가서 미안하다고.
아마 동주는, 내가 아는 동주는 그럴 겁니다.
“먼저 가서 미안해요.”

 

동주의 명복을 빌며. 2019. 10.01.
가장자리 농원에서, 박성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두 아들에게 들려준 '초보운전 십계명'

● 초보운전 10계명 ●

 

1. 음주 운전은 무조건 하지 말라! 걸리지 않을 정도면 괜찮겠지 하다가 음주운전이 습관이 된다.

 

2. 운전 중 뜻밖의 상황에 처했을 때, 당황하거나 쫄지 말라! 침착하게 대처하면 다른 운전자들이 알아서 대처한다.

 

3. 크던 작던 사고가 났을 때는 절대 자리를 피하지 말고, 사람 중심으로 대처하라! 사람이 다쳤는지 안다쳤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모든 것은 보험으로 처리할 수 있지만, 사람이 다쳤을 때 제대로 대처하지 않으면 보험만으로는 안된다. 상대방이 다쳤을 때는 반드시 병원으로 가서 진단을 받도록 해야 한다.

 

4. 운전은 ‘흐름’과 ‘탄력’이다. 도로 주행 중일 때 무조건 천천히 간단고 안전한 것은 아니다. 다른 차들과 흐름을 맞춰야 한다. 도로가 언덕일 때, 오를 때는 탄력을 받고, 내려갈 때는 탄력을 죽여야 한다.

 

5. 운전에서 앞차와의 간격을 잘 유지하는 것이 위급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브레이크를 밟을 때는 후미등으로 뒷차가 어느 정도 간격으로 따라오고 있는 지 확인하는 것을 습관화해야 한다.

 

6. 안전운전은 ‘예측’운전이다. 도로의 상황, 차의 주행 속도 등을 판단하면서 어떠한 상황이 벌어질 지 예측하면서 대비해야 한다.

 

7. 운전을 잘 한다는 것은 악셀레다를 잘 밟는 것이 아니라, 브레이크를 잘 활용하는 것이다. 브레이크가 중요하다! 특히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 차를 정지할 때 브레이크를 잘 활용해야 한다.

 

8. 빗길 운전을 할 때는 앞뒤차간 간격을 잘 확보해야 한다. 빙판길 운전을 할 때는 급출발이나 급정거를 하지 말아야 하고, 빙판길 내리막길에서 차가 미끌어질 때 핸들을 반대 방향으로 꺾어서는 안된다. 그러면 사고가 더 커진다. 미끄러지는 방향으로 미끌어지게 놔두면서 피해를 최소화 해야 한다.

 

9. 야간 운전은 시야를 좁게 한다. 그래서 앞뒷차간 거리를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운전하다가 졸리면 휴게소 같은데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라!

 

10. 주차할 때 동작을 작게 하지 말고, 크게 해라. 우회전을 할 때는 먼저 오른쪽을 살핀 다음 곧바로 왼쪽을 살피고, 좌회전을 할 때는 먼저 왼쪽을 살핀 다음 곧바로 오른쪽을 살펴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제주4.3항쟁과 나, 그리고 노동운동

“4.3은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노동운동의 진전만큼만 진상이 규명되고, 그 만큼만 계승된다.”
-제주4.3.항쟁과 나, 그리고 노동운동-

 

박성인/회원, 가장자리 농원지기

<질라라비>(철폐연대), 2018.3.

 

 

쉬쉬했다. 제사 때나 명절 때 숨죽이며 얘기를 들었다.
4.3때 할아버지가 경찰에 끌려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20대 초반이었던 셋아버지가 무장대로 싸우다가 어떻게 행방불명되셨는지. 그리고 그 일로 아버지가 연좌제 때문에 자신의 진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까지.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4.3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나뿐만 아니라, 당시 제주도민들은 누구나, 어느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4.3은 ‘폭도’들이 일으킨 ‘폭동’이었고, 입밖에 꺼내서는 안될 어두운 역사였다.
잊혀지고 지워져야할 역사였다.

 

82년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기 전까지 제주도에 잠시 머물면서, 친구 수열이와 함께 걸어서 제주 일주를 했다. 4박5일간 도보여행을 하면서 머무는 마을마다 할머니들을 만나 4.3에 대한 얘기를 생생하게 들었다. 직접 겪은 4.3을 얘기하는 그 분들의 눈빛은 공포로 가득찼고, 목소리는 떨렸다.
20세 초반의 내게 ‘제주도민’은, ‘민중’은 그렇게 다가왔다.
‘분노’조차도 압도해 버리는 ‘공포’!
그 ‘공포’가 무엇인지, 4.3이 무엇이었는지 알기 위해 친구들과 4.3.에 대해 자료를 찾고, 4.3.에 관한 영서(<The Cheju Rebellion>, J. Merill)와 일서(<제주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김민주, 김봉현)를 번역하여 주변에 알렸다.
<순이삼촌>(1978년)을 써서 4.3.을 알린 현기영 선생님을 처음 찾아뵌 것도 이때였다.
그렇게 나의 운동은 4.3.과 함께 시작됐다.

 

첫발을 내딛었을 때, 내가 직면한 것은 그 운동의 ‘끝’이었다.
83년 대학에 복학을 하자마자 학교를 때려치우고 민주화운동을 한다고 노동현장으로 갔을 때, 아버지께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선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다고 얘기드렸다.
그 얘기를 들은 아버지는 그 운동의 끝을 우려하셨다.
‘패배’와 ‘죽음’!. 4.3.의 학살 경험으로부터 뼈속 깊숙이 새겨진 두려움과 패배주의. 
그래야만 했다. 민주화와 노동운동을 하려면 시작부터 그 ‘패배주의’에 맞서야했다.
나의 가족과 제주도민들 속에 깊게 각인된 그 ‘두려움’과 ‘패배주의’가 그 때는 그렇게 싫었다.

 

92년 원주교도소에서 두 번째 징역을 살고 있을 때, 신문을 통해 ‘다랑쉬굴’ 유해 발굴 소식을 들었다. 다랑쉬굴 유해 발굴은 4.3의 참혹함에 대해 사회적으로 이슈화시키는 계기였고, 내 마음을 다시 뒤흔든 계기이기도 했다.
제주에서 농민운동을 하는 이야성 선배(지금은 돌아가셨지만)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왜 4.3은 우리에게 죽음으로만, 유해로만 다가오는가? 죽음은 패배한 결과일 뿐인데. 4.3의 참모습은 ‘죽음’이 아니라 ‘항쟁’인데. 4.3항쟁은 민중이 주체가 돼서 자주적이고 통일된 국가를 세우려 했던 투쟁이었는데. 희망이었는데. 왜?”
그 때 조금 더 분명하고 확고하게 깨달았다.
4.3은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노동운동의 진전만큼만 진상이 규명되고, 그 만큼만 그 항쟁의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할 수 있다고.
민주화와 노동해방을 위한 나의 투쟁이 4.3 진상규명과 항쟁정신 계승과 무관하지 않다고.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제주에서도 4.3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운동이 본격화됐다.
‘이제사 말햄수다’, ‘4.3은 말한다’, 생존자들의 한맺힌 증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동백꽃 지다.’ 4.3의 처절했던 순간들이 그림으로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한라산’ 시로 쓰여지고, ‘한라산의 노을’ 소설로 쓰여졌다.
‘제주항쟁’, ‘4.3과 역사’로 조사 연구됐다.  
‘잠들지 않은 남도’로 노래 불리어졌고, 마당극단 한라산의 마당극으로 표현됐다.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가 구성됐고, 합동유령제가 열렸다.
이 모든 노력의 결과로, 마침내 2000년 1월 12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그 특별법에 따라 <진상보고서>가 채택되고, 노무현 정부는 ‘국가공권력에 의한 인권 유린’에 대해 제주도민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4년 국가추념일로 지정됐다.
일단 4.3.진상규명은 ‘화해’와 ‘상생’의 이름으로 한 매듭을 지었다.
아니 진상규명을 위한 국가 차원의 첫 발을 내딛었다.
그래서 ‘4.3 사건’이다.
더 이상 폭도들에 의한 ‘폭동’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4.3항쟁’도 아니다.
“제주 4.3사건이라 함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올해로 4.3.은 70주년이 된다. 국가추념일로 지정도 됐다.
70주년을 맞이해서 ‘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가 구성됐다.
4.3에 대해 전국적으로 알리고, ‘4.3특별법’ 개정을 위한 운동도 전개한다.
추가 진상 규명과 피해자 배․보상, 치유 프로그램도 요구한다.
4.3당시 전국의 형무소에 구속됐다가 학살된 3,000여명에 대한 군사재판 무효화 제기도 한다.
모든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도 이루어지고, 가해자․학살책임자에 대한 규명도 해야 한다.
제주도민 30,000여명을 학살한 책임자 규명에서 미국도 자유로울 수 없다.
4.3이 제주도만이 문제가 아니라 전후 냉전체제의 구축 과정에서 발생한 제노사이드 사례로 보편화하는 시도도 이루어질 것이다.
이 시도는 계속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한 매듭을 지어야 한다.

 

그러나 남는 문제가 있다. ‘4.3항쟁’은?
‘4.3항쟁은 왜 패배했는가?’ ‘21c 4.3항쟁의 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나는 지난 35년간 노동운동을 하면서 이 두 질문을 포기한 적이 없다.
4.3항쟁에 대한 진상규명과 정신계승이 노동운동의 진전과 무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금 한국 사회의 노동운동의 진전이 4.3항쟁의 패배 원인에 대한 규명과 맞물려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해명할 때, 나는 패배주의에 갇힌 ‘피해자’가 아니라, 운동과 삶의 ‘주체’로 설 수 있다.
4.3은 미군정과 그 하수인인 친일세력, 서청 등의 탄압에 맞서 친일청산과 자주적인 통일 독립국가 건설을 염원했던 제주민중들의 항쟁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3만명이 넘는 제주도민이 학살당하고 투쟁을 주도했던 세력들이 궤멸됐으며,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 패배가 제주도민들만의 몫인가?
아니다. 당시 민중이 주인된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염원했던 세력들의 한계였고 패배였다. 4.3.항쟁의 한계는 당시 전국적 수준에서 투쟁의 끝자락에 놓여 있어서 새로운 투쟁을 촉발시켜내지 못한 채 제주지역으로 고립된 것이었다.
앞서지 못하고 뒤따라가면 고립되고, 고립되면 패배하고, 피해자로만 남는다.

 

4.3이 ‘민중항쟁’으로 복원되고, 정명(正名)되려면, 먼저 항쟁 주체들에 대한 뼈저린 평가와 반성적 성찰부터 해야 한다.
그것도 당시 제주도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수준에서.
당시 항쟁을 주도했던 남로당과 건준, 전평 등의 전략과 전술, 그 주체의 역사적인 형성까지 재평가를 해야 한다.
해방 이후 인민위원회, 자주관리운동 등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건설할 아래로부터의 민중권력의 맹아가 존재했다.
그러나 정세인식에서 미군정(미국에 의한 동북아질서의 재편)에 대한 판단의 오류, 신탁통치에 대한 대응에서의 혼선, 전국적 투쟁으로 결집시켜내는 조직력과 정치적 리더쉽의 결여로 아래로부터의 투쟁 역량이 지역별로 계속 소진되는 과정, 일제하 한반도 내에서의 독립운동의 주체 형성 과정에 대한 평가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4.3.은 이러한 재평가 속에서 역시 ‘항쟁’으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그래서 4.3은 한국사회에서 민주화․변혁운동, 노동운동의 진전만큼만 이루어진다.

 

21c에 4.3의 정신계승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특히 제주도의 노동자와 민중들은?
‘변방’의식을 벗어나 ‘가장자리’란 관점을 세워야 한다.
‘변방’의식이란 스스로를 중앙에 의해 항상 피해와 고통을 당하는 ‘피해자’로만 생각한다. 그리고 그 피해와 고통의 결과로 가끔 저항을 하는 주체로.
‘가장자리’의식은 역동적인 부딪힘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나가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관점과 태도를 말한다.
21c 제주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부딪히는 곳, 동북아 세력이 가장 첨예하게 부딪히는 곳, 자본의 욕망과 대안적 삶에 대한 바램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곳이다.
이 부딪힘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탄생한다.
이 가장자리에서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끌려가면, 패배한다.
변화를 주도할 때 이길 수 있다.

 

현재 제주도는 자연이 역사를 압도하고, 그 자연을 자본이 장악해가고 있다.
문제는 자본이다.
강정마을, 제2공항 강행, 난개발, 노동 문제 등으로 제주도가 다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해방 후 ‘민중 주체의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이 ‘4.3항쟁’의 희망이자 과제였듯이, 21c 평화와 인권, 생태와 노동, 민주주의(노동현장, 학교, 마을)의 새로운 전망을 세우고 싸워나가는 것이 ‘4.3항쟁’의 정신을 21c에 계승하는 것이다.
더 이상 피할 한라산기슭은 없다.
새롭고 역동적인 전망을 가지고 ‘노동현장’으로! ‘학교’로! ‘마을’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알뜨르에서 난징을 보다-비무장평화의섬 선언대회 6차 심포지움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제주도민 2차 촛불문화제-세월호 실종자 무사귀환 염원!

세월호 실종자 무사귀환을 염원하는, 두번째 제주도민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5월 24일, 토요일, 저녘 7시 30분, 제주시청 광장에는 300여 촛불이 모여, 실종자들의 무사귀환을 염원하고,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으며, 박근혜 정부를 규탄하고 심판하자는 구호도 등장했다.

그리고 도내 젊은 예술가들이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오다가 참변을 당한 단원고 학생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몸짓, '얘들아 수학여행 가자!'라는 퍼포먼스도 있었다.

문화제를 마친 촛불은 도남동에 있는 새누리당 당사까지 행진한 후 마무리했다.

 

"세월호는 시작입니다.

이대로만 있지는 않겠습니다.

마지막 한 명까지 기다릴께요.

꼭 잊지 않을께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제주에서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촛불'이 타오르다

제주에서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촛불이 타올랐다.

2014년 5월 17일, 저녘 7시 30분, 제주시청앞 광장을 가득 매운 촛불은 "돌아와라 아이들아! 물러나라 박근혜"라는 플랭카드와 피켓을 들고 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이번 세월호 참사의 주책임자의 하나인 '제주해양경찰청'까지 행진해서 그 앞에서 "해양결찰청 해체"를 외치고, "세월호 참사 최종책임자 박근혜는 물러나라"는 리본 등을 다는 것으로 촛불집회를 마무리했다.

 

세월호 참사 한 달!

아직도 20여명의 실종자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이 참담한 현실 앞에서 촛불은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만들어 내길 바랬고,

"기다리라"는 말 때문에 죽어간 어린 학생들을 추모하며, 촛불은 "지켜주지 못해 정말 미안해" 하며 "잊지 않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고 '단힌 문'을 박차고 거리로 나섰다.

 

" 구조를 하라니까 구경을 하고

지휘를 하라니까 지랄을 하고

보도를 하라니까 오보를 하고

조사를 하라니까 조작을 하고

조문을 하라니까 연출을 하고

대책이 뭐냐니까 연출을 하고

대책이 뭐냐니깐 모금을 하고

책임을 지라니까 남탓을 하고

하지를 않으려면 하야를 하고"

 

이제 슬픔을 넘어, 분노를 모아 촛불이 직접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박근혜 정권', 그리고 '국가 그 자체의 존재 이유'로 모아지고 있다.

"이것이 국가인가? 박근혜가 책임져라"

"생명의 존엄이 무너지 나라, 세월호와 함께 침몰한 나라"

"세월호 참사, 박근혜 심판"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수장당한 희생자들의 죽임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실종자 구조!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그리고 박근혜 정부 심판/퇴진까지!

그리고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전면화 되어온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자본의 시장 경쟁 논리가 우리의 일상과 삶 속에 어떻게 철저하게 내면화되어 왔는지, 어떻게 제도화되고 구조화 되어 왔는지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성찰을 시작해야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두 개의 수장(水葬), 1948년과 2014년, 그리고 '해원상생굿'

두 개의 수장(水葬), 1948년과 2014년

지난 4월 19일, 제주시 산지항 제2부두 방파제에서 ‘수장(水葬) 해원상생굿’이 있었다.
4.3.때 군경 토벌대에 의해 수장(水葬)된 희생자들의 해원(解寃)을 위한 굿이었다.
4월 16일 ‘세월호 대참사’로 수장당한 희생자들과 실종자들의 해원과 구조의 염원까지 담아 굿을 했다.

1948년과 2014년, 두 개의 수장(水葬)!
1948년의 수장(水葬)은 국가(군경 토벌대)에 의해 저질러졌다면, 2014년의 수장(水葬)은 국가(무분별한 규제완화, 무능하고 무책임한 행정, 엉터리 재난대응체계 등)와 자본(청해진해운, 비정규직 고용체계 등)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다.
1948년 4.3.에 대한 가혹한 탄압과 살육을 통해 태어난 대한민국은 2014년 ‘세월호 대참사’를 통해 적나라한 자신의 현주소/맨얼굴을 보여주었다.

두 개의 수장(水葬)으로 희생당한 영령들이 ‘해원상생굿’을 통해 해원하시길!
한 사람이라도 더 구조되어 생환하길!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제주 의귀리 '송령이골'에 베롱나무 3그루 심고 빗돌 세우다

지난 3월 22일, 제주 서귀포시 의귀리에 있는 '송령이골'에 베롱나무 3그루를 심고 빗돌을 세웠다.

'송령이골'은 4.3. 때(1949.1.12. 의귀 사건), 토벌대에 의해 학살된 무장대 십수명의 시신이 묻힌 곳이다.

2013년 3월, 노동자역사 자료실 '한내'에서 주관한 4.3.역사기행 당시 참석했던 분들이 자발적으로 제안하여 모금을 해서, 그간 방치되어 왔던 '송령이골' 묘역을 정비하고, 베롱나무 3그루를 심고, 빗돌도 세웠다.

'의귀 사건'은 4.3.항쟁의 역사에서 분기점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4.3..무장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 때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무장대의 시신은 송령이골에 버려졌다.

지금은 3~4개의 무덤이 남아있다.

2004년 5월 13일에 '생명평화 탁발 순례단'이 이곳을 방문하여 푯말을 세웠다.

10여년 전부터 제주도민 가운데 몇몇은 매년 이곳을 벌초해왔다.

2014년 4.3.사건이 '국가추념일'이 됐지만, 당시 항쟁에 나섰던 무장대는 4.3.평화공원에 안치되는 것이 거부됐다.

4.3.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